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윤종걸(첼레스티노) – 한국 살레시오회 협력자로서 협력자회 창설(1876년) 150주년을 맞아 <살레시오가족>에 협력자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모든 여정에 성모님께서 함께하신 것처럼, 돈 보스코 성인의 거룩하고 위대한 삶 또한 맘마 마르게리타의 동반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돈 보스코는 종종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다.”라고 했습니다. 2006년, 교회는 맘마 마르게리타를 ‘가경자’로 선포하며 그분의 거룩한 삶을 기렸습니다.
소명으로 받아들인, 가시밭길이 예견된 결혼
마르게리타 오키에나(1788~1856년)의 가족은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살던 ‘베키’와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후, 세 살배기 아들 안토니오와 병든 어머니를 홀로 돌보며 농사일까지 해야 하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 농촌에서는 마을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갔고, 프란치스코의 어머니는 아들이 마르게리타에게 청혼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24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처녀 마르게리타가 주변의 염려를 물리치고 홀아비 프란치스코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녀가 이 결혼을 소명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마르게리타는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선한 사람’임을 확신했고, 또 얼마나 성실하게 땅을 일구는지 지켜보며 알고 있었습니다. 훨씬 조건이 좋은 미혼 청년과 결혼할 수도 있었지만, 가시밭길이 예견된 이 결혼을 받아들인 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게리타는 결코 화려한 생활이나 편안함을 좇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결혼 후 마르게리타의 삶은 예상대로 고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게리타는 불평 한마디 없이 가정을 꾸려나갔습니다. 아픈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정성껏 간호했고, 안토니오에게는 친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이런 헌신적 사랑 덕분에 새 가정은 안정을 되찾았고, 그 평화로운 토양 위에서 1813년 요셉이, 1815년 8월 16일에는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 될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뛰어든 마르게리타의 결단은 훗날 돈 보스코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결단으로 이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부성애를 가진 강인하고 온화한 어머니
시골의 평온함을 누리던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갑자기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내 요한이 겨우 2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29세의 마르게리타는 유럽을 휩쓸던 기근 속에서 홀로 세 아들과 병든 시어머니를 돌봐야 했습니다. 안정을 위해 재혼할 수도 있었지만, 단호하게 더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아이들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어미입니다. 저는 결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합니다.”라며 자신의 노동과 신앙, 그리고 희생으로 아이들을 키우기로 했습니다.
마르게리타는 당시 대다수 여성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명확한 생각과 확고한 신앙을 지닌 강인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견디어내고 성격이 매우 다른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돌볼 수 있었습니다. 마르게리타는 엄격하지만 온화하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을 길렀습니다. 그녀의 훈육은 처벌이 아니라 예방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구석에 회초리를 놓아두었지만,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마르게리타는 두려움이나 처벌이 아닌, 온화함과 신뢰를 통해 잘못된 행동을 막을 줄 알았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친절한 사랑과 끊임없는 관심으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훗날 어머니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강인한 여성이셨다. 아버지가 없었지만 나는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엄격함과 성모님의 따뜻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 섭리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일상적인 관습이나 교육 방식을 초월했고, 돈 보스코에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보고 계시다.”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 요한의 마음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도로 거룩해진 노동, 존엄함으로 변화된 가난, 지칠 줄 모르는 봉사를 통해 표현되는 마르게리타의 사랑과 인내의 일상은 요한에게 씨앗을 심어주었고, 그 씨앗은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위한 전 세계의 살레시오 가족으로 꽃피웠습니다.
