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와 첼랴(루카 16,19-31)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루카 16,19-22)

라자로의 생전에 그에게 위로와 치유를 주었던 특별한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잡종이었다. 덩치는 그런대로 컸지만 잘 먹지 못해 마른 몸이었고, 별 윤기도 없는 털에 달라붙은 진흙이나 다른 것들 때문에 색깔마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갈색과 검정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개는 쌀쌀한 날씨가 될 때 거리낌 없이 라자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부잣집 문간 계단 밑 차가운 돌로 된 담벼락에 늘 기대고 앉아 있던 라자로에게, 개는 해가 뜰 때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는 보석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라자로는 개에게 히브리 말로 보석을 뜻하는 쳴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라자로는 한때 괜찮은 삶을 살았지만 첼랴는 먹을 것과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서 항상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무역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오고 가는 화물과 확보한 구매자들 덕분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장사꾼 라자로의 젊은 시절은 비교적 평안했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도 꾸려서 나름대로 일하는 재미마저 느끼는 그런 삶이었다. 그러나 대금을 이미 지불하고 도착해야 할 화물이 누군가의 농간으로 분실되면서 부도가 나고 결국 재산마저 잃고 행복했던 가정마저 파탄이 나고 말았다. 길거리에 나앉고 그동안 가깝게 지내던 관계마저 하나둘 끊어지는 것은 일장춘몽 꿈인 듯 순식간이었다. 불행은 몰아치는 속성을 지녔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성 피부병이 발생하면서 유다인들의 사회에서는 저주받은 인생이 되었고, 그 누구도 가까이 올 수 없고 갈 수도 없는,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되는 삶이 되고 말았다. 일하려야 일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구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난과 병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가 마지막에 정착한 곳은 어느 부잣집 대문 밖 담벼락이었다. 그는 부잣집에서 버려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를 바라며 살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또 다른 가난한 이의 선함이 섭리의 손길로 스며들게 마련이어서 부잣집의 동정심 많은 부엌데기 에스더가 첼랴를 비롯한 길거리의 개들이나 라자로를 위해서 가끔 몰래 먹을 것을 한쪽에 두고 갔다. 에스더가 보기에 대문 밖 라자로가 웅크리고 있던 담장 한쪽 귀퉁이가 첼랴와 라자로의 우정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인 것만 같았다. 에스더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먹을 만한 것들을 챙겨 그쪽 구석 근처에 가져다 놓고 돌 같은 것으로 눌러 놓곤 했다. 부자가 친구들과 잔치라도 벌이는 날이면 첼랴와 라자로, 그리고 다른 개들에게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라자로가 죽은 날은 매우 추운 겨울밤이었다. 함께 부둥켜안고 있던 첼랴는 움직이지 않는 라자로의 몸이 점점 식어가고 얼굴을 핥아도 눈을 뜨지 않는 것을 느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덜컥 겁이 난 첼랴는 꼼지락거리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주인 라자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며 낑낑 소리를 내고 울 뿐이었다. 그렇게 매서운 겨울 긴 밤이 흘렀다. 새벽 일찍 손을 불며 마당을 쓸던 에스더는 대문 밖을 내다보다가 개와 개 주인이 삶의 고통에서 풀려난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친한 하인 한 사람에게 그 둘을 집 담장 밖 뒤의 공터로 옮겨달라고 부탁했고, 소박했으나 정갈하게 가난한 주검들의 장례를 준비했다. 그리고 눈물과 기도로 둘을 하느님께 맡겼다.

에스더는 라자로가 죽음 후에 빛과 따듯함,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라자로 자신도 운명이 바뀌어 생전에 부자가 나누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그가 원했던 것을 모두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막상 현실로 그것들을 접했을 때 라자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행복한 상황을 맞이하였던 라자로였으나 그의 마음 한쪽은 그의 보석 첼랴에 대한 생각으로 무겁게 눌려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제가 살았던 동안 저를 따뜻하게 동반해 주었던 쳴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그가 그리우냐?” 하고 되물었다. “네!” 하고 라자로가 대답하면서, “첼랴는 정말 착하고 좋은 개였습니다. 저의 가장 어두운 인생 시절에 저를 동반하여 주었고, 저에게 사랑과 우정, 그리고 자기의 체온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도 그러한 나눔의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렇게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이를 보상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제가 지상에서 그를 만나 행복했던 것처럼 하늘 나라 이곳 어딘가에서도 그를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는 없을까요?”라고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라자로에게 삶과 죽음의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첼랴와 라자로가 하늘 나라에서도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축복해주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과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청원을 들어주셨을까? 첼랴와 라자로는 재회의 기쁨을 누렸을까? 인간의 반려가 되었던 개들은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일까?(*글의 모티브와 이미지-제릴린 펠톤Jerilyn E. Felton의 ‘Do all dogs go to heaven?’라는 글에서)

2 thoughts on “라자로와 첼랴(루카 16,19-31)

  1. 이 아침 라자로와 첼랴의 이야기는 저를 울컥하게 만들어 주네요.
    아무 댓가없이
    온전히 사랑을 주는 제 반려견 복돌에게도
    다시 살펴보며 따뜻하게 대하겠습니다.
    전 에스더의 선행도 감동이었습니다.

    우린 더불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 토요일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2. 미국에서는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는 홈리스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홈리스를 보며 왜 반려견과 함께 있는지 여러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편견을 넘어 그들의 어두운 인생 시절을 동반하며 사랑, 우정 그리고 체온을 나누어 주는 보석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베풀기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