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溫柔

우리말 신약성경에서 “온유”라는 말은 모두 14곳에서 보인다.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에서만 보이는데, 바로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는 두 곳이다. 그 외에는 모두 성령의 열매인 “온유”(갈라 5,23)를 비롯하여 서간문들(1코린 4,21 2코린 10,1 갈라 6,1 에페 4,2 콜로 3,12 1티모 6,11 2티모 2,25 티토 3,2 야고 3,13 1베드 3,4;3,16)에서 보이는 말이다.

성경의 “온유”는 무슨 뜻일까? 그저 우리말 사전의 설명대로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뜻할까? 그렇지 않다. 성경의 언어는 늘 그렇듯이 전혀 다른 차원을 지닌다. 신약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서는 “프라우스(πραΰς, praus)”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를 영어로는 meek, gentle, humble이라는 말들로 옮긴다. 그런데도 선뜻 와닿지 않는다.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뜻을 추적해가다 보면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플라톤과 동문수학하였다는 크세노폰Xenophon(BC 430~354년)이 남긴 문헌들에서 뜻밖인듯한 내용을 만난다.(참조. https://margmowczko.com/meek-warhorses-praus/) 그는 전장에 나가는 말이 철저히 기수의 통제하에 있도록 하는 것이나 양치기 개를 온순하게 길들이는 것, 야생 동물을 집짐승으로 길들이는 상황 등에서 이 말을 사용한다. 종합하면 “가장 온순하게 함(most gentle)”, “누그러뜨림(soothing)”, “진정시킴(to calm down / be calm)”, “점잖고 상냥함(gentle),” “길들임(to tame / tame)”, “더욱더 합리적이고 조용하여지도록 함(more reasonable / more quietly)” 등의 뜻이 된다.

바탕에 깔린 뜻은 한 마디로 “통제 아래에 있는 힘(strength under control)”이다. 이를 영성적으로 풀면,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고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인식과 대전제 아래서, 하느님의 힘으로 통제되고 기가 꺾여야만 인간은 “온유한 사람들”이 되고, 그제야 겸손해진 인간이 비로소 자신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1224/5~1274년)는 “겸손이 진리(humility is truth)”라고 말한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그렇지 않다.”라는 사실을 깊이 알고 이를 사는 것이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년)는 “네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라.(Remember that I AM and you are not.)”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인간이 교만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뜻으로 먼지에서 생겨난 존재임을 잊고 자기가 하느님인 줄 착각하고 우쭐대면 어느새 인간의 ‘에고ego’는 개구리 턱밑의 주머니처럼 부풀어 올라 ‘내가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이것을 원한다, 저것을 원한다’라고 말하고, ‘내가 나다.’하며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제 이름인 양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에고’라는 녀석은 등에 올라탄 커다란 원숭이가 되어 있고, 그러면 끊임없이 그에게 먹이를 주어가며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3 thoughts on “온유溫柔

  1. 하느님의 힘으로 통제되고 기가 꺾여야만 인간은 “온유한 사람들”이 되고, 그제야 겸손해진 인간이 비로소 자신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는
    …겸손이 진리임을 마음에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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