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작은 길’

Carol Bruneau의 책 표지에서

중세의 작은 길(The Little Way of the Middle Ages)

※ 역자 주: 역자의 소개 글 다음의 번역 글은 토마스 J. 크론홀츠(Thomas J. Kronholz)라는 분이 2026년 8월 11일 wordonfire.drg에 기고한 글이다. 번역 본문 앞에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개관을 약술하였고, 다소 생소한 노리치의 율리아나(Julian of Norwich, 1343~1416년 이후)이라는 분을 알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교리교육을 링크로 삽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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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소개 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3.10.14)라는 말씀에서 ‘어린이’와 ‘작은 이들’은 단순히 나이가 어린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공동체 한가운데 세우신 뒤, 그 의미를 하느님 앞에서 가장 작고 의존적인 이들, 곧 ‘작은 이들’ 전체로 확장하신다.

이러한 복음의 ‘작음’은 교회의 영성사 안에서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었다.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노리치의 율리아나(Julian of Norwich, 1343~1416년 이후)의 『사랑의 계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 성 카를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 1538~1584년)의 사목 정신 안에서 드러나는 ‘작은 이들에게 작은 분이 되어 오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St. Thérèse of Lisieux, 1873~1897년)의 ‘작은 길(Little Way)’과 ‘영적 어린이’의 영성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이 말씀은 육화 안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하느님의 신적 하향성(divine condescension)과 자기 비움의 신비를 비추며, 그 자비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어린이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인들의 영성을 함께 드러낸다. 곧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작아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가는 ‘작은 길’의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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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St. Thérèse of Lisieux, 1873~1897년)가 자신의 ‘작은 길(Little Way)’에 대해 담대하게 썼을 때, 그녀는 이를 옛 시절의 힘겨운 길들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길’이라고 선언했다. 영적 어린이의 삶에 대한 그녀의 교리는 프랑스를 위협하던 얀센주의의 흐름에 맞서 자신만의 영성을 개척해 낸 한 영혼의 독창적인 내면에서 솟아난 만큼, 그 영감과 표현에 있어 진정 신선하다. 그녀의 저작들은 은총의 빛으로 조명한 영적 어린이의 삶에 대한 드문 통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녀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교 역사 및 사상과 전혀 별개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두 가지 모두를 오해하는 셈이 된다.

사실 ‘작은 길’은 “은총을 통한 구원”이라는 가톨릭 교리를 요약하여 표현하는 영성이다. 그 뿌리는 복음서에서 발견되며, 그 열매는 성인들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끊임없이 표현되어 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암시하신 교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실천적 수단을 제공한다.

‘작은 길’이 추종자들에게 은총의 작용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한, 우리는 그 교리의 선구자로 수많은 성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데레사의 사상에 미친 영향들을 끌어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녀에게 영감을 준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어린이의 삶에 관한 사상적 역사적 통일성을 조명하는 데 있다. 노리치의 율리아나(Julian of Norwich, 1343~1416년 이후)과 그녀의 신비주의 저작 <사랑의 계시(Revelations of Divine Love)>라는 예시를 살펴보면, 중세에 선포된 영적 어린이의 삶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통일성을 확인해 준다. 반 천년의 세월과 언어, 문화로 갈라져 있음에도 줄리안의 저작은 영적 어린이의 길에 동의하면서도 성녀 데레사와의 알려진 연관성은 없다.

율리아나가 받은 계시의 절정을 향해 가면서, 그녀는 데레사가 자신의 저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어머니에 비유한다. 그리스도를 변함없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을 지닌 분으로 설정함으로써, 율리아나는 그 사랑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의존을 깨닫는 어린이의 영성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이사야 66,13 마태 23,37 참조) 어린이의 자연적 덕성을 묵상하며, 그녀는 영적 어린이의 삶에 대한 기본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본성상 어린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절망하지 않으며, 본성상 어린이는 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며, 본성상 어린이는 어머니와 다른 [어린이] 모두를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천상 어머니를 섬기고 기쁘게 해드리는, 닮은꼴의 다른 모든 덕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덕들이다.”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이 세 가지 덕은 영적 어린이의 삶을 살아가는 데 권장되는 수단이다. 이 덕 중 첫 번째인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성녀 데레사에 의해, 비겁한 후퇴가 아닌 자신을 내맡김이 용서를 얻어낼 것임을 알고 자비롭게 아버지의 품에 스스로를 던지는 통회하는 어린이의 확신과 사랑으로 묘사된다. 줄리안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모든 의심을 배제하면서 이 동일한 현실을 부정적인 어조로 강력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어린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듯, 그리스도인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절망할 수 없다고 추론한다. 두 사람 모두 부모 사랑의 흔들리지 않는 안도감에 기초한 급진적 확신의 영성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변함없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을 지닌 분으로 설정함으로써, 줄리안은 그 사랑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의존을 깨닫는 어린이의 영성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덕인 자신에 대한 불신은 어린이가 자신의 보잘것없는 힘에 의존하지 않는 겸손한 현실주의를 말한다. 데레사는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 없음을 알고 선의의 시도에 만족하며, 아버지가 곧 자신을 높이 들어 올려 계단 위로 안아 올려줄 것임을 아는 어린이의 비유로 이 덕을 기억에 남게 묘사했다. 줄리안에게 이 현실은 본성의 빛 안에서 단순히 인정된다. 즉, 어린이들은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부모의 힘을 참조하며 반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목표는 자신의 제한된 능력을 매달림으로써가 아니라 부모의 돌봄에 신뢰의 닻을 내림으로써 달성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덕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단호한 사랑은 데레사가 다양하게 ‘사랑의 길’이라 불렀던 ‘작은 길’의 핵심이다. 첫 번째 덕과 세 번째 덕을 연결하며 데레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글을 남겼다.

