말문을 막다(피모오, φιμόω, phimoo)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마태 22,34)에서 ‘말문을 막다’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피모오(φιμόω, phimóō)이다. 본래 이 말은 동물의 입에 ‘재갈을 물리다’ 또는 ‘입마개를 씌우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비유적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하다, 곧 ‘침묵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논박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하셨음을 이 동사 하나로 표현한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으면서 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부활 때에는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이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음을 지적하신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마태 22,29)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이들은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부활 이후의 삶이 현세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활은 지금의 삶을 단순히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새로운 생명이다. 따라서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누구의 아내인가?”라는 질문은 부활의 신비를 현세의 질서 안에 가두어 버린 잘못된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탈출기의 말씀을 들어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선언하신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 22,32)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죽음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끊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능력과 부활의 신비를 인간의 좁은 논리 안에 가두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생명을 드러내셨다. 피모오(φιμόω)는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이 말은 인간의 말과 논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재단할 수 없음을 드러내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더 이상의 논박이 멈추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 언제나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때로는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입을 다물기도 하고, 때로는 하느님께서 침묵을 명하신다는 표징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악과 거짓의 말이 잠잠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입을 다물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끊임없이 따져 묻는다. 그러나 마침내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와 섭리의 신비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욥 40,4-5)

여기에서 욥의 침묵은 하느님께서 강제로 입을 막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만난 인간이 자신의 말이 지닌 한계를 깨닫고 스스로 입을 닫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침묵을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의 말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바오로 사도 역시 율법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선언하며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나게 됩니다.”(로마 3,19)라고 말한다. 여기서 입을 다문다는 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때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예언자의 입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막으시는 장면도 나온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씀을 믿지 못했고, 가브리엘 천사는 그에게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라고 말한다. 이때 즈카르야의 침묵은 불신에 대한 징표이자,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의심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었다.

에제키엘 예언자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너를 벙어리로 만들어서, 그들을 꾸짖지 못하게 하겠다.”(에제 3,26)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사명을 영구히 중단시키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의 말조차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그가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할 것인지를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인간의 입은 자신의 것이지만, 하느님의 사람에게 그 입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입이다. 그러므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역시 순종이다.

악과 거짓의 입을 잠잠하게 하다

시편의 저자는 “거만하여 업신여기고 의인을 거슬러 파렴치하게 지껄이는 거짓된 입술들을 잠잠하게 하소서.”(시편 31[30],19)라고 기도한다. 여기에서 침묵은 하느님의 심판을 청하는 기도이다. 의인을 괴롭히는 거짓과 오만의 말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느님께서 그 입을 잠재워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이르면 ‘입을 막는 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베드 2,15)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사용된 희랍어 동사 역시 φιμόω이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입을 막으셨던 바로 그 동사가 이번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른 이들의 어리석은 입을 막는가. 더 큰 목소리로 논쟁해서가 아니다. 상대를 모욕하거나 억압해서도 아니다. 선을 행함으로써이다. 삶으로 진실을 증언함으로써 거짓된 비방이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말문을 막다’는 것은 단순히 말싸움에서 이긴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내가 먼저 입을 다무는 것이고, 때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예언자의 입을 여닫으시는 것이며, 때로는 악과 거짓의 입이 하느님의 힘으로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말 없음은 어쩌면 이것일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한 삶이 거짓의 입을 막게 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두가이들의 입을 막으셨고, 베드로 사도는 선한 삶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입을 막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하느님 앞에서 침묵하고,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말하며, 때로는 말보다 삶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다.

답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
*

이 사이트는 Akismet을 사용하여 스팸을 줄입니다. 댓글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