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텔리라는 성姓에서 따와 우리나라에서 ‘마신부’로 불렸던 아르키메데 마르텔리 신부는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첫 번째 선교사로서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여 이 땅에 자신의 뼈를 묻었던 한국 살레시오의 창설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만토바Mantova 지역 코메사지오라는 농촌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아버지 카를로 마르텔리와 어머니 이다 그라지올리 사이에서 4남 1녀 중 4번째로 출생했다.
총명하였던 아르키메데 마르텔리 소년은 베로나에 있던 돈 보스코 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0세에 부르심을 느껴 토리노의 살레시오회에 지원한 이래 평생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았다. 선교지망자로서 이브레아에 있는 칼리에로 추기경 선교사 양성소에서 지원기를 마쳤으며 15세가 되던 1932년, 1926년부터 이미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약하고 있던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1879~1965년, 가경자)가 있던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마신부는 일본에서 수련기를 마치고 1933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며, 일본의 미야자키 살레시오 신학 대학과 조후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는 한편 1938년 8월 24일 종신서원에 이어 1942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훗날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창립자가 된 안토니오 카볼리 신부가 일하고 있던 미야자키로 옮겨 그분과 또 그분을 도와 일하고 있던 수녀들과 함께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만주로 가라는 장상의 명에 따라 1944년 8월 6일 일본의 모지항을 떠나 부산항에 도착하여 부산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평양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만주를 통과하여 중국의 대련까지 가는 긴 여행을 했다. 만주의 사목을 준비하며 영어나 중국어를 익히면서 대련에서 3년여를 지냈다. 그러던 중 소련군이 대련까지 들이닥쳐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신부·수녀들을 추방하는 바람에 1948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사목을 이어가던 중 고아원과 유치원, 농업고등학교와 기술고등학교,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도쿄 코다이라 공동체의 원장으로 소임을 받았다.
일찍이 1908년부터 살레시오회의 한국 진출을 바라고 있던 한국교회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교사 파견이 여의치 않았던 대내외 여러 사정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던 살레시오회의 한국 진출은 1953년 한국 전쟁의 위험이 채 끝나기 전에 광주교구의 하롤드 헨리(1909~1976년) 당시 지목구장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살레시오회가 1954년 8월 12일 일본에서 사목하고 있던 마신부를 한국의 첫 선교사로 파견하면서 이루어졌다. 경향잡지와 같은 교회 매체를 통하여 마신부보다도 먼저 한국 땅에 도착하여 살레시오회원들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돈 보스코의 꿈이 마신부를 통하여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한국에 도착한 마신부는 하롤드 헨리 지목구장의 배려로 그가 이미 확보하고 있던 한국전 참전 중 전사한 군종 신부 에밀 조셉 카폰 신부(1916~1951년, 하느님의 종)의 기금을 바탕으로 기술학교의 건립을 즉시 추진하였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신부의 돈 보스코를 향한 신뢰, 그리고 그의 뛰어난 친화력과 조직력, 그리고 추진력을 보호하시는 섭리의 배려로 1956년 1월 19일에 전남 광주에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완성되었고, 같은 해 3월 19일인 성 요셉 대축일에는 살레시오 중학교가 개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중학교 승인은 당시 한국에 중등 기술학교를 위한 교과과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유산되었고, 3년 뒤 기술고등학교를 열겠다는 희망과 함께 인문계 중학교로 전환되었다. 본격적인 사목이 시작되면서 일본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이 보충되었고, 이에 따라 마신부는 1956년에 4명으로 구성된 광주 공동체의 첫 원장이 되었으며, 급기야 1956년 7월 11일에는 회원들의 숙소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스페인,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속속 살레시오 회원들이 도착하고, 다른 지역으로까지 사목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그렇게 마신부는 한국 살레시오회 못자리의 초석이 되어갔다.
1958년 3월 1일 고등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1959년 협력자들의 제안에 따라 성모 동굴의 봉헌식이 있었다. 1958년부터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던 이탈리아 선교사인 리날도 파키넬리 신부가 1961년 12월 1일자로 중고등학교의 교장 겸 원장으로 발령을 받음에 따라 마침내 마신부는 30여 년 만에 고국인 이탈리아 방문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가족들이 코메사지오 본당의 본당 신부를 통하여 어렵게 보내온 방문 요청의 안타까운 편지에도 선교지에 줄곧 머물 수밖에 없던 마신부는 30여 년이 지난 1961년 12월에야 고향 땅을 방문하면서 모든 가족을 이미 앞서 보내고 밀라노에 정착하여 살던 동생과 눈물겨운 상봉을 이루었다.
