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은 전통적으로 ‘기쁨의 주일(Domenica gaudete, Laetare Sunday, 혹은 Rejoice Sunday, Sunday of rejoicing)’ 등으로 부른다. 이는 직접적으로 오늘 제2독서인 필리피서에서 취한 입당송이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입당송, 제1독서, 화답송, 그리고 제2독서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전례는 ‘기쁨’이라는 주제어로 관통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과 고통 중에 살면서도 기쁨 중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나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살면서 기뻐한다.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슬픔과 어려움을 함께 슬퍼하시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시고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시는 기쁨은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어지거나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생기는 열매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가까이 있을 때 얻어지는 열매들이다. 바야흐로 대림절의 절반을 넘기는 전례력의 시점에서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찾아오시기 위해 우리 가까이 와 계신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기쁨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신원을 확인시켜 준다.
1. “요한…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
지난주 복음(루카 3,1-6)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소명과 그의 사명에 관해 들려주었다. 여느 예언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살고 있던)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내린 말씀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셨다.”(요한 1,14)라는 사실을 자기 제자들에게 가리키고자 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 말씀이 내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말씀 자체이심을 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루카 3,3) 한다.
과연 세례자 요한이 설교를 통해서 선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온 역사를 통해 특별하고도 유일한 사건을 선포하고자 했다. 사람들 가운데에 사람으로 계신 하느님이시므로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진정으로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에 임하시도록 가르쳐 줄 선생(세례자 요한)과 형제들의 공동체(세례자 요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성모님과 요셉에게서 교육을 받으시면서 일정 기간 ‘숨겨진 시기’가 예수님에게 필요했듯이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자기의 사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그런 시기가 필요했다. 인생 자체가 평범한 매일 단순함의 연속이듯이 세례자 요한이 군중에게 설교를 통해 요구한 것은 평범한 일상의 단순함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맞이하기 위하여 특별한 제물이나 희생을 바치거나 성전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전례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단식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인간적이고 또 인간적인 내용만을 요구했다.
2.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군중이 그에게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3,10) 역사와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이 항상 갖는 질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군중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한다.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여 생필품과 음식, 의복, 주거(의식주)를 나누라 한다. 주님의 오심에 맞추어 회심하고 회개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표시를 그렇게 행하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대림절에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전례를 준비하고 9일 기도를 바치며 여러 장식과 신심업 등으로 준비하라고 하는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요구하는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은 정작 ‘의식주’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의 것을 나누기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예수님과의 진실한 만남으로 회개가 이루어지며 회개한 이는 자기가 가진 것을 흔쾌히 나눈다. 자캐오는 주님을 만나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놓는다. 그렇게 하여 자캐오의 집에 “구원이 내렸다.”(참조. 루카 19,1-10)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유다인들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2,44;4,32) 그래서 그들 중에는 아무도 가난한 이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주 우리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걱정한다. 그렇지만 복음은 우리 집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우리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하며 나눌 것을 당부한다. 나누면 우리가 깨끗해지고 곧은 마음이 된다.
군중에게 이렇게 말한 다음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2.14) 하며 똑같은 질문을 한다. “세리”와 “군사들”이다. “세리”는 로마 제국의 권력에 빌붙어 동족이나 이방인들을 자주 접해야 하는 이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세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 직업을 그만두라고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 하며 그저 정의롭게 살라 한다. 세금을 징수하면서 자칫 세금 낼 능력이 없는 이들을 다그치느라 사나워지기 쉽고, 또 웃돈을 얹어 자기 몫을 과하게 챙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세리들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한다.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는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업, 그리고 가정에서 과연 정직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예’ 할 것을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 하는 것이 진실한 믿음의 태도요 정의이다. 거룩한 믿음은 정직을 껴안는다.
