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울음(蛙鳴)

피부로도 호흡하는 양서류의 특성상 촉촉이 젖어 있어야 할 개구리의 피부가 농약 같은 화학물질에 노출되면서 개구리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는 생태론자들의 걱정, 생태만 얘기하다 죄다 굶어 죽는다며 인간의 생존권을 거론하는 개발론자들의 논란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 도롱뇽과 개구리, 이제 그런 논란조차도 한물갔나 보다. 시골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제법 큰 녀석인지 두꺼비일까 싶게 묵직한 저음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그 울음소리는 “개굴개굴”이 아니다. 지인에게 인터넷을 통해 들어보고 듣는 대로 써보라니 분명히 인간에게서는 날 수 없는 소리라며 “뜨르르”, “끄르레”, “꺼르르” 세 가지를 보내왔다. 그도 분명하지 않아서 ChatGPT 선생에게 물어보니 “크르륵, 꾸르륵, 꿀럭꿀럭, 웅웅, 웅얼웅얼”이라는 답을 준다. 과연 그런가? 인간은 의외로 자기 밖의 소리를 제대로 서술하는 데에 미숙하다.

예로부터 개구리 소리와 매미 소리는 누구에게나 시끄럽고 유쾌하지 않은 소음騷音일 뿐이어서 ‘와명선조蛙鳴蟬噪’라는 말이 생겨났고, 소란한 세상을 빗대어 그렇게 묘사도 하겠지만, 호숫가에 살았다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1817~1862) 역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그리 달갑지 않게 들었던 듯하다. 그는 큰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트르르르우운크(tr-r-r-oonk)”로 들었다.

「늦은 저녁, 멀리서 다리 위를 지나가는 수레의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밤에는 무엇보다 이 소리가 훨씬 멀리까지 들린다. 개 짖는 소리, 먼 곳 헛간에서 들려오는 쓸쓸한 암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한편 호숫가는 온통 황소개구리의 요란함으로 가득 찼다. 마치 스틱스Styx 강가의(*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는 저승의 다섯 강 중 하나로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건너가기 전 반드시 지나야 한다는 저승의 경계) 옛 주정뱅이 혼백들이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채로 술이나 퍼마시며 왁자지껄하게 잔치를 벌여 노래라도 불러대듯이 말이다.(월든의 요정들이 이 비유를 허락해 준다면) 그곳에는 갈대들이 없지만, 개구리들은 분명히 있다. 개구리들은 그들만의 흥겨운 만찬 규칙들을 여전히 지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쉰 듯 거칠다가 제법 묵직하다가 희희낙락거리기도 한다. 그들의 포도주는 맛을 잃어 그저 배만 부르게 하는 음료일 뿐이니, 과거의 기억을 삼켜줄 달콤한 취기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며, 그저 몸이나 적시면서 부르터져 부풀어 오르게 할 뿐이다.

가장 점잖은 척하는 녀석이 하트 모양의 잎사귀 위에 턱을 괴고 늘어진다. 그 잎사귀는 흘리는 침을 닦는 냅킨 용도로 쓰인다. 북쪽 호숫가에서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물을 흠뻑 들이켜고는 “트르르르우운크(tr-r-r-oonk)” 하는 외마디를 지르면서 잔을 옆으로 돌린다. 그러면 곧바로 암호라도 되는 양 물 건너 멀리서 같은 소리가 반복된다. 그다음 녀석이 자기 한계까지 들이킨 것이다. 이렇게 그다음 그다음 하면서 호수 기슭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맨 처음 시작했던 의례의 주재자는 만족한 듯 다시 한번 “트르르르우운크!” 한다. 그렇게 가장 적게 배가 나오고, 가장 연약하여 주체를 못 하는 가장 작은 녀석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실수하는 법은 없다. 해가 떠올라 물안개를 걷어낼 때까지 그렇게 잔은 돌고 돈다. 그러다가 오직 족장 격이 되는 녀석만이 물 위에 괜히 기어 나와서 가끔 “트르우웅크(troonk)!” 하면서 응답을 기다려보곤 한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소리 21)」

개구리 울음소리가 어떻든 ‘개구리’ 하면 늘 생각나는 개구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면서 울어댄다는 비 오는 날의 갸륵한(?) 청개구리이다. 그리움과 슬픔을 알아가는 것이 나이로 되는 것은 아니고,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 기구한 사연도 있게 마련이지만, 그 청개구리가 삼 사십 대의 젊은 청개구리는 분명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굳이 따라붙는 것은 설령 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겉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릴지언정 속으로는 아직 자기의 그릇됨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진정으로 깨우쳐 슬피 울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환갑이 넘고 칠순이나 넘어 자기 죽음이 서서히 다가올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울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이미지-영문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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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글) Late in the evening I heard the distant rumbling of wagons over bridges,—a sound heard farther than almost any other at night,—the baying of dogs, and sometimes again the lowing of some disconsolate cow in a distant barn-yard. In the mean while all the shore rang with the trump of bullfrogs, the sturdy spirits of ancient wine-bibbers and wassailers, still unrepentant, trying to sing a catch in their Stygian lake,—if the Walden nymphs will pardon the comparison, for though there are almost no weeds, there are frogs there,—who would fain keep up the hilarious rules of their old festal tables, though their voices have waxed hoarse and solemnly grave, mocking at mirth, and the wine has lost its flavor, and become only liquor to distend their paunches, and sweet intoxication never comes to drown the memory of the past, but mere saturation and waterloggedness and distention. The most aldermanic, with his chin upon a heart-leaf, which serves for a napkin to his drooling chaps, under this northern shore quaffs a deep draught of the once scorned water, and passes round the cup with the ejaculation tr-r-r-oonk, tr-r-r-oonk, tr-r-r-oonk! and straightway comes over the water from some distant cove the same password repeated, where the next in seniority and girth has gulped down to his mark; and when this observance has made the circuit of the shores, then ejaculates the master of ceremonies, with satisfaction, tr-r-r-oonk! and each in his turn repeats the same down to the least distended, leakiest, and flabbiest paunched, that there be no mistake; and then the bowl goes round again and again, until the sun disperses the morning mist, and only the patriarch is not under the pond, but vainly bellowing troonk from time to time, and pausing for a reply.(Henry David Thoreau, Walden-Sounds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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