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신비

가톨릭교회의 기본적인 4대 교리는 천주존재天主存在, 삼위일체三位一體, 강생구속降生救贖,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그중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이시면서도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분명한 내용이면서도 인간의 이성이나 말로 논증하거나 설명할 수 없어 신비이다. 신비는 몸으로 배워 알고, 고백하며, 찬미하는 믿음이다.

신앙 고백

그리스도인의 「첫 ‘신앙 고백’은 세례 때에 이루어진다. ‘신경’은 무엇보다도 세례 신앙의 고백이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지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89항)」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삼위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7항)」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61항)」

요한복음과 삼위일체

네 복음서 중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거론하는 복음서는 요한복음이다. 특별히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유언이요 이른바 ‘고별사(요한 13,31-17,26)’ – 이는 고별담화: 13,31-16,33 / 고별기도: 17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에서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과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에 관한 말씀이 집중적으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14장은 더더욱 그렇다. 다음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요한복음의 성경 구절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 하느님, 외아들, 사랑)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8)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10)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6-17)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묵시록의 마지막 장과 삼위일체

요한복음과 같은 저자이거나 적어도 같은 요한계의 저자가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묵시록, 구약과 신약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의 종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21장과 22장에서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여 주는 기록이 있다.

묵시록의 21장에서 묵시록의 저자는 묵시록의 첫 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면서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묵시 21,22)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전례 독서로서는 부활 제6주일 ‘다’ 해에 제2독서로 듣는 묵시 21,10-14.22-23 대목이다. 저자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 열두 천사, 열두 지파 이름, 열두 초석, 열두 사도 이름이 있는 곳에서 보지 못한 성전, 곧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곧) 도성의 성전”을 본다. 그 성전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는 성전, 하느님의 영광이 빛이 되는 곳, 어린양이 등불이 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성령은 기록은 없다. 그렇지만 묵시록의 마지막 장인 다음 장의 서두에서 저자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묵시 22,1-2)라고 기록한다. 묵시록의 저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 생명나무가 있어 열매를 내놓는 강, 곧 성령을 기록하면서 긴 묵시록의 여정을 마감한다. 그렇게 신약성경은 끝난다.

신앙의 요체인 삼위일체의 신비

이처럼 성경, 특별히 요한복음과 묵시록은 시종일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중심으로 복음과 묵시록을 기록한다. 분명하면서도 인간의 이해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일지라도 삼위일체의 신비는 궁극적으로 우리 신앙의 요체이다. 옛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살아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에 앞서 이 훌륭한 유산을 간직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는 살아 싸우고 있으며, 이 유산과 더불어 죽기를 원합니다. 이 선물은 나에게 모든 악을 견디고 모든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이 신앙을 맡깁니다. 이제 이 신앙으로 나는 여러분을 물속에 넣었다 들어 올릴 것입니다. 내가 맡기는 이 신앙은 여러분 생애의 동반자와 보호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한 하느님과 그 권능만을 드립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삼위가 한 분으로 존재하시며,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삼위를 포함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체나 본성의 차별도 없고, 올려 주는 우월함도, 낮추는 열등함도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 세 무한한 위격이 하나의 무한한 동질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각 위를 그 자체로 볼 때에도 온전한 하느님이시고 …… 삼위를 함께 생각할 때에도 하느님이십니다. …… 삼위의 광채가 나를 감싸지 않으면 그 단일성을 생각할 수조차 없고, 그 단일성이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나는 삼위를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5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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