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복

GPS

이미 우리는 스마트 세상을 한참 넘어 AI의 윤리 규범에 관한 법률적 근거들을 논의하는 사회를 산다. 내 생애에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가장 경이로운 문명의 산물이나 이기利器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GPS메모리 카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세 가지를 들겠다. 세상 언제 어디서라도 내가 어느 과정을 거쳐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속도로 진행하고 있는지를 꿰뚫고 있는 GPS의 섬뜩함, 손톱 크기보다 작은 공간에 내 생애에 내가 보거나 취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송두리째 담아 휴대하고 조회가 가능할 수 있는 메모리 카드의 신통함, 그리고 온 지구 안에 있는 그 누구와라도 같은 시간에 소통할 수 있으며 특별히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조회할 수 있는 인터넷의 편리함은 경이를 넘어 가히 기적이다.

물리物理를 다루는 과학이나 소위 인문人文 과학의 구별이나 세분화가 없이 학문이라면 마땅하게도 삶의 이치를 따지는 것이었던 시절에는 철학자가 곧 과학자였으며 학자였고 사상가였으며 예언자였고 시인詩人이었다. 인류의 별들이었던 그들은 과연 인류가 어떤 여정을 거쳐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충분히 알았으며 적어도 꿰뚫어 보았던 것일까?

사전에서 ‘지구 위치 파악 시스템(Global Position System)’의 약어로 말하는 ‘GPS’라는 말을 우리말로 옮긴다면 의외로 ‘나침반’일 것이다. GPS는 인공위성의 무선 전파를 사용하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이를 자동차와 같은 탈 것에 부착하면 항법장치를 일컫는 소위 내비게이션이 된다. 우리가 자동차에 장착된 이러한 장치를 내비, 또는 내비게이션이라 부르는 것을 서양 사람들은 GPS라고 더 많이 부른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이 어떻게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지, 나의 인생과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알아야만 했다. 이는 본질에서 자아정체성에 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인간

이러한 자아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피조물로서 조물주인 하느님 앞에 선 신앙인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고, 뒤집어서 나를 지으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싶어 할 때 ··하느님이라는 물음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우리는 어떤 방향에 귀 기울이며 살까? 인생의 길에서 주님과 함께 나아가고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우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는 다른 말로 ‘행복한 인간’이고 싶은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이 된다.

구(Google)박사님께 현대인의 행복 조건을 물었더니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 일과 여가 및 휴식의 조화를 이룬 사람, 사랑하는 관계를 지닌 사람, 건강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 행복 지수가 높다」라고 2013년의 답을 첫머리에 놓는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일까 싶어진다.

에우다이모니아

인간은 본질에서 행복의 개념을 추구하려고 시도해왔다. 아니, 시도해야만 했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은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 eudaimonia)’라는 개념으로 이를 정리한다. 이 말은 eu(good) + daimon(spirit 혹은 guiding force)라는 합성어로서 영어로 직역하면 ‘좋은 정신의 상태나 조건(the state or condition of good spirit)’, 소박하게 말해서 ‘잘 사는 것’이고 ‘좋은 삶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일시적인 쾌락이나 물질적 성공의 상태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육간 잠재력을 실현하고, 나아가 깊은 의미에서 행복감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잘 살며 좋은 삶을 유지하는 구성 요인들은 무엇일까? 쉬운 말로 바꾸어 인간의 행복 요건은 무엇일까?

