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옆의 이미지는 ChatGPT에게 “지혜로운 노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하나를 달라.”고 요청하여 얻은 이미지이다. 내가 한국말로 묻고 있고, 나를 한국인으로 알고 있을 텐데 왜 서양 사람의 이미지로 주었느냐고 따졌더니, 「제가 처음 이미지를 만들 때 사용한 기본 프롬프트(묘사)가 ‘지혜로운 노년’을 특정 인종을 지정하지 않고 요청받았기 때문에, 이미지 생성 모델이 학습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서양인(백인 노인)**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기본값처럼 내놓은 거예요. 즉, 제가 의도적으로 서양 사람을 선택한 게 아니라, 모델의 기본 편향 때문에 그렇게 나온 거예요. 다만, 사용자가 ‘동양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면, 그에 맞게 결과를 낼 수 있죠. 원하시면, 제가 앞으로는 기본적으로 ‘동양인 / 한국인’으로 설정해서 이미지를 드리도록 할까요?」라고 답한다.
이 말은 ‘지혜로운 노년’에 관한 자료나 검색 항아리에 ‘서양인’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 적어도 이미지 면에서는 주류로 담겨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악한 기계가 워낙 그럴듯하게 거침없이 대답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검색창에 주어진 내용을 그대로 흡수하고 마는 오류를 범한다. 기계는 기계일 뿐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인 사고로 자꾸 따져 물어야 한다. ※함께 읽기: 노인에 관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6가지 생각 http://benjikim.com/?p=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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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문턱, 우리는 이것을 물러남의 과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끝 역시 처음 시작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첫 부분의 선율이 이후의 곡 진행 전체를 만들어내듯이, 끝부분 역시 곡 전체의 형태를 미리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삶은 결코 여러 부분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란 하나의 전체이며,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전체로서의 삶은 삶의 모든 시기마다 항상 현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은 삶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칩니다. …
삶이 끝난다는 사실
아이들은 삶이 끝난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배가 고프거나 외부 세계로부터의 보호를 필요로 할 때야 비로소 미래에 닥쳐올 죽음의 순간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듯합니다. 죽음에 대한 느낌이 더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청춘 시절입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고양된 삶의 감정이라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기는 인간이 가장 쉽게 죽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고양된 삶의 충일은 죽음 자체마저 삶의 요소 가운데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인간이 죽음을 가장 많이 망각하고 사는 때는 우리가 앞에서 성년기라고 부른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인간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너무나 많은 요구와 의무에 직면하고 있는 까닭에, 또한 자신의 능력과 자립성을 너무나 깊이 확신하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의식은 가볍게 뒷전으로 밀려납니다.…반면 완숙한 단계에 이른 각성한 인간에게는 한계 경험을 통해 끝에 대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감정을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단호한 태도로 승화시키며, 이에 따라 삶은 더욱 견실하고 진지하며 귀중한 것이 됩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과정은 다름과 같이 그려볼 수 있겠습니다.
덧없음
무엇보다 덧없음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남아 있는 가능성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삶이 내게 더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한눈에 파악이 될 정도로 줄어듭니다. 이로 인해 삶에서 무한의 느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항상 – 더 – 계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동력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기대가 사라지는 것이죠. 인간은 늙는 만큼 덜 기대하게 됩니다. 또 그런 만큼 덧없음의 감정은 더 강력해집니다. 기대가 시간을 확장한다면, 답을 안다는 것은 시간을 수축시킵니다. 늘 무언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하루가 끝났다. 일주일이 끝났다. 한 계절이 끝났다. 한 해가 끝났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의식도 더욱 뚜렷해집니다. 지금 하는 일을 어제도 했었다. 오늘 겪는 일은 일주일 전에도 겪었던 일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을 움푹 쪼그라들게 만듭니다. 삶은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 갑니다.
덧없음을 강화하는 두 번째 계기는 시간이 아닌 사건들 자체의 변화로부터 옵니다. 사건들을 체험하는 방식의 변화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사건들은 얕아집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건이 드물어진다든가 가치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건이 체험을 충만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건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는 사건을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론 사건과 관련된 자신의 체험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감정의 차원에서까지 사건을 깊이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늙어가는 인간은 당장 일어난 일들을 점점 더 잘 잊어버립니다. 반면 과거의 일은 더 중요해집니다.
… 개개인이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지. 또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그가 끝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세상사가 덧없어지고 얕아지는 데서 어떤 교훈을 얻고 그것을 따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일에 실패하면, 나쁜 의미에서 늙은이가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해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이 되는 것이죠.
이는 가까이 다가오는 끝을 외면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치 끝이 아직 저 멀리 있다는 양 행동하며, 끝나가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마치 젊은이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죠. 이로부터 비참하고 안타까운 결과들이 생겨납니다. 우리 시대에 나타난 가장 수상쩍은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삶을 단순히 젊음과 동일시하는 경향입니다.
