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우리는 복음사가 마태오가 전해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관한 내용을 듣는다.
마르코복음이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에서 겪은 악마의 유혹에 이어 예수님의 공생활을 기록하듯이 마태오복음 역시 같은 순서를 따르지만 조금 더 자세하고 긴 내용으로 요르단 강에서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참조. 마태 3,13-17), 그리고 광야에서 받은 악마의 유혹과 그에 대한 승리(참조. 마태 4,1-11)를 전한 뒤 오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린다.
1. “갈릴래아…카파르나움…큰 빛”
라삐와 예언자로서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마태 4,12)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유다 지역에서 세례자 요한과 합류하시기 위하여 떠나오셨던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스승 격인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구금 소식을 접하시는 한편 당신이 공공연하게 나서시어 사목을 시작하실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셨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마태 11,13) 하신 것처럼 율법과 예언자의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슬기로운 영적 지성을 발휘하여 갈릴래아로 가신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라고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이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이사 8,23-9,1)라는 700여 년 전 이사야 예언서의 대목을 수록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이동’이요 ‘물러나심’이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에 따른 예수님의 두려움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이었다. 훗날 3~4세기경 이집트나 시리아 지역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닮고자 세상으로부터 사막으로 이동했던 사막 교부들이 생겨났으며 교회의 역사 안에서는 은수자들이 생겨나기도 했다.(※더 읽기: 예수님의 아나코레시스 https://benjikim.com/?p=16576)
예수님께서는 즈불룬 지역의 나자렛을 떠나 납달리 지역에 속한 호반의 도시 카파르나움으로 가신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카파르나움은 납탈리 지파의 땅에 속한 포구였을 뿐 즈불룬 지파의 땅과는 관련이 없다. 마태오가 지명을 다소 부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는 셈이다. 마태오는 그저 오래전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려고 의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변방이요 외곽이며 이방인들과의 경계 지역인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에서 이사야의 말처럼 모든 백성에게 “큰 빛”으로서 활약을 시작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긴 여정 끝에 약속의 땅이었던 팔레스티나에 이르렀을 때,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땅을 열두 부족에게 나누어 주는데, 각 부족은 야곱의 열두 아들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참고. 창세기 49장) 즈불룬은 레아의 두 번째 아들, 납탈리는 라헬의 종 빌라의 두 번째 아들이다. 즈불룬과 납탈리 두 부족은 북쪽 갈릴래아를 차지한다. 이 지역은 아름답고 기름진 지역이었으나 국경을 넘어오는 외적에 노출된 곳이었다. 기원전 732년경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은 즈불룬과 납탈리 두 곳 다 나중에 이방인 지역이 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 이방인 지역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원전 700여 년 전에 예언하고 있다.
“카파르나움”은 지리적으로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먼 외부에 위치하며, 종교적으로는 순수하지 못한 곳이었다. 이방인들이 많았고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문화와 풍습들이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래아에서는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지만 바로 그곳에서 ‘빛’이 비친다. 빛은 변방에서부터 온다. 다른 이들은 광야로 물러가거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를 선택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활동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선택하신 까닭은 갈릴래아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사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들’로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멸시당하고 소외당하고 수탈당하고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 가운데에서 활동을 시작하신다. 내 인생 안에서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과도 같이 암담한 시기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과연 그때 주님께서 “큰 빛”이 되셨던가?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이미 세례자 요한이 자기 사목을 시작하면서 선포했던 선포의 내용과 정확하게 같다.(참조. 마태 3,2)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인정하고 계속하려는 예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도 사고와 행동의 구체적인 변화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며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회개”를 요청하신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가 같다고는 하지만, 굳이 구분하여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서 강세가 “회개”에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선포에서는 그 강조점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점일 것이다. 예수님의 사목 활동 시작과 선포 안에서, 하느님께서 충만하고도 유일하게 인도하고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바야흐로 하늘 나라가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의 회개를 가능하도록 인도하시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라는 원천이다.
