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향해, 어찌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을 향해, 혹독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의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있으므로 그저 비판과 비방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지혜로운 해석이 필요한 대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율법 학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스라엘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 전념한 전문가들로서 어느 정도 성숙한 나이가 되면 권위 있는 라삐요 스승으로서 다양한 유다 기관에서 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아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과 라삐들이 발전시킨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살기 위한 일종의 ‘교회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평범한 보통 유다인에 속한 사람들이면서도 이스라엘 내부에 유다이즘을 전파하는 자들로서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었다. 율법 학자들이나 일부 바리사이인들은 분명 예수님의 적대자들임이 틀림없다. 바리사이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단이 분명한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당연히 극심한 박해를 가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에 반항하며 예수님의 말씀(복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양자 간의 중요 논쟁은 무엇보다도 ‘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관한 논쟁이랄 수 있겠다.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서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내부에 은연중에 자리 잡거나 바탕이 되어있는 비그리스도교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비판하고자 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유다이즘에 반대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복음을 읽을 때 그저 반유다이즘적인 시각에서만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모든 율법 학자들이 교만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바리사이들이 위선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율법 학자를 증언하는가 하면(참조. 마르 12,34), 예수님을 아끼고 존경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보려고 하였던 올바르고 의로운 바리사이에 관한 내용을 증언하기도 하며(참조. 루카 13,31), 예수님을 자기 집 식사 자리에 초대하였다는 증언을 하기도 한다.(참조. 루카 11,37)
다시 복음으로 돌아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0,38-40) 하신다. 강한 말씀이다. 그러나 그저 마음으로 주의를 다해,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며 읽어야 하는 말씀이다. 율법 학자들의 “긴 겉옷, 인사받기, 높은 자리, 윗자리, 긴 기도”들이 모두 외형적인 가식이라면, 내면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것”이다. 백성들을 착취하는 지식인들을 조심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빙자하여 남을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지식인과 종교인들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서 지식과 심지어 종교를 이용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속이고 빼앗는다. 그들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마태 23,23)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행동이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보다 더 위험하다. 성서 지식을 전하는 거룩한 행위와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종교가 지배와 착취 도구로 사용되면 안 된다.
어쩌면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랄 수 있다. 약간 바꾸어 『성경 전문가나 신학자, 혹은 그 밖에도 다른 전문가로 행세하는 이들을 조심하여라. 밖에 나갈 때는 점잖게 차려입고 검소한 복장인 듯하면서도 고급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금테를 두른 비싼 안경을 걸치고서 은근히 빛나는 십자가로 치장하며, 눈을 내리깔아 덕망이 높고 경건한 자로 행세하려 하지만 대접받고 존경받고 싶어 하는 속내를 감추고, 사람들의 필요와 고통을 바라보지는 않으면서 오히려 그들이 우러러보기를 바라는 사람들! 하느님을 찬미하는 거룩한 전례에서는 파라오에 버금가는 고상하고 화려한 의자를 따로 놓아 앉으려 하고, 언제나 세속의 권력을 지닌 자들의 식사 자리에 초대받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읽으면, 그저 예수님의 독설이라 하기에 너무나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이다. 진심으로 우리의 얼굴을 붉히게 하고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자문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식의 교만한 자세를 갖게 되면 필연적으로 존경을 요구하는 스타일, 전문가를 우대하는 스타일, 신자들의 박수를 받는 스타일에 빠진다.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려면 자연히 돈이 많이 들게 되므로 결국, 과부의 집을 삼키고,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한 닢까지라도 요구하고 빼앗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어떤 의미에서 아직 이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내심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못됐다고 낙인을 찍으신 그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뭔가 다른 사람으로 우리를 인정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아닌 기대 속에 취해 그렇게 시간이 간다. 이쯤 해서 우리는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이요 관리자들이며 심지어 하느님의 대리자라고까지 할 수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이러한 악덕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람들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애타게 경종을 울리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고 있던 곳은 성전이었다.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마르 12,41) 많은 신자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 봉헌하고 있었다. 항상 그러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관찰하시고, 보시며, 이해하시고, 식별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삶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신다. 복음은 우선 예수님께서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는” 것을 보셨다고 한다. 부자들은 가진 것이 많아서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나 어려움 없이 헌금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불과 얼만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교회에는 큰 금액을 봉헌한 이들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붙인 그들만의 앞자리를 보존했으며, 가난한 이들은 자리에 앉는 것마저도 유료였으므로 그저 교회의 맨 뒷자리나 여유 공간에 서 있어야만 했던 슬픈 역사가 있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 헌금과 봉헌의 정성에 대하여 생각하기보다 다른 이가 얼마나 헌금하는가를 가늠하기를 더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동시에 우리는 나의 내어놓음과 봉헌이 얼마만큼 얼굴 내세움의 효과를 낼 것인가를 가늠하는 습성이 있고, 또한 하느님이 허락하신 만큼 나도 이만큼을 하겠다는 식으로 감히 하느님의 잣대에 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습성이 있다.
