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16)

제16장
사랑은 망덕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는가?
인간의 지능은, 본래 그 최상선으로 신앙이 제시하는 바를 관찰하기에 적합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의지는 그 신적 대상 안에서 극단의 낙을 누리게 마련인데 이 대상은 전에 결여되어 있다가 생긴 것으로서 그 현존이 내주는 뜨거운 열망을 일으키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거룩히 부르짖는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2)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 41,2-3-최민순 역)
또 마치 사냥시키는 매의 머리에 씌웠던 보를 벗겼을 때 그 매의 눈에 먹이가 될 새가 눈에 띄면 그 사냥매는 즉시 날개를 펴 올리고 만일 끈에 매여 있게 되면 발악을 하면서 힘껏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게 되듯이, 신앙이란 것도 무지의 포장을 벗으면 우리의 최상선을 보도록 우리를 좀 개방시키는 셈인데, 그러나 우리가 아직은 그 선을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이 죽을 인생의 조건에 얽혀 있을 따름이다. 아! 테오티모여,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열망하게 된다.
“오랫동안 뒤를 쫓겨 달린 사슴들이, 갈팡질팡 도망하기 지쳐버리면, 목의 갈증 심하여 물만 그리듯, 짓눌리고 탄식하는 우리 마음이, 주님이시여, 당신을 그리워하며 한숨지오니, 우리의 영혼 이로 인해 또한 병마저 들었사오며, 이는 한가지 그리움에 차서 늘 믿고 부르짖는바, ‘슬프다! 언제리오! 오, 주 하느님 전능하신 이여! 우리의 눈이 당신의 면전에 가는 그때가?’ 하나이다.”(참조. 최민순 역 시편 41,4)
테오티모여, 이러한 열망은 아주 올바른 것이라 하겠으니, 그렇듯이 바람직한 선을 누군들 열망치 않겠는가? 그러나 이 열망이 앞으로 성취된다는 확실한 보장이 이는 한, 그것은 쓸데없는 열망이며 마음의 끊임없는 몸부림뿐일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 더디오는 까닭으로 불평하는바,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시편 42,4)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는 동안 그 원수들이 묻기를,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시편 42,4)라고 묻는 것을 당하는 그는, 오, 슬프다! 만일 어느 날엔가 자신이 사모하고 있는 이 선을 누리게 되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 한, 어떻게 되리오!
그래서 하느님의 짝은, “사랑 때문에 앓게 되느니.”(아가 5,8) 그것은 그녀가 그렇듯이 사모하고 찾아 헤매는 지극히 사랑하는 애인을 즉시 발견치 못하는 연고다. 지극히 사랑하는 저 애인의 사랑은 그녀 안에 한가지 열망을 싹트게 하는데 이 열망은 사랑을 추구하게 하는 열정을 낳게 하며, 더구나 이 열정은, 그녀가 찾고 있는 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그녀의 가엾은 마음을 다 쇠진시키고 병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의 영혼 안에 일깨워 주는바, 곧 희망적 사랑의 노력이 생기게 하는 불안과 고통스러운 근심 때문에 용기를 잃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그 최상의 선은 우리 안에 그처럼 맹렬한 열망을 일으키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영감 속에서 수천 가지로 약속하신 열망을 통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쉽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게 하며,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셨고 더구나 이러한 효과를 얻도록 우리에게 제공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도록 미리 배려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약속과 보장은 특수한 경탄을 자아내는 것으로서 우리의 불안과 초조의 원인을 증가시키며, 더구나 원인을 증가시키느니만큼, 그 효과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파괴시키게 된다. 테오티모여, 물론, 낙원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 때문에 우리가 누려야 할 그 열망을 무한히 튼튼케 하며, 더욱이 이 열망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저 걱정과 불안을 약화시키고 파괴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의 착하심이 우리에게 끼쳐 주신 그 약속으로써 아주 평온한 고요 속에 머물게 되며, 이 고요함은 우리가 망덕이라고 부르는바, 지극히 거룩한 덕행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위임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최상선을 누릴 힘을 지니고 있다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보증된 것이므로 덕행의 두 가지 위대한 행동을 하게 하는데, 하나는 의지가 하느님의 최상선을 누리고자 기대하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로는 의지가 이 거룩한 누림을 열망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오티모여, 바라는 것과 열망하는 것(esperer et aspirer, 영어-hoping and aspiring) 사이에는 다만 다음과 같은 차별이 있을 따름이니, 곧 바란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의 도움으로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열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써 무엇을 욕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우리는 하느님의 호의와 은총과 자비로 인하여 하느님 자신이신 우리의 최상선을 누리게 되고, 이 자비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 호의에 협력케 하시며 우리의 연약한 동의를 그 세찬 은총에 보태는 것을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망덕은 어떤 면에 있어서 열망이란 것과 뒤섞이게 됨으로써 우리는 열망 없이 희망, 즉 망덕을 가지지 못하며 전적으로 희망함이 없이는 열망치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이란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하여 있으므로 늘 그 주요한 위치를 계속 보전하고 있게 마련이며 이것 없이는, 마치 우리가 최상선에 도달하는데 요구되는 방도 내에서 우리는 우리의 최상선에 대하여 그렇듯 대단히 생각할 수는 없듯이, 하느님이신 우리의 최상선을 얻기에 요구되는 방도 내에서 우리는 이 은총을 통해 우리의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로 향한 열망적인 동경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총에 대한 우리의 협력이 마치 성총의 후예인 것처럼 열망은 희망의 후예이다. 또 그것은 마치 열망이 없이 희망하는 이들은 비겁하고 나태하여 거부당하는 것같이 희망이 없이 열망하는 자들은 겁쟁이며 무모하고 교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희망이 열망으로 이어질 때, 즉, 우리가 희망하면서 열망하고 열망하면서 희망하게 될 때,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희망은 열망에 의해서 용감한 열원熱源이 되고 열망은 희망에 의해서 겸손한 요구로 바뀌게 되며, 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므로 바라고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열망적인 사랑에 의해서 양자가 서로 원인이 되는 것인데, 이 사랑은 우리의 최상선에로 향한 것이며, 이 선이란 확실하게 바라면 바랄수록, 그만큼 사랑을 받게 되는 선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희망, 즉 망덕이라는 것은 우리의 최상선을 기대하고 탐구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취하게 되는 흡족한 사랑에 다름이 아니다. 테오티모여, 사랑이 있으면 모두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나의 최상선을 보여 주게 되면 즉시 나는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열렬히 원하게 되며, 그것이 제 자체를 내 위에 태워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나는 훨씬 더 열렬히 그것을 사랑하고 열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말 그것이 지니고 있는 좋음(善性)이란 것은 제 자체를 얼마큼 많이 통해 주느냐에 따라 그만큼 많이 사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에 의해서, 사랑은 그 열원을 망덕, 욕구, 기대에 돌리게 되고 망덕은 하나의 기대하는 사랑, 욕구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망덕이 기대하는 바 최상선이란 것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망덕은 하느님께로부터 선을 기대하고 있고 선은 이분께 즉, 하느님께 있고, 또 하느님에 의하여서 희망하고 열망하기 때문에 망덕의 이 거룩한 덕행은 어디서나 하느님께 인접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신적인 덕 또는 대신덕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