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8,1-10(파스카 성야 ‘가’해)

안식일이 지나고…”(마태 28,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과 함께 시작한 이 거룩한 파스카 성야 복음의 시작입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로부터 부활대축일의 알렐루야로 넘어가는 성삼일의 과정에서 우리가 그냥 무심코 지나가면서 소홀히 하기 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올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성 토요일의 거대한 침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무덤으로 간 그 여인들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처럼 그때 그 여인들은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닥친, 예기치 않았던 비극, 고통의 드라마를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보았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그들도 과연 스승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인지 고통과 함께 두려움이 뒤섞였습니다. 또한 장차 모든 것을 다시 재건해야 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 단절된 희망, 그때 그들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가장 어두운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여인들은 망연자실하여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회한의 어두움에 사로잡히거나 암담한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고 현실로부터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료를 준비하는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어둠 안에 자비의 불꽃을 밝혔습니다. 장차 당신에게 봉헌될 그 안식일을 우리 성모님께서는 기도와 희망 속에 보내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슬픔에 응답하였습니다. 여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안식일의 어둠 안에서 역사를 바꿀 “주간 첫날이 밝아올”(마태 28,1)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땅에 묻힌 씨앗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고 계셨고, 여인들은 기도와 사랑으로 희망이 꽃피우도록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슬픈 날들 안에서 여인들이 희망의 씨앗들을 심었던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고, 또 아직도 그러고 있는지요! 보살핌의 작은 몸짓과 사랑과 기도로 말입니다.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천사가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은 (죽음이 있는) 무덤 앞에서조차도 생명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희망을 주시는 분, 마침내 천사의 말을 확인하여 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1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마라! 이것이 바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메시지가 오늘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밤에 우리에게 거듭거듭 반복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는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희망의 권리라는 기본권을 얻습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새롭고도 살아있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이 희망은 어설픈 미소로 용기를 내자고 말하면서 등을 토닥거리는 정도의 희망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요 몇 주간 우리는 우리 인류의 아름다움을 들먹이고 우리 마음을 북돋우자고 하면서 “모든 것이 나아지고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며 가장 큰 희망조차도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망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조차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니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실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십니다.

무덤은 한번 들어가면 그 누구도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빠져나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되살아나시고,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가져오시며, 돌로 막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옆으로 굴리신”(마태 28,2)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있는 바윗돌도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념하지 맙시다. 희망 앞에 바윗돌을 놓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니 우리는 희망할 수 있고, 희망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상황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의 빛이 무덤의 어둠을 몰아내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그 빛이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도 비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사랑하는 자매들, 마음속에서 희망을 묻어버렸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더욱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어둠과 죽음은 마지막 말이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과 함께라면 절대 지지 않습니다.

용기. 이것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 하면서 용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로부터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여행 중에 힘이 빠지고 약해져 넘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도움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잡으시고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하고 말씀하십니다. 만조니Manzoni의 소설에 나오는 돈 아본디오처럼 “용기란 네가 네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약혼자들I Promessi Sposi, 제25장)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에게 용기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용기를 선물로 받을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기도 중에 여러분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분 마음의 입구를 막고 있는 그 돌을 조금이라도 굴려내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께 “예수님, 저의 두려움 중에 오시어 저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여쭙는 것뿐입니다.

주님, 당신과 함께라면 저희가 시험에 빠질지라도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안에 드리운 슬픔이 어떤 것일지라도 저희는 희망으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밤의 어둠 속에서도 저희와 함께 계시기에 당신과 함께라면 십자가가 저희를 부활로 인도할 것입니다. 저희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당신은 확실성이시며, 저희의 말 없음 속에서도 당신은 말씀이시고, 저희를 기르시는 당신의 사랑을 그 무엇도 저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나이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메시지,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부활절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에서 듣고 보듯이 ‘나아가라’라는 두 번째 부분을 담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마태 28,7)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앞질러 가십니다. 삶과 죽음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앞질러 가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 곧 주님과 제자들이 일상생활과 가족이 있는 곳, 일터가 있는 곳, 매일 같이 지내던 곳으로 가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을 가져 오고자 원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에게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곳이기에 또한 기억의 장소였습니다. 갈릴래아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사랑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갈릴래아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만의 갈릴래아에서 우리가 거저 주어진 사랑의 부르심으로 초대를 받아 태어났음을 기억하고 거듭남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만의 갈릴래아는 특별히 위기와 시련의 순간에 재출발점이 됩니다.

다른 것이 좀 더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있던 곳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래아는 성도聖都의 거룩함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로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곳으로 보내시면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의 거룩한 곳들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안심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1요한 1,1)을 원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의 시대에 생명의 메신저가 되어 다른 이들이 진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용기를 주며 위로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인류 가족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갈릴래아에서라도 우리는 모두 형제이고 자매들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의 부분이며 서로에게 생명의 노래를 불러주어야만 합니다. 죽음의 아우성을 침묵하게 합시다. 더는 전쟁이 없도록 합시다! 총이 아니라 빵이 필요하니 무기의 생산과 거래를 그만둡시다.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끝냅시다. 넉넉히 가진 자들의 마음이 열려 최소의 필요도 채워지지 못하고 있는 빈손들을 채워 주시기를!

마지막에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께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 합니다. 주님의 그 발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도 멀리 여행하신 발, 무덤에까지 들어갔다가 나오신 그 발입니다. 여인들은 죽음을 짓밟아 뭉갠 그 발을 끌어안고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오늘 희망을 찾는 순례자로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주님이신 당신을 붙잡습니다. 저희는 죽음을 뒤로하고 저희의 마음을 당신께로 엽니다. 당신이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성 베드로 대성당, 2020년 4월 10일, 영문과 이탈리어 판을 참조하여 번역, 다소 첨가하여 윤색 *당시는 코로나-19의 초기였고, 많은 이가 죽어 나갔으며 온 세상이 셧다운 되던 시점이었다.*이미지 출처-영문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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