이와 달리 늙는다는 사실에 완전히 투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노인은 삶 전체를 방기해버리고 자기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노년의 물질주의라는 부정적 양상이 나타납니다. 직접 손에 거머쥘 수 있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되는 겁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은행 잔고, 편안한 안락의자 따위 말입니다. 고집불통의 늙은이가 됩니다. 자기가 옳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폭군처럼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굽니다. 위기를 긍정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늙어감을, 생이 끝나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의 끝에 투항하지도 않고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그것을 무가치한 것인 양 무시해버리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끝을 받아들임으로써 삶 전체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매우 고상한 태도와 가치들이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통찰, 용기, 평정심, 자존감이 그런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살아온 삶,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과 삶의 의미를 오롯이 지켜낼 수 있는 힘도, 그런 미덕에 속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마음, 역사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현상들에 대한 불만과 원한 감정, 현대적인 것의 결함과 실패를 보며 고소해하는 마음 등을 잘 다스리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인간
이러한 위기의 극복에 성공한다면 노인, 좀 더 가치 있게 표현한다면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삶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인간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겠습니다. 끝을 알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 이는 생이 끝나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 이런 경우는 드물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 생의 필연적 귀결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점점 더 확고해진다는 뜻입니다.
삶의 끝도 역시 삶입니다. 끝나가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결코 실현될 수 없었던 가치들이 실현됩니다. 끝을 잘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어딘지 평온해지고, 실존적 의미에서 우월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누군가가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Carlo Borromeo, 1538~1584년)에게 앞으로 한 시간밖에 살 수 없다고 한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특히 더 잘하겠노라고. 바로 이 말에 저 실존의 우월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른 인간은 불안해하지도 않고 남김없이 향유하려는 욕심도 부리지 않으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서두르지도 않고,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온통 채워 넣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파이드로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이는 태도가 바로 그러하지요.)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
덧없다는 느낌 속에서도 그 자체로 긍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덧없지 않은 것,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는 점입니다.… 영원에 대한 의식 중에 가장 무가치한 것은 이런 생각입니다. “나는 내 자식들을 통해 또는 내 민족을 통해 삶을 앞으로도 계속 더 이어갈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은 진정한 영원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덧없는 것에 봉사할 따름입니다. 영원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결코 “계속 더”를 영원으로 보지 않습니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든 문화적인 의미에서든 아니면 우주적인 의미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더”는 나쁜 영원성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된 덧없음일 따름입니다. 영원이란 양의 많고 적음과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길게 늘인다고 영원하지 않은 것이 영원해지지는 못합니다. 영원성은 질적인 “다름”이고 “자유”이며 “제약받지 않는 절대성”입니다. 영원성은 목숨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입니다. 영원성은 그저 계속 더 나아갈 뿐인 연장의 과정을 통해 인격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격을 충만하게 만듭니다.
덧없지 않은 것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덧없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만큼 성장합니다. 덧없음에서 도망치려 하거나 그것을 은폐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영원에 대한 각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삶이 얕아진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삶이 얕아짐에 따라 삶 자체를 넘어서는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유한한 것이 투명해지면서 그 배후에 놓인 절대적인 것이 드러납니다.
지혜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진정한 것과 진정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삶의 전체적 연관성과 그 안에서 개별적인 계기들이 지니는 의미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한 여러 분별력을 통칭하여 “지혜”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혜는 날카로운 지성이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리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덧없고 유한한 의식 속에 파고들어 와 삶에 빛을 비추어줄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바로 여기에 노년의 인간이 발휘하는 실천적 영향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실천적 영향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인 작용, 즉 지배하고 질서를 수립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와 진리와 선의 힘입니다. 성년의 인간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 실천적 힘이 그의 안에서 일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업적을 이루고, 투쟁하고, 실현합니다. 동시에 그가 이룬 것은 진정한 업적이어야 하고, 그의 투쟁은 올바른 것을 지향해야 하며, 그가 실현한 것은 선이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인간, 노년의 가치
늙어감에 따라 역동적인 힘은 약해집니다. 그렇지만 내면 속에서 위기를 극복해가는 만큼, 노년에 이른 지혜로운 인간은 의미를 환히 밝혀주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빛을 발합니다. 그는 움켜쥐고 지배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의미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의 사심 없는 태도로 인해 의미는 더욱 강한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 오늘날 인생에 대한 관념 속에서 노년의 가치 자체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지혜가 사라졌습니다. 삶에 대한 통찰력, 진정한 분별력과 판단력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노년이 무시되면 될수록, 참된 의미에서의 유년기 역시 낯선 것이 되어갑니다. 이제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의 축소형일 뿐입니다. 진짜 아이들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삶의 통일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동화를 들을 수 있습니다. 즉 신화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에게 동화라고 들려주는 것은 모두 합리성과 미학적 원리에 따라 가공된 것들 뿐입니다. 아이들은 놀 줄 알고, 다양한 형상을 창조할 줄 압니다. 아이들은 살아 있는 형상을, 삶의 제의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완벽하게 기술적으로 가공된 장난감들만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어른들의 생각에서 나온 장난감들이죠. 설령 아이들에게서 다행스럽게도 정말 아이다운 뭔가가 나온다고 해도, 그리하여 이를테면 사람들이 아이들의 그림에서 진정 깊은 의미를 발견한다고 해도, 즉시 그것에 대한 이론을 세운다, 전시회를 연다, 상을 준다, 하는 식의 소동이 벌어지고, 결국 모든 게 망가지고 맙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되돌려져야 할 부정적 현상이고, 항상 스무 살로 남아 있는 인간이 이상형으로 간주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스무 살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비겁한 존재인가요. 그런가 하면, 이제 아이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작은 어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내면에서 샘솟는 생명의 힘이 고갈된 존재일 따름입니다. 영원한 스무 살과 작은 어른은 모두 오늘날 삶의 빈곤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 김태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년, 제1판 8쇄, 92-109쪽)
얼마나 많은 글을 읽어야 이렇게 보석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는지요? “영원성은 목숨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