1962년 7월 한국에 다시 돌아온 마신부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아직 이루지 못한 기술 직업학교의 꿈과 서울 지역의 수련소를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으며 11월에 한국의 관구장 대리로 임명을 받았다. 1962년 2월 광주 학교 강당 아래에서 임시로 시작한 수련소는 마신부의 노력으로 대림동에 마련한 새로운 수련소 겸 공동체로 1963년 10월 10일에 이사를 마쳤고, 아울러 인근에 미래의 돈 보스코 센터가 될 직업학교의 부지까지 매입하여 새로운 꿈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광주 학교 공동체에서 일이 터졌다. 1965년 살레시오 공동체와 직원 및 학생들, 그리고 교구 간에 여러 오해와 불신이 누적되면서 터져 나온 소위 광주 학교의 분란으로 회원들이 모두 서울로 피신해야 했고 4개월의 휴교까지 감수해야 했던 어려운 시기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신부가 학교를 떠난 지 3년 만에 다시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제3대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다시 부임한 마신부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명실공히 명문고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전국 체전에서 오랜 기간 육상 부문의 우승을 이끌어갔던 전설적인 기록, 한국 고등학교 역사상 최초의 수영장을 보유한 학교 등 수많은 역사를 써 내려갔다. 가난한 아이들을 잊지 않았던 마신부는 진학하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돈 보스코 야간 중학교도 개설했다.
1981년 교장 정년에 따라 소임을 마친 마신부는 계속 광주 공동체에 거주하면서 교장 재직 시절부터 이미 주말 사도직으로 시작해오고 있었던 한센병 환자 마을에서 병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사목과 사회 활동에 투신하였다. 사실 이 사목활동은 1956년 한센병 환자들의 정착촌 중 하나였던 현애원을 처음으로 방문한 이래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일이었다.
골수암을 얻어 해를 넘겨 가며 2년여를 투병하였던 마신부는 1984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서울 여의도 병원에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헌신하였던 51년의 서원 생활과 42년간의 사제생활이라는 지상의 삶을 마치고 천상의 삶으로 옮겨갔다. 바로 다음 날 서울에서 광주로 모셔진 마신부의 장례는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학교장으로 8월 8일 치러졌다. 마신부를 기억하는 수많은 인파의 눈물 속에 마신부는 일단 광주대교구의 효천 묘역에 모셨다가 2007년 8월 8일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주교광주대교구담양묘원’ 내에 있는 살레시오 가족묘역에 다시 모셨다.
노래를 불러달라 조르면 항상 ‘검은 고양이 네로’라는 노래를 했으며 언제나 호탕한 웃음을 웃곤 했던 마신부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의 마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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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첫발을 디딘 마신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 보고서를 쓴다: 「어디서나 전쟁으로 황폐해진 모습과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에 질서란 찾아볼 수 없고, 거리에는 거지가 많은데, 특히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돈 보스코의 이름을 딴 큰 성당(서울 도림동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은 약 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또한 신자 중에 세례명이 돈 보스코인 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돈 보스코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돈 보스코라는 이름의 고아원도 있고 본당에는 ‘돈보스코회’라는 신자들의 단체도 있습니다.(섭리를 따라서, 돈 보스코 미디어, 2024년, 56쪽)」
「마 신부는 이렇게 여러 번 이야기했다. “나는 나의 부르심을 따라 산 것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같은 책, 153쪽)」
「마 신부는 살레시오 형제들과 함께 소풍을 가서 숲속으로 들어가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바다를 좋아해서 여름에 기회가 되면 멀리 헤엄쳐 나가 그를 둘러싼 하늘과 해변가의 언덕들을 바라보면서 파도에 몸을 맡기곤 했다. 겨울이 오면 휴일에는 가족정신을 북돋자며 공동체 형제들과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같은 책, 156쪽)」
「학교의 변기가 막혔을 때 그는 오랫동안 사용해 색이 바랜 작업용 외투를 입고서, 즉시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 방법을 찾아냈다. 자기 손을 더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학생들이 변기에 던져 넣은 물건을 꺼내기 위해 수세식 변기에 손을 집어넣곤 하였다. … “나는 마 신부님이 화내는 것을 전혀 본 적이 없습니다.” (같은 책, 157쪽)」
「마 신부는 한국에서 살레시오회를 일구고 초기 살레시오 회원들을 양성했다. 그는 살레시오중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고 1959년 고등학교 설립 이후 학교의 급속한 성장에 기여했다. 그 이후 1961년부터 1965년까지를 제외하고는 1981년까지 그는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에 공헌했다. 55명의 신부를 포함하여 약 13,000명의 졸업생이 그에게서 졸업장을 받았다.(같은 책, 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