어떤 힘도 없이 결국에는 자기들 손에 죽을 세례자 요한에게 “군사들”마저 매력을 느끼고 찾아와 같은 질문을 한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심지어) 은인이라 부르게 한다.”(루카 22,25) 하는 말씀대로 “군림”과 “권세”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군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 하고 이른다. 사회적 질서와 공존을 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한다.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위임된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면책권과 무기를 가진 자들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거짓을 쉽게 범할 우려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강탈”과 “갈취”를 하지 말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불완전한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바꾸는 것이다.(metanoia, that is, changing one’s imperfect way of thinking to the divine way of thinking and acting.) 자신의 안팎을 바꾸어 놓는 결단이다. 정의에 따르는 새로운 삶이다. 죄스러운 생활방식과의 결별이다. 요한은 질문에 대하여 ① “나누어 주어라(11절)” ② “더 요구하지 마라(13절)” ③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14절)” 하고 처방하면서 그것이 회개라 한다.
3.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성령과 불로 세례를”
세례자 요한은 일상생활 안에서 삶을 바꾸고 사람들 간에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하라는 회개를 설교하면서 이 회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큰)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루카 3,15) 이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18) 하는 말씀이나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다’라는 민간 신앙에 젖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연히 가질만한 의문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즉시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 하고 선포한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같은 세례이면서 연속성도 있지만, 다른 한편 차이도 있다. 두 세례 모두 죄로 말미암아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결정적인 세례를 위한 예시일 뿐이다. 요한의 세례는 단지 물에 잠기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불, 새로운 영, 하느님의 영에 잠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이 성령의 불 세례는 최종적으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 계약”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오순절에 받게 될 성령으로 완성된다.(참조. 사도 2,1-11) 그 “새 계약은…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1-33) 하신 그 계약, “나는 그들에게 다른 마음을 넣어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에제 11,19) 하신 계약,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하신 바로 그 계약이요 새로운 영에 의한 계약이다.
성령의 불 세례를 언급한 세례자 요한은 성경에 따라 성경에 순명하면서 자기 뒤에 오실 그분께서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하면서 의로운 이들과 불의한 이들을 가리시는 심판자이심을 강조한다. 오늘 복음은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루카 3,18)로 끝난다. 세례자 요한이 이미 예수님과 같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 대로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시는 엄하신 심판자로서의 메시아로 활약하시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실수한 것일까?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8-19 마태 11,2-3) 하고 여쭈었다는 기록에 따라 세례자 요한이 뭔가 다른 환상을 가졌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시면서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시간의 끝에 이르러서야 세례자 요한이 희망했던 의로움을 완성하실 것이다. 감옥에 갇혀 ‘모든 것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던 순간에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번 예수님과 자신의 소명에 믿음으로 온전히 순명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8 참조. 마태 11,11) 하실 것이다.
대림시기 한가운데에 있는 오늘 전례에서 이 주일을 ‘가우데떼Gaudete(기뻐하라는 뜻)’ 주일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입당송 첫마디 말을 따라서 그렇게 부른다. ‘기뻐하라’는 초대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5)라는 사도 바오로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기뻐해야 한다. 우리 생각에 더디 오시려니 싶어도 거짓이 없으신 주님이시고 곧 오실 것이니 기뻐해야 한다. 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아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기쁨이며 미래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촉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주변 환경과 여건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슬퍼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슬픔은 오로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이유와 동기를 찾는다. 주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것이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 슬퍼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의 문화 안에서는 기쁨이라는 것이 곧잘 나의 밖에 있는 것들로 어떤 조건이나 만족이 채워지는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의 기쁨은 하찮은 것들에 대한 질투와 시새움들을 동반한다. 또한, 영향력과 소유를 지향한다. 그리고 허전함과 공허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람들은 헛된 환상을 좇아 집착과 욕심으로 자신의 삶을 몰아가는 경향을 지녔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들은 바로 이런 것들을 세속적이라 불렀고 세속이 주는 온갖 재미는 사실 헛된 기쁨일 뿐이라며 이를 피하고자 고독한 광야로 발길을 돌렸다.(재미는 기쁨이 아니다) 참다운 기쁨은 끊임없는 기도로 진정한 나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데에 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