“오직 신뢰만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 두려움은 죄인들에게 위협이 되는 엄격한 정의를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여주실 정의가 아닙니다.”

그녀에게 신뢰는 사랑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고, 사랑은 일치로 이끈다. 반면에 노예적인 두려움은 거리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모든 처지의 영혼들이 어린이로서 아버지의 품에 스스로를 던지라는 데레사의 저작 속 수많은 권고를 발견하게 된다.

이 덕을 본성의 관점에서 규정함으로써, 줄리안은 인간이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사랑 안에서 부모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은 그리스도인 삶의 요약이자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몸(Mystical body)에 결합시키는 완덕의 끈이다. 이 거룩한 충동, 즉 관계와 친교에 대한 열망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우리 본성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 세 가지 태도는 구원의 태도임이 입증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 있는 힘보다 하느님과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은총의 승화를 나타낸다. ‘작은 길’의 대중화가 때로는 존재보다 행위를 강조하며 부차적인 특성들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줄리안은 내적 삶에 집중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내적 교환을 묘사하며 ‘작은 길’의 핵심을 가리킨다. 줄리안은 행위, 즉 일상의 행위를 큰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을 그리스도의 신성한 힘으로 교환할 것을 장려한다. 참으로 ‘작은 길’의 핵심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바오로적 패러다임에 있다. 우리의 가난을 그분의 풍요와, 우리의 비참함을 그분의 자비와, 우리의 약함을 그분의 힘과 바꾸는 것이다.

율리아나가 어린이의 삶을 영적 삶에서 가장 높은 경지라고 선언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신에서이다. 이러한 영혼들은 본질적으로 은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계가 있고 타락한 인간은 높이 올려지기 위해 은총의 선물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현실들을 연결하며 율리아나는 이렇게 쓴다.

“그리고 나는 은혜로우신 우리 어머니께서 우리를 아버지의 지복으로 키워주실 때까지, 약함과 능력 및 지혜의 부족함 속에 있는 어린이의 삶보다 이 삶에서 더 높은 경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 그리하여 나는 본성에 의해 그분에게서 나온 그분의 모든 복된 자녀들이 은총에 의해 다시 그분 안으로 인도될 것임을 깨달았다.”

인간의 오만과 허영을 뒤엎으며, 어린이의 삶은 역설적으로 영적 삶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찬양받는다. 이는 어린이의 마음이 가르침과 은총에 열려 있어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에 의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작은 길’과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펠라기우스적 관념에는 숨겨진 덫이 있다. 즉, 우리의 구원이 주로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허물과 실패는 우리를 낙담과 절망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적 삶은 주로 맡김의 작업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분의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는 성령께 대한 맡김이다.

은총으로 의화된 우리는 단순히 큰 사랑으로 수행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행위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계명은 ‘작은 길’의 능동적 차원을 포괄한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 우리가 땅 위에 하늘 나라를 건설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적 행위들은 신성화될 수 있다. 이 성령에 대한 충실함은 우리를 은총 안에 보존하여 율법을 완성한다.

노리치의 줄리안과 성녀 데레사가 영적 어린이의 삶에 대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어떤 개인적 친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동일한 복음과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한 분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은 길’의 실천에 있어 데레사를 모방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줄리안 여사의 영적 어린이의 삶의 모델을 따를 수도 있다. 중세의 그림자 속에 살았던 또 다른 성인인 성 카를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 1538~1584년)는 그리스도 자신이 이 길의 선구자이자 모범이라고 가르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작은 이들에게는 정녕 ‘작은 분’이신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이 있어야 한다. 겸손한 이들에게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탄생 때에 작으셨다. 길가의 작은 도시, 베들레헴의 작은 구유에서 매우 비천하게 태어나셨다. 그분의 집이었던 나자렛도 작았으며, 그분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아버지 때문에 작으셨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 그분은 제자들 때문에 작으셨으니, 어부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전파하신 겸손의 교리 때문에 작으셨고, 사시는 동안 내내 작으셨다. ‘ …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은 죽음 속에서도 작으셨다. 그러므로 작은 이들이 모든 면에서 작으셨던 그분께 나아가도록 허용하자. 닮은 이들은 서로 쉽게 섞이는 법이다.”

작으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그분의 숭고한 겸손을 닮아감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자아라는 절벽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그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분의 받아들이시는 마음 위에 스스로를 던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영적 어린이의 삶을 확언하셨다면 –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 그것이 그것 없이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겸손의 조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녕 작은 이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시며(마태 19,14), 그들에게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마태 11,25). 우리의 약함을 자각하되 그분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자비를 더욱 확신하며,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있도록 스스로를 은총의 작용에 내맡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충실한 사랑 안에서 겸손히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작은 길’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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