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치의 율리아나

(교황 베네딕토 16세 전前 교황님의 2010년 12월 1일 일반수요일 교리교육)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지난 9월 영국을 방문했던 사도적 순방을 여전히 큰 기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증언과 가르침으로 교회사를 풍요롭게 한 수많은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한 땅입니다. 그들 중 가톨릭교회와 성공회 공동체 모두에서 공경받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오늘 아침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신비가 노리치의 율리아나(Julian of Norwich)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녀의 삶에 대한 매우 드문 정보는 주로 <사랑의 계시(Revelations of Divine Love, 가톨릭출판사, 강대인 옮김, 2023년)>라는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친절하고 경건했던 이 여인이 자신이 본 환시의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녀는 1342년부터 1430년 무렵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는 교황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복귀한 후 발생한 대분열로 흔들렸던 교회에게나,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국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백년전쟁)의 여파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에게나 모두 혼란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도 백성들에게 평화와 사랑, 기쁨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 노리치의 율리아나 같은 인물들에게 영감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율리아나 자신이 전하듯, 1373년 5월(아마도 13일) 그녀는 갑자기 매우 중한 병에 걸려 사흘 만에 죽음에 이르는 듯했습니다. 임종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사제가 그녀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을 때, 율리아나는 건강을 급속히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16가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훗날 이 계시들을 <사랑의 계시>라는 책에 기록하고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건이 있은 지 15년 후, 주님 친히 그녀에게 그 환시들의 의미를 밝혀주셨습니다.

“너는 이 일에 담긴 네 주님의 뜻을 명확히 배우고 싶으냐? 이것을 잘 알아두어라. 사랑이 바로 그분의 뜻이었다. 누가 그것을 너에게 보여주었느냐? 사랑이다 … 왜 그분이 그것을 너에게 보여주셨느냐? 사랑 때문이다 … 그리하여 나는 사랑이 우리 주님의 뜻임을 배웠다.”(노리치의 율리아나, 사랑의 계시, 86장)

하느님의 사랑에 영감을 받은 율리아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녀는 고대의 은수자(Anchoress)처럼 노리치 시에 있는 성 율리안 성당 옆의 작은 은수처(cell)에 머물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당대 노리치는 런던에서 멀지 않은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녀가 ‘율리아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수년 동안 머물렀던 은수처 옆 성당의 성인 이름인 율리아노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은수자(recluse)’라 불리던 모습으로 이처럼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겠다는 결정은 오늘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의아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그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수 세기 동안 상당수의 여성이 리보의 성 엘레드(St. Aelred of Rievaulx)가 작성한 규칙과 같이 자신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규칙을 받아들이며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은수녀(Anchoress)들은 은수처 안에서 기도와 묵상,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그들은 고도로 정제된 인간적·종교적 감수성을 발전시켰으며, 백성들의 공경을 받았습니다. 조언과 위로가 필요한 모든 연령과 처지의 남녀가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이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머묾으로써 율리아나는 수많은 이들의 조언자가 되고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율리아나가 많은 방문객을 맞이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대의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는 1413년 영성 생활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노리치로 율리아나를 찾아갔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 생전에 율리아나가 ‘데임 율리안(Dame Julian, 율리안 여사/귀부인/수녀님)’이라 불린 이유이며, 그녀의 유해가 안치된 묘비에도 그렇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해 은둔하는 남녀들은 이러한 결정을 통해 타인의 고통과 약함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벗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물러나 있던 세상은 갖지 못한 지혜를 갖게 되며,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그 지혜를 친절하게 나누어 줍니다.

따라서 저는 봉쇄 수도원의 남녀 수도자들을 봉헌된 마음과 감사함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날 봉쇄 수도원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와 희망의 오아시스이자 온 교회의 보배로운 보물입니다. 특히 그들은 하느님의 최우선성과 끊임없고 간절한 기도가 신앙 여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 충만한 침묵과 고독 속에서 노리치의 율리아나는 <사랑의 계시>를 썼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버전, 즉 더 짧은 판(아마도 더 오래된 판)과 더 긴 판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 책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으며 그분의 섭리로 보호받고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둔 낙관주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사랑은 결코 끊어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사업을 이루셨고, 이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드셨으며,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작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끝없이 보게 될 것입니다.”(신성한 사랑의 계시, 86장)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노리치의 율리아나의 환시에서 자주 되풀이되며, 그녀는 일종의 담대함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신비신학이 지닌 가장 특징적인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느님 자애의 친절함과 배려, 온유함은 너무나 커서 이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에게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성경의 예언자들도 창조와 강생(육화)으로 완성되는 구원 역사의 전체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온유함과 강렬함, 완벽함을 나타내기 위해 가끔 이러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상 인간의 모든 사랑을 뛰어넘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 말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노리치의 율리아나는 영성 생활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전적으로 그리고 온전한 신뢰로 이 사랑에 자신을 열고, 사랑이 삶의 유일한 인도자가 되도록 맡길 때에만 모든 것이 거룩하게 변모하고 참된 평화와 참된 기쁨을 찾아 이를 세상에 비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다른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모든 신앙인에게 끊임없는 도전이 되는 주제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관점을 설명할 때 노리치의 율리아나의 말을 인용합니다.(참조: 304-313, 314항)

만일 하느님께서 지극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시다면, 왜 악과 무고한 이들의 고통이 존재하는가? 성인들 자신도 바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앙의 조명을 받은 그들은 우리 마음을 신뢰와 희망으로 열어주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섭리의 오묘한 계획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악으로부터도 더 큰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리치의 율리아나가 썼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앙 안에 굳건히 머물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서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사랑의 계시, 32장)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습니다. 우리 마음의 가장 순수하고 깊은 열망을 하느님께, 그분의 한없는 사랑에 바친다면,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All will be well)”, “모든 종류의 일들이 다 잘될 것입니다(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 이것이 노리치의 율리아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최종 메시지이며,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 앞에 소개한 <사랑의 계시>라는 책의 5-11쪽에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그 번역본이 아닌 영어본에서 옮겨온 내용을 게재한다. ‘노리치의 줄리안’이라고도 하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이미 출간된 책이 있으므로 이에 따라 ‘노리치의 율리아나’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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