자녀들의 미래를 가꾸는 지혜로운 교육자
아홉 살 요한의 유명한 꿈, 즉 거친 소년들이 온순한 양으로 변하는 꿈을 이야기했을 때, 그 꿈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바로 마르게리타였습니다. 마르게리타는 “사제가 될 꿈인지 누가 알겠니!”라고 말하며 수년간 키워나갈 거룩한 소명을 그의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공부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공부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안토니오는 책을 읽고 있는 요한에게 “나처럼 일을 해서 빵을 벌어라”라며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럴 때도 마르게리타는 단순히 요한의 편을 들어 안토니오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가치관이 다른 안토니오에게 “요한은 너와 다른 길을 갈 아이”라며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갈등이 깊어지자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그녀는 겨우 12살인 요한에게 보따리를 싸주며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서라도 공부를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그렇지만 요한을 집에서 내보내는 것이 그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면서도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르게리타는 성모님과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에 뿌리를 둔 도덕적 올바름으로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요한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너를 영예롭게 하는 것은 옷이 아니라 덕행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나는 너를 성모님께 바쳤고, 이제 나는 네게 완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부탁하고 싶구나.”라는 신앙과 모성애로 가득 찬 말을 합니다. 성덕은 추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으로 드러나는 은총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가치들은 돈 보스코의 삶과 사목활동을 특징짓는 영적 DNA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협력자, 가난한 아이들의 어머니, 공동 창립자
사제가 된 돈 보스코가 토리노의 발도코에서 벽돌공, 굴뚝 청소부, 착취당하거나 일자리를 찾고 있는 아이들, 집이나 가족이 없는 아이들,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때, 마르게리타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었습니다. 1846년 돈 보스코가 과로로 중병에 걸린 후,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마르게리타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난 떠날 각오가 되어 있다.”면서 58세의 나이에 시골집을 떠나 토리노로 갔습니다.
1847년 5월 비 오는 어느 날 저녁, 맘마 마르게리타와 돈 보스코는 갈 곳 없는 한 소년을 집안으로 받아들이면서 살레시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맘마 마르게리타는 항상 하느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며 가난과 기도, 그리고 희생의 삶을 그분께 봉헌함으로써 수많은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텃밭을 가꾸고, 음식을 만들고, 밤에는 아이들의 누더기를 수선해 줍니다. 결혼반지와 옷을 팔아 음식을 사고, 상처를 치료하고, 소년들 마음의 고백을 들어주면서 모든 소년의 영적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맘마 마르게리타는 돈 보스코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협력자가 되었고, 발도코 오라토리오의 수많은 소년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마르게리타는 아침과 저녁 기도, 묵주 기도, 삼종기도, 그리고 가장 유명한 “저녁말씀”과 같은 거룩한 전통을 일상생활에 가져왔습니다. 매일 저녁 짧은 묵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감사와 격려, 그리고 부드러운 도덕적 가르침으로 마무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소박한 전통은 전 세계 살레시오 공동체 생활의 초석이 되었으며, 오늘날 수많은 살레시오 가족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버둥거리는 아이를 부드럽게 꼭 안고서는 “소용없어.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차분하고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녀는 대화를 통해 잘못을 바로잡는 인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격언으로 가르치고, 일상의 지혜로 인도했습니다. 이러한 모성적 보살핌은 돈 보스코의 사목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규율의 진정한 목적은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형성하는 것임을, 교육이 성공하려면 학생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 때 가능하다는 것을, 순명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비롯된 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기쁨, 가족 정신, 그리고 친절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살레시안의 분위기는 맘마 마르게리타의 모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성, 종교, 사랑에 기초를 둔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체계는 어릴 때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발도코에서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직접 목격한 것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맘마 마르게리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레시오 가족의 진정한 ‘공동 창립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수도회를 교회 기관에서 가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장 친근한 옆집 성인의 모범
맘마 마르게리타는 그리스도인 모성의 모범으로, 모성애가 성덕을 이루는 강한 원동력이며, 성인들이 때로는 신학교가 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길러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며, 성인을 만드는 데는 또 다른 성인이 필요합니다. 맘마 마르게리타는 돈 보스코와 마찬가지로 좋은 천으로 도미니코 사비오와 미켈레 루아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을 만들어낸 재봉사였습니다. 맘마 마르게리타는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는 가난을 우리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즐거움은 영원한 삶에 있다.”는 말씀을 남기고 1856년 11월 25일 68세를 일기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살레시오 사명을 위한 첫 번째 협력자가 된 맘마 마르게리타의 삶은 돈 보스코 성인의 카리스마를 따라 살며 성화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살레시오협력자에게는 옆집 성인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협력자들은 일상의 모든 환경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성소임을 깨달아 모든 이, 특히 청소년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함으로써 맘마 마르게리타가 보여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맘마 마르게리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모든 위대한 역사 뒤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일깨워줍니다.(살레시오 가족, 202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