세례자 요한도 같은 선포를 하였지만, 이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례자 요한은 말 그대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것이고, 예수님 자신은 이미 스스로 하늘 나라이시고 하늘 나라를 실제로 실현하시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선포는 그 선포 안에 이미 현존하는 실재이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죄를 버리고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 사랑의 다스림 아래 두라’는 명령이고, 하늘 나라의 시민답게 살라는 말씀이다.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삶을 사는 것이요, 완전한 방향 전환이다. 이는 어떤 죄를 짓고 뉘우치며 다시 그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 정도가 아니다. 살아가는 방법만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까지 바꾸는 생각의 변화이다. 옷만 바꾸어 입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는 곧 ‘복음’의 선포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이루시는바, 모든 이를 위한 복음이요 생명이며 구원인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를 받는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의 현존과 존재에 참여하기를 열망하고 그에 걸맞은 존재만 될 수 있다면, 우리라는 존재도 완전히 새로워져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라삐들은 곧잘 『임금께서 다스리시도록 하면 임금 자신이 스스로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하면, 이미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굳이 다스리실 필요가 없는 하늘 나라이다.
3. “나를 따라오너라…곧바로…따랐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맨 먼저 앞장서 따르는 어떤 이들에게도 간혹 이런 일들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기대에 찬 시선으로)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기대에 찬 시선으로)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마태 4,18.2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 하면서 권위 있고도 단순하게 부르신다. 그리고 이러한 초대와 함께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라는 약속을 제시하신다. 하늘 나라가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메시아 예수님의 빛이 그들을 비추며 그들에게 힘을 주시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0.22)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된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마태 4,20.22) 순명했다는 점을 유독 강조한다. 이러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응답은 예수님 말씀의 효력이다. 이는 또한 “때가 차서”(마르 1,15),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라면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 7,29) 하는 대로 ‘때가 얼마 남지 않아’, 하늘 나라가 역사 안에 펼쳐지게 되었다는 표징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동업자요 조력자로서 그 어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 사회의 식자들이나 영향력 있는 지도자급의 인사들이 선정되지 않고 단순하고 무식한(아마도 문맹이었을) 어부들이 선정되고 있음에 유의할 것이다. 그들은 문맹이었으나 그들의 삶으로는 유다인들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아니면 과거에 어떤 경력을 가진 사람인가를 보아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되어갈 몫을 보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하느님께 믿음을 둔 이들 앞에 불가능은 없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전한 자유의사로,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자 “그물을 버리고…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생계와 직업, 그리고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의 부르심에 대한 그 결정과 대답을 매일 새롭게 하면서 항구하게 인내하며 나아갈 것이다. 때로는 따라가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것이고, 그들이 기대한 만큼의 그 어떤 보상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일까지 생길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불성실보다 예수님의 약속은 더 강하고 힘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둠이 걷힌 부활절 새벽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그때의 그 기쁜 소식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신 분의 음성이 이렇게 매일매일 우리의 일상에 의미 있는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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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마태 4,12-23 참조)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설교를 시작하셨는지 알려줍니다.
1. 예수님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아주 단순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이 말씀이 그분의 모든 설교의 기본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다스리는 방식, 우리에게 행동하시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회개하여라.” 다시 말해 “삶을 바꿔라”입니다. 삶을 바꾸십시오. 새로운 방식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사랑과 함께 사랑을 위해,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해 사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되풀이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가까이 있다. 나를 중심에 두어라. 그러면 삶이 바뀔 것이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주님은 당신 말씀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2. 우리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지 살펴본다면, 당시의 “어두운” 지역에서 시작하셨음을 알게 됩니다.…“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16; 이사 8,23-9,1 참조)에 사는 이들입니다.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예수님이 설교를 시작하셨던 이곳은 민족, 언어, 문화가 뒤섞여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습니다. 그 지역은 실제로 교차로 역할을 했던 바닷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어부들, 상인들, 외국인들이 살았습니다. 분명 선택된 민족의 순수한 신앙이 있던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곳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안뜰에서 시작하신 게 아니라, 나라의 반대편에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 국경지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변방에서 시작하셨습니다.…
3. 끝으로, 예수님은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 두 형제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19)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부였습니다. 능력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가려낸 사람이나 성전에서 기도하던 신심 깊은 사람이 아니라, 일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 주목해봅시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예수님은 어부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들의 삶에서 시작하여 그들을 매료시키십니다. 당신과 똑같은 사명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0) 왜 ‘곧바로’입니까? 단순히 말해 그들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재빨리 준비를 갖춘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멋진 책임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매일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직 그분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밑바닥까지 사랑하시며, 인생의 바다에서 우리를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1월 26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강론, 출처-VaticanNews 한국어 사이트)』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