인간의 행복 요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에우다이모니아를 쾌락의 관점보다는 본성과 이성에 따라 사는 삶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주로 ‘지혜, 용기, 정의, 절제(사추덕四樞德: wisdom, courage, justice, temperance)’라는 네 가지 덕목의 함양과 실천이었다. 외형적인 재화나 쾌락에는 본질적인 가치가 빠져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면서 에우다이모니아를 구성하는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는 상반되게 에피쿠로스Epicurus라는 이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은 에우다이모니아를 ‘쾌락(pleasure)’과 동일시하면서 가장 고상한 쾌락은 방종이라기보다는 어떤 형태의 고통이나 장애, 불편함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라고 말하면서 단순한 쾌락, 지적 추구, 우정의 개발 등을 옹호한다. 이런 것들이 고통이나 불필요한 욕망을 최소화하면서 쾌락을 장기적으로 극대화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밝힌 에우다이모니아 개념은 완전한 삶을 향한 미덕에 조화를 이루는 영혼의 활동을 말한다. 그가 부富, 건강, 친구와 같은 외형적인 선善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내용은 필요충분조건이라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행복이 이성과 인간 존재의 올바른 기능을 담고 있는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미덕의 함양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를 때 쾌락은 궁극적인 추구 대상이 아니라 미덕을 실행에 옮기면서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인간 행복의 상태에 대한 정의나 그 실현 방법론들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행복한 삶이 단순하고도 표피적인 쾌락을 넘어 더욱 깊고 지속 가능한 형태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진복眞福)이 단순한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는 희랍인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인간이 이성에 따라 살면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은 앞선 견해들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우다이모니아를 현세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행복이 사후에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현세에서 진정한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다는(foreshadowing)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펠리치타스(felicitas)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스러운 삶이 아직 완전한 행복은 아닐지라도 현세에서 일종의 ‘불완전한 행복(imperfect happiness)’ 같은 행복을 자아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라틴말로 ‘펠리치타스(felicitas, 행복)’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행복은 단순한 위로와는 거리가 멀다.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의 계획을 일치하면서 생기는 깊은 내적 평온, 성취감, 목적의식과 같은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완전한 행복일지라도 이러한 행복을 현세에서 더욱 증진하면서 키워나갈 수 있는 몇몇 요소들을 지적한다.

1. 덕스러운 삶의 기초 위에 고상하고도 덕스러운 삶이 생겨난다. 하나 마나 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정의, 신중함, 절제, 용기라는 기본 덕목은 도덕적 기준이요 나침반 역할을 하면서 개인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소위 ‘잘 사는 삶’의 초석이 된다.

2. 진리를 식별하고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은 인간 조건의 결정적 특징이다. 우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도록 바른 선택을 해 가는 과정이다.

3. 하느님과의 관계 개선 도모, 기도, 묵상, 하느님의 사랑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삶이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행복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연결이 이 땅의 만족이 주는 변덕스러움을 초월하는 평온함을 누리게 한다.

참행복 맛보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이 꼭 내세만을 추구하고 기다리는 행복론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복론은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현세의 순간순간들에서도 참행복을 맛보며 사는 삶이다. 이러한 참행복은 자기의 가진 바를 이웃에 베풀며 사는 삶,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삶, 그리고 우리를 에워싼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통해서 얻어진다.

덕스러운 삶을 추구하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증진하도록 노력하면서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불완전한 행복’의 행복을 가꾸어 나간다. 이러한 행복이 현재에 발을 딛고 궁극적인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을 이끌어간다. 궁극적인 완전한 행복이 우리가 이 땅에서 생각하고 상상하는 행복, 이 땅에서 체험하는 행복의 범위를 훨씬 능가할 수도 있겠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 계속되는 기쁨이라는 토대 위에서 우리가 분명한 방향성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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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교리서>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27항)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루카 4,18 *루카 7,22 참조) 파견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마태 11,25 참조)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배고픔과(마르 2,23-26 마태 21,18 참조) 목마름과(요한 4,6-7;19,28 참조) 궁핍을(루카 9,58 참조)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신다.(마태 25,31-46 참조)」(544항)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하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고, 그러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몸소 온 삶으로 보여 주시고 동참하신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그 모범을 따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나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작은 이들(가난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을 잣대로 삼아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가르신다.(참조. 마태 25,31-46)

*기본 바탕이 된 글의 출처: 도미니코회 소속 Lawrence Lew OP 신부의 <참행복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True happiness is not what you think it is)>라는 글, https://aleteia.org/2024/05/29/true-happiness-is-not-what-you-think-i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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