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제들이 여러 은인이나 연고지를 찾아 첫 미사 순례를 하듯이 돈 보스코 역시 서품 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에 관해 돈 보스코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1841년 6월 5일 삼위일체 대축일 전날 나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첫 미사는 카파소 신부가 수석 사제로 있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당에서 드렸다. 사제의 첫 미사를 드려본 지가 오래된 내 고향에서는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토리노에서 조용히 첫 미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을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여기고 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기억하는 순간에 내 모든 스승들과 영적 물적 은인들을 기억했다. 특히 언제나 큰 은인으로 추모하고 있는 칼로소 신부님을 기억했다.
월요일에 콘솔라타 성당으로 두 번째 미사를 드리러 갔다. 나는 동정녀 마리아께 당신 아드님에게서 얻어 주신 무수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렸다. 화요일에는 성 도미니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나의 옛 스승인 주스티아노 신부님이 살고 있었다. 신부님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미사 동안 내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그분과 함께 지냈다. 천국과도 같은 날이었다. 목요일(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이었다)에는 내 고향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미사를 드렸다. 성체 거동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성체를 모시고 카스텔누오보 길을 행렬했다. 본당 주임은 내 친척들과 사제들과 마을 유지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모두가 내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애정을 쏟아 주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아홉 살 때 꿈꾼 장소를 바라보노라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느님의 계획은 얼마나 놀라우신가!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를 땅에서 들어 올려 당신께서 총애하시는 사람들 틈에 넣어 주신 것이다!’(돈 보스코의 회상, 173-175쪽)」
위의 기록에 따를 때, 돈 보스코는 첫 번째 미사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Chiesa di S. Francesco d’Assisi의 수호천사 제대, 월요일의 두 번째 미사를 콘솔라타 위로의 성모Santuario della Consolata 성당, 화요일의 세 번째 미사를 옛 스승인 주스티아노 신부님이 계시는 키에리의 도미니코 성당Chiesa di S. Domenico에서 드렸다. 이어서 돈 보스코는 수요일의 네 번째 미사를 거론하지 않고 목요일 미사를 비로소 고향에서 지낼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세 번째 미사를 도미니코 성당에서 드렸다는 것이나 “아버지처럼 기다리신 주스티아노 신부님”과 종일 같이 지낸 그 날을 “천국과도 같은 날”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좀 낯설다. 도대체 주스티아노 신부님은 누구일까? 돈 보스코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네 번째 미사는 드리지 않았다는 말일까?
주스티아노(주시아나Giacinto Giusiana o.p.) 신부님은 1832~1833년에 키에리 신학교에서 신학생 요한 보스코에게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던 교수 신부님이셨다. 이 신부님은 신학생 요한 보스코를 ‘끔찍이 아끼셨고 특별한 사랑으로 대해주셨던(grande affetto e da cui era riamato con singolare tenerezza)’ 분이었다. MB(Memorie Biografiche) 제1권, 31장은 흥미롭게도 주시아나 신부님께서 적어도 유급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신학생 요한 보스코를 구제하시어 무사히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학생들이 두려움에 떨 만큼 아주 엄격하기로 소문난 쥬셉페 고짜니D. Giuseppe Gozzani라는 분이 진급 사정 위원회의 감독 겸 출제 위원으로 왔었는데, 45명 전원이 4학년에 진급을 할 수는 있었지만 요한 보스코만큼은 주스티아노 신부님의 보호 덕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연인즉슨 요한 보스코가 다른 학생들에게 자기 답안지를 베낄 수 있도록 보여주었으며(이것은 당시 규율로 거의 퇴교 조치를 당할 정도로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었는데, 주스티아노 신부님이 나서서 요한 보스코에게 새로운 답안지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무마하셨고, 요한 보스코가 이를 만점으로 통과하면서 진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 