3. “저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께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풍토가 강한 당시 상황에서 사람들 가운데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 남자가 아닌 여자, 그것도 과부에 주목하신다. 성전에서조차 성전은 당연히 남성의 공간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기까지 했던 여성을 보신다. 많은 이들 사이에 섞여 조심스럽게, 그리고 겸손하게 헌금함 쪽으로 이동했던 이 여인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수님의 시선은 과부의 행동을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인의 행동 안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가르치길 원하셨던 전적인 자기 증여가 빛나는 것을 보신다. 하느님께서는 양이 아니라 질로 측량하신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순수한 의도를 바라보신다.
헌금함에 돈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겨우 “콰드란스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 두 닢을 넣은” 그런 그녀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엄숙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하신다. 진심으로 봉헌한 사람이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봉헌한 사람이라 하신다. 렙톤은 그리스 돈 가운데 최소단위 동전으로 그리스 은전인 드라그마(로마 은전은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일당에 해당)의 128분의 1에 해당한다. 당시 유통되던 가장 작은 쇠돈이었다. 마르코는 그리스 돈을 로마 돈으로 환산하여 두 닢의 렙톤은 로마 동전 1개의 콰드란스와 같은 액수라 한다.
가난했던 과부의 봉헌은 조금이었으나 모든 것이었던 봉헌, 많이 가졌으면서도 조금 내놓는 영악함이나 처세보다는 조금 가졌으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지혜를 담은 봉헌, 사람이 보려는 것보다는 하느님이 보려 하시는 것에 기준을 두었던 봉헌이었다. 양이 아닌 질을 보시는 잣대를 가지신 분, 희생과 제사가 아니라 올곧은 마음과 사랑을 원하시는 분,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시지 않고 사람 자체를 보시고 마음을 느끼시는 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여겨보시는 분, 바로 그런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과부의 봉헌을 보시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43절)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돈의 액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과부가 맺은 하느님과의 속깊은 관계를 보고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생활비를 모두”라고 번역하는 ‘ὅλον τὸν βίον αὐτῆς, hólon tòn bíon autês(영어로 whole livelihood)’는 직역할 때 ‘자기 생활(생명) 모두를’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그녀는 이렇게 ‘쉐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참조. 신명 6,5)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라고 힘을 다하여”(마르 12,50) 하느님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기의 마음을 전하러 성전에 갔던 과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예수님에게서 직접 어떤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으며,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줄도 몰랐고, 더구나 예수님을 믿는 이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딸로서 그저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했던 이었다. 과부는 자기가 하는 일을 누가 알아달라고 지붕 위에서 “나팔을 부는”(참조. 마태 6,2) 이도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예언자들의 말을 믿고 하느님만을 믿고 사는 가난하고 가련한 이(참조. 스바 2,3;3,12-13)로서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 언급되는 율법 학자와 같은 사람, 곧 의인인 척 행세하고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마태 23,23)하고 살면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마르 12,40) 사는 종교인들과는 확실하게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과부는 종교적 관습이나 규칙도 잘 모르고 반反 신앙적으로 사는 것 같으면서도 그저 자기 양심에 따라서 세상을 착하게 살아가려고 애쓸 뿐인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선행의 모범으로, 완전한 봉헌을 이룬 사람으로 가리키신다. 사실, 이 과부는 다른 이들처럼 자기 소유의 부스러기를 봉헌하지 않는다. 과부는 봉헌을 두고 돈이 없어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는 양을 계산한 것도 아니고, 여분의 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한 푼이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에서 전체를 내놓는다. 이 과부는 예수님께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랑의 표상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지만, 이 과부는 어떤 의미에서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위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것을 논하고자 할 때는 이 가난한 과부가 진정 참다운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난한 이들의 교회’의 창립자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보다 더욱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내어놓을 수 있고, 무엇을 내어놓으려고 하는지 깊게 고민해봐야만 한다. 너무나도 쉽게 남은 음식을 버리고 마는 우리로서 정말 우리는 우리가 내어놓기 아까운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지 물어야만 한다. 우리가 ‘가난한 교회’라든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진정 그 교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 건너편의 사람들인지도 물어야만 한다.
과부의 봉헌처럼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런 봉헌이었다. 모든 것의 모든 것, 모든 이의 모든 것이었던 봉헌이었다. 나와 같은 사제는 “모두 다 넣을 생활비”를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서, 나의 온 생활비 대신 나의 온 삶을 봉헌하기로 약속하고 그를 봉헌하는 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지만, 갖은 핑계와 이유를 들이대며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고 ‘온전히’ “모두 다” 봉헌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동전은 보잘것없었으나 봉헌은 완전했던 과부의 봉헌이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서원은 보잘것없으나 하느님의 축성은 완전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난했던 과부가 봉헌하였던 동전 두 닢은 그 누구에게서도 착취하지 않았던 깨끗하고 선량한 봉헌이었다. 그녀는 다른 가난한 이들을 자기 자신처럼 여길 줄 아는 가난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기의 가난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내놓을 줄 아는 사람, 작은 동전 두 닢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좋은 몫으로 사용하시리라는 것을 믿는 신앙인, 땅에서 거두어진 것은 땅 위에서 나누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 지상의 부보다는 천상의 부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슬기로움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아멘!
세상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기…
혁명가 예수님!
통렬한 시대 비판이
아직도 유효한 현재.
지금 난
어디쯤 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