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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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류에 대하여

1.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선의의 사랑정욕의 사랑이다. 정욕의 사랑이란 우리가 무슨 이익이 있음을 바라고 기대하면서 하는 사랑이다. 그리고 선의의 사랑이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되 그것의 선을 위하여 하는 사랑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나,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2. 만일 어떤 이가 잘 되기를 우리가 절실히 원하고 있을 때, 그가 이미 그 선을 얻어 제 몫으로 삼을 만큼 잘 되었다면, 이때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기쁘고 만족하여 흐뭇한 사랑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곧 의지의 행동이며 이 행동으로써 의지는 남의 선과 아주 만족히, 아주 기꺼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잘되기를 우리가 바라는 그가 그 선을 얻지 못하였을 경우, 우리는 그가 그 선을 얻게 되기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사랑은 열망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3. 선의의 사랑에 있어서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응답이 없이도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경우,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단순한 선의의 사랑이라 한다. 그러나 상호 간의 응답이 오고 가는 사랑일 때 우리는 이것을 우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정은 세 가지 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간의 사랑을 알고, 서로 흉금을 터놓음과 친숙·친밀성을 교환해야 한다.

4. 만일 우리가 친구를 사랑하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 그저 보통으로 사랑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우정인 것이다. 만일 남달리 누구를 가려서 사랑한다면, 이때 이러한 우정을 친애라고 부를 것이니, 이것을 바로 친애의 사랑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의 사랑의 대상 중에서 유달리 뽑혀 특별한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5. 그리고 이러한 친애로써 사랑하기는 하되, 다른 이들보다 아주 훨씬 뛰어나게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이러한 사랑을 단순한 친애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친구를 퍽 남달리 사랑한다던, 이러한 조건 없는 우정을 출중한 친애라고 부른다.

6, 만일 우리가 벗들에게 품은 존경이나 평가와 선택이, 비록 대단히 위대하고 짝없이 크다 할지라도 다른 이들과 비교되거나 비례적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우정은 뛰어나고 아주 훌륭한 친애라고 불리겠으나, 말일 그 친애의 탁월성이, 비교와 비례를 초월하여, 뛰어나게 출중한 것이라면, 이러한 친애는 비할 데 없는 최상의 친애라고 불릴 만한 것이며, 한마디로 그것은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께만 돌릴 수 있는 애덕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의 생활언어 속에서도, “사랑하는”, “매우 사랑하는”, “지극히 사랑하는”이란 말들이 있고, 이것은 어떤 평가, 가치, 실천 고가를 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대중 사이에 서, “남자”라는 단어는 흔히 더 뛰어난 (여성에 비겨) 성性인 남성을 뜻하는 데 쓰이고 흠숭이라는 말마디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듯이 애덕에 대한 명칭은 최상, 최고의 친애이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만 쓰도록 보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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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은 사랑이라고 불러야 한다

오리제네스가 어디선가 말한 적이 있듯이(오리제네스가 쓴 아가서 주해의 입문에서), 특히 그의 견해로 성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영신적인 애정보다는 육체적 애정으로 표현되는 듯하여, 나약한 이들에게 오히려 악한 생각을 일으킬까 꺼려서 그보다 훨씬 적절하게 생각되는 애덕과

친애라는 말을 썼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이 사용하신 말씀을 매우 깊고 무게 있게 다루면서 똑똑히 입증하였으니(신국론 XIV, 7) 이 사랑이라는 말이 친애라는 말보다 거룩한 것이며, 더구나 전자와 후자는 때때로 거룩한 감정을 뜻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부패한 격정을 뜻하기도 하며, 이러한 의도에서 성서의 갖가지 다른 사건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성 디오니시우스St. Denis는 신적神的 말들을 제대로 이용하는 데 있어 뛰어난 학자로서, 사랑이란 말마디의 은혜로움을 더 유력히 변호하고 있다.(De divinis niminubus-신명神名들에 대하여, IV권 12장)

즉, 신학자들, 다시 말해서, 사도들과 그 첫째 제자들(이 성인은 다른 신학자들이란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은 일반 대중들이 세속적이며 육체적인 뜻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취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그 말을 친애라는 말보다 훨씬 자주 신적 사물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러한 용어를 학자들이 동일한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어떤 이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친애라는 말보다도 하느님께 훨씬 더 타당하고 알맞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 이냐시오St. Ignatius는 “나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혔도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고대의 신학자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느님께 관한 사랑에서 온 것은 세속적 상상에서 생기는 불순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인간적 감정을 표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친애라는 단어를 좋다고 사용하였었다. 왜냐하면 온갖 부당한 혐의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며, 또 그래서, 성 디오니시오가 어떤 이에게 한 말을 참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네게 대한 친애는 마치 여인들의 친애와도 같이 나의 영혼 속속 들이까지 들어와 있다.”(2사무 1,26의 주해에서 나온 말인데, 다윗이 요나탄에 대하여 한 말이며, 다른 번역문에서 뽑은 것이므로 불가타와 좀 상이한 곳이 없지 않다)

끝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보다 큰 정열, 보다 큰 효력, 보다 큰 능동성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친애가 지닌 것보다 더 그 뜻이 깊다 하여 라틴계 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이 친애를 사랑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 여겼다. 즉, “클로디우스Clodius는 나를 매우 친애한다. 말하자면, 나를 매우 사랑한다!”(부르투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Epistola ad Brutum I의 1에서 나온 말, 즉 “Clodius valde me diligitvel ut dicam, calde me amat.”)라고 저 위대한 웅변가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명칭은 퍽 훌륭한 것이어서 애덕에나 마땅히 주어지던 명칭이며,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랑 중에 근본적이고 특출난 것으로 여겨져 이러한 것에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이러한 이유들도 있고 또 애덕의 습성에 대해서보다도 행동에 대해서 더 말하기로 하였으므로 나는 이 시시한 작은 책을 “신애론(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논함, A Treatise of the Love of God)”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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