위에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한 문헌적 근거: 「In sul finire dell’anno scolastico le scuole di Chieri ebbero una visita del Magistrato della Riforma nella persona dell’avvocato professore D. Giuseppe Gozzani, uomo di molto merito. Veniva a presiedere la Commissione esaminatrice e a verificare lo stato degli studi. Il suo nome era il terrore degli studenti, poichè era giusto, ma di una giustizia legale, inesorabile. Sparsasi la nuova del suo arrivo, la scolaresca si mise in gran fermento, si faceva un gran dire, si udivano parole sommesse di minaccia. D. Gozzani, uomo calcolatore e di sangue freddo, prevenuto delle poche buone accoglienze che gli avrebbero fatto gli alunni, appena giunto a Chieri, li radunò e fece loro un discorso, promettendo che non solo non avrebbe usato rigore, ma neppur severità. Così calmati al quanto gli animi, dettò il tema per gli esami in iscritto, e ritirate le pagine, partì all’improvviso per Torino. Di là mandò i voti, che furono tutt’altro che benigni. Tuttavia i condiscepoli di Giovanni, in numero di quarantacinque, furono tutti promossi alla classe superiore di umanità, che corrisponde alla nostra quarta ginnasiale. Egli però corse gran pericolo di essere ritenuto, per aver dato copia del lavoro ad altri; se venne promosso, lo dovette alla protezione del venerando suo professore P. Domenico Giusiana, che gli ottenne un nuovo tema, il quale, riuscitogli bene, gli procurò la promozione a pieni voti.
Egli aveva incontrate le simpatie di D. Gozzani, che gli usò molta benevolenza nel concedergli il secondo esperimento. E di ciò Giovanni conservò gratitudine e buona memoria, a segno che si tenne di poi sempre in istretta ed amichevole relazione con questo sacerdote, il quale, andato a vivere in Multedo Superiore, presso Oneglia sua patria, fra le molte opere di carità fondò un posto gratuito nel Collegio Salesiano di Alassio per un giovanetto che desiderasse studiare per lo stato ecclesiastico. Era allora lodevole consuetudine che in ogni corso, almeno uno studente, a titolo di premio, venisse dal Municipio dispensato dal minervale di lire 12. Per ottenere questo favore era necessario riportare pieni voti negli esami e nella condotta.」 (MB 제1권 31장)
——————–
요한 보스코가 사제가 되었을 때, 키에리의 산 도미니코 성당에 계셨던 주스티아노 신부님께서 돈 보스코를 초대하셨고, 이에 따라 돈 보스코는 세 번째 미사를 그곳 성당의 로사리오의 성모 경당la cappella della Madonna del Rosario 제단, 통상적으로 감실을 모셔 놓는 곳에서 드린 것으로 확인된다. 돈 보스코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건너뛴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1841년 6월 9일 수요일의 네 번째 미사는 어린 요한 보스코가 소년 시절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인사드리러 갔던 키에리의 복되신 은총의 성모님Madonna delle Grazie 제단에서 드렸다.(Aldo Giraudo e Giuseppe Biancardi, Qui è vissuto Don Bosco, Elledici, 2004년, 124쪽)
돈 보스코가 회고록에서 언급하는 1941년 6월 10일 성체 성혈 대축일이었던 목요일의 다섯 번째 미사는 당연히 그의 출신 본당인 카스텔누오보의 성 안드레아 사도Ciesa di St. Andrea Apostolo 본당에서였다. 1815년 8월 17일 태어난지 3일 만에 세례를 받은 곳, 1826년 11살 부활절에 첫영성체를 하였던 곳, 1835년 10월 25일 사제가 되기로 하면서 당시 안토니오 친자노Antonio Cinzano 본당 신부님께서 착복식을 하여 주셨던 곳, 이미 신학생 시절 본당 신부님의 동의 아래 강의나 강론도 하였던 곳, 바로 그곳에서 마침내 사제가 되어 첫 미사를 드린 돈 보스코는 마침 보좌가 없었으므로 11월에 쥬셉페 카파소 신부의 요청으로 토리노의 사제 양성 학교에 이주하기까지 5개월 동안 보좌로 일한다.(참조. 돈보스코의 회상, 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