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련精練·창조적인 불안·의심

by 도나타 벤더스
정련精練

우리는 성품을 정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아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자아라는 딱딱한 돌을 녹여야 합니다. 자아를 녹이는 열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딱딱한 자아로 그냥 남고자 하는 태도는 자신에게 갇혀 빈곤한 삶을 살겠다는 결정입니다. 소명 따위 나 몰라라 하는 결정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에 무관심할수록 생활 수단에 탐욕스러워집니다. 확신이 없을수록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구가 커집니다. 인정받지 못할수록 갈채를 원하고, 소명을 알지 못할수록 권력욕이 자랍니다. 하느님이 선물로 준 재능을 알지 못할수록 눈에 보이는 능력을 더 탐합니다. 이런 탐욕 가운데 인간은 정련을 거부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고통에 무덤덤해집니다.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헛되이 껍데기를 구합니다.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세계를 달구고, 세계를 타락시킵니다. 삶에서 본질적인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양 오해하고, 자아에 도취해 살아가는 가운데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자꾸만 비중을 둡니다. 장자莊子는 “외적인 것에 비중을 두는 사람은 내적으로 무력해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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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불안

의심은 우리 마음을 흔들지만, 그 과정은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의심은 하느님의 사자입니다. 의심은 뚜렷한 답변이나 확신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에게 의심은 믿음의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의심은 전에는 견고함이었으나 이제는 완고함이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확신이었으나 지금은 소유가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명확함이었으나 지금은 고집이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진리였으나 지금은 교리가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은혜였으나 지금은 경험이 되어버린 것을 흔들며, 전에는 기도였으나 지금은 뜻 없는 주절거림이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재능이었으나 지금은 권력이 되어버린 것을 흔들고, 전에는 복이었으나 지금은 자랑이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열정이었으나 지금은 광신이 되어버린 것을 흔들고, 전에는 헌신이었으나 지금은 희생이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한마디로 의심은, 전에는 사랑이 있었으나 이제는 사랑이 없어져 버린 것들을 흔듭니다.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은 것들만 남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흔들림의 눈물을 통과한 것들입니다. 흔들림의 눈물은 소중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젊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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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 믿음은 우리에게 확신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불안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이는 ‘창조적인 불안’입니다. 도를 넘지 않도록 우리를 저지할 수 있는 불안입니다. 고루함과 편협함과 우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는 불안이 필요합니다.

Day 2 · 의심은 우리의 속사람이 겪는 성장통입니다.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Day 3 · 의심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고 있지 않니? 네 눈에 보기 좋은 것만 믿지 않니? 네가 느끼는 것만 인정하지 않니? 마음을 넓히고 일어나는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렴. 하느님 앞에서 침묵의 시간을 가져 보렴.” 자기 상태를 계속 타진해보고, 자기 의견을 계속해서 되뇌어보는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우리는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제 의심은 자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Day 4 · 의심은 자랑하는 마음이나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마음, 자기를 스승으로 여기는 마음으로부터는 튕겨 나옵니다. 그런 마음은 의심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주지 않거든요. 의심이 복이 되는 까닭은 우리에게 초심자의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심을 통해 다시금 배우는 자가 되어 출발한 장소로 돌아갑니다. 믿음이 복이 되는 장소로 돌아갑니다.

Day 5 · 믿음은 교리에 맞는 신앙 고백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내면의 교사처럼 우리 삶에 감탄과 놀라움을 줍니다. 형식적인 경건을 고집하며, 변화에 열려 있지 않은 공동체는 믿음의 본질과 거리가 멉니다.

Day 6 · 교리나 규범을 우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형식적인 것들에 얽매이면 교리나 계명이나 규범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휘청거리거나 넘어지지 않게 생각으로 아주 꽉 붙들어야 하는, 나약한 신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살아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죽어버린 교리나 규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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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의 대화

어느 고요한 아침, 나는 의심과 대화했습니다.

“의심, 이 친구야, 자네가 나를 일찌감치 잠에서 깨우는구먼. 자네와 나는 긴 시간을 함께했지. 사실 난 자네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 않을 때도 잦았다네. 하지만 자네에게 감사해. 자네가 없었다면 난 너무 빨리 만족해버렸을 테니까. 자네는 내게 캐묻고 연구하라고 다그쳤지. 내가 철저해지기를 바랐지. 그런 자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걸세. 요즘 내가 자네에게 시간을 많이 못 내고 있다는 건 나도 아네. 그렇지만 너무 언짢아하지 말게. 난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네. 해야 할 일이 내 앞에 있거든. 일단은 약해지지 않고 그 일을 하려 해. 그 뒤에 자네 말을 들으러 다시 오겠네. 지금은 무엇보다 소명의 삶을 살면서 소망이라는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네. 그러고 나면 분명 자네는 다시 내게 물어올 테지. 나는 대답을 할 테고 말이야. 그때 난 자네 물음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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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 에스파냐의 철학자 우나무노Unamuno, Miguel de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에 열정도 없고, 정신적 고통도 없고, 의심도 불안도 절망도 없이 자족하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믿을 뿐, 하느님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의심과 불안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Day 2 · 의심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일 수 있습니다.

Day 3 · 의심은 하느님의 사자로서, 우리의 상태를 묻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것을 실천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믿음이 단단해지는 것은 생각이나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의심은 생각이나 감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의심은 소명을 받아들이고 봉사하는 삶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Day 4 · 때로 우리는 신의 침묵에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신이 우리에게 응답했던 지난날을, 그 장소나 상황들을 그냥 흘려 넘겨버립니다. 돌이킴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얘야, 기억하니? 이곳에서 내가 너에게 말했고, 너는 내 음성을 들었잖니. 나는 늘 여기서 너를 기다렸단다.” 하느님은 지난번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의 문이 있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장소는 어디입니까?

Day 5 · 신앙이란 이해하는 길이 아니고 신뢰하는 길입니다. 고단한 삶 가운데 믿음을 잃지 않는 태도는 거룩한 고집입니다.

Day 6 ·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면 보상은 오늘 이미 주어져 어둠도 어둡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함으로써 고통을 ‘견딥니다’.

(*그림과 글 출처: 마틴 슐레스케, 가문비나무의 노래, 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13년 초판-2022년 개정 23쇄, 144-145.157-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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