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과 아벨 이야기

카인과 아벨 by 막심 셰수코프 Maxim Sheshukov

1. 제물의 본질과 마음의 행방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농부 카인과 목자 아벨이었다. 세월이 흘러 카인은 땅의 소출을, 아벨은 양 떼의 맏배와 그 기름진 부분을 주님께 바쳤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좋게 보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좋게 보지 않으셨다고 전한다.(창세 4,3-5 참조)

하느님께서 제물의 종류에 따라 차별을 두신 것은 아니다. 곡물 역시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물이기 때문이다. 훗날 히브리서가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바쳤다”(히브 11,4)라고 해설하듯, 핵심은 예물의 종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이의 믿음과 삶의 방향에 있다. 제물은 단순히 손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사람의 삶과 함께 하느님께 올려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카인은 크게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이야기의 중심축은 제사의 형식에서 인간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가의 문제로 이동한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잘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6-7)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마음의 방향을 바라보신다. 아직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2. 마음의 문 앞에 도사린 짐승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의 손끝에서 폭발하지 않는다. 먼저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침묵 속에 싹튼다. 하느님께서는 분노에 사로잡힌 카인에게 섬뜩한 경고를 건네신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죄는 이미 사람 안을 점령한 뒤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 앞에 웅크린 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너는 그 죄악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에게 선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일깨운다. 분노가 일어나는 것과 그 분노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질투가 생기는 것과 질투에 사로잡히는 것도 다르다. 상처를 받는 것과 그 상처를 다른 사람을 파괴할 이유로 삼는 것도 다르다. 죄의 유혹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죄의 완성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유혹 앞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카인은 하느님의 경고를 외면한 채 아우 아벨과 함께 들로 나갔고, 그곳에서 그를 쳐 죽였다. 자그마한 비교와 마음의 상처가 분노로, 분노가 적대감으로, 마침내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은 순간이었다.

3. 땅의 울부짖음과 파괴된 관계

주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본래 서로에게 연결되어 형제의 생명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지만, 죄는 이토록 오만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인간이 은밀히 감추었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서 사라지는 죄는 없다. 아벨의 숨은 끊어졌지만, 그가 흘린 피는 침묵하지 않는다. 땅에 스며든 그의 피가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이 장면에서 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카인은 처음부터 땅을 일구는 사람이었고,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쳤다. 그런데 이제 그 땅은 형제의 피를 받아들이고, 카인에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소출을 내주지 않는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제 힘을 내주지 않으리라.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리라.”(창세 4,12)

죄는 관계를 파괴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형제와의 유대를 파괴하며, 마침내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터전과의 관계마저 흔들어 놓는다. 농부였던 카인은 땅을 잃고, 삶의 안정을 잃으며,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사람이 된다.

4. 자비의 표징과 땅의 역설

형벌의 무게 앞에서 두려워하는 카인을 향해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반전을 보여 주신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으리라고 선언하시며, 그를 만나는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카인에게 표징을 주신다.(창세 4,15 참조)

성경은 그 표징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특정한 신체 부위에 새겨진 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표징이 카인을 보호하여 또 다른 살인과 복수의 악순환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표징은 죄를 면해 주는 특권이 아니라,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을 막으시는 하느님의 보호로 읽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시지만 죄인의 생명마저 포기하지 않으신다. 카인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시지만, 인간에게 또 다른 살인을 허락하지도 않으신다.

정의는 죄를 외면하지 않지만, 자비는 죄인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카인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죽여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생명의 주권은 인간의 손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카인은 주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의 ‘놋’(Nod) 땅에 자리를 잡는다.(창세 4,16 참조) ‘놋’은 히브리어로 ‘방랑’ 또는 ‘유리遊離’와 관련된 이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카인이 자리 잡은 땅의 이름은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처럼 읽힌다.

카인은 뒤이어 도시를 세운다.(창세 4,17 참조) 그는 집을 짓고 도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영혼의 안식을 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디에 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해 살아가느냐에 있다. 카인의 이야기는 정착한 인간 안에도 여전히 방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5. 오늘을 살아가는 카인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서도 반복된다. 누군가의 성취를 보며 마음이 불편해질 때, 이웃의 인정을 견디지 못할 때, 내가 받은 상처를 핑계로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할 때, 죄는 작은 질투와 비교의 모습으로 이미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엎드려 있을 수 있다.

죄는 처음부터 살인의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는 작은 질투로 오고, 때로는 비교하는 마음으로 온다. 때로는 억울함으로 오고, 때로는 “나는 잘못이 없다”는 자기합리화의 모습으로 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간은 카인처럼 묻게 된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형제의 생명과 고통에 책임을 지는 존재다. 이웃의 아픔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가 외면한 생명의 목소리도 하느님 앞에 닿는다.

그래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는 이야기보다 더 깊은 곳을 향한다.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이 질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다. 마음의 문 앞에서 도사리는 죄에 사로잡혀 방랑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형제를 살리는 길로 돌아설 것인가.

카인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을 남긴다. 형제를 경쟁자로 바라보며 그의 삶이 무너지기를 바랄 것인가, 아니면 형제의 생명을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제가 제 형제를 지키겠습니다.” 이 고백으로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밀 때, 우리는 비로소 카인의 어두운 방랑에서 돌아서서 참된 생명의 길을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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