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로 본 커피의 유래

세상천지에 우리나라처럼 커피숍이 많은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커피 공화국’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관세청의 수출입 무역 통계에 따를 때 2023년도 우리나라의 커피(생두와 원두) 수입량은 19만 3천 톤이며 이는 돈으로 따져 11억 1천만 달러(대략 1조 5천억 원)에 이른다. 산지별로는 브라질, 베트남, 콜럼비아,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순이다. 미국에서 살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온 우리나라에 전에 보지 못한 유별난 현상 중 하나는 커피숍들이 그간 소위 ‘베이커리 커피숍’이나 ‘디저트 카페’로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알았던 다방이 커피숍이 되더니 이제 그 앞에 디저트나 베이커리, 혹은 명장 베이커리를 붙이게 된 것이다. 많은 베이커리 커피숍은 베이커리 앞에 ‘명장’을 붙이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아예 서양 말로 자기 숍만의 고유 명칭을 창안하기도 한다. 과연 다이내믹 코리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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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역사는 에스프레소 한잔만큼이나 농축된 긴 얘기를 담고 있으며 한때는 종교적 논쟁의 한 축이 되기도 했었다. 사실 커피는 그 자체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종교적’으로 제공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 ‘환대’와 ‘평안’을 위한 음료이기 때문이다. 커피는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귀족이나 평민이나 하나같이 즐기는 음료였다. 그렇지만 많은 역사가나 인류학자들, 음식 전문가들은 일상의 모임에서 가벼운 접대용 간식거리로 등장하는 ‘커피와 도넛’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적 배경 안에서 커피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커피와 수피Sufi 이슬람교도, 대천사 가브리엘

전문가들은 가장 널리 재배되는 아라비카 커피가 처음에는 에티오피아에서 등장했으며 사회적 공동 의례에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토픽Steven Topik이라는 이는 논문에서 그때만 하더라도 커피가 의도적이거나 적극적 재배 단계가 아니었으며 그저 자연이 주는 선물로서 단순하게 열매를 따서 즐기는 정도였다고 말한다. 이야기로 전해져오는 바에 따르면 최초의 커피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원주민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 추출하여 주민들의 모임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했거나 떠돌이 에티오피아 목동(목자)들에 의해 추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예멘의 수피 이슬람교도들이었다고도 한다. 그들은 신을 기리고 염원하면서(디크르dhikr) 밤새도록 신의 이름을 율동적으로 바꿔 불러가며 깨어있기 위해서 커피를 마셨다고 알려진다. 16세기의 역사가 압드 알 카디르 알 자지리Abd Al-Qadir Al-Jaziri는 “수피들은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붉은색 큰 토기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지도자가 큰 그릇에서 작은 국자로 떠서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마시라고 건네주었으며, 이때 그들은 평소의 기도문 중 하나를 외웠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 시대의 문서들에는 커피의 기원과 관련된 대천사 가브리엘의 많은 전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데, 그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언젠가 예멘의 한 마을에 전염병이 몰아쳤을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치료제로서 커피를 추천했다는 것으로서 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맥주가 있었다고 한다면 예멘의 회교도들에게는 커피가 있었던 셈이다. 끓이는 추출과정을 통해서 커피가 물보다 훨씬 안전한 건강 음료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앞서 언급한 알 자지리가 오늘날 보편 음료가 된 커피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떤 역사가는 “커피가 제공되는 곳에는 우아함과 화려함, 우정과 행복이 있다.”라는 문장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이슬람교도들 간에는 커피가 점차 인기 있는 음료가 되어갔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금지 물질로 지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16세기에 커피는 카이로에서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이미 모든 곳에서 즐기는 음료가 되었으나, 그러한 인기는 다른 한편에서 저주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해 학자들은 커피가 제공되는 몇몇 장소들이 너무 시끄럽고 떠들썩한 곳들이 되었고, 이런 곳들이 중요한 종교 집회 장소와 너무 가까웠었다는 사실로 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일부 정통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상당히 못마땅하게 받아들여지면서 급기야 커피의 효과가 술과 비슷하다는 점으로 이를 금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여전히 무슬림 교도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술은 마실 수가 없고, 깨끗한 식수가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었던 무슬림 교도들에게 끓인 커피는 엄격한 라마단 기간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완벽한 음료였던 까닭이다. 이렇게 커피를 제공하는 집들은 곧 소중한 시설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커피가 그리스도교인들의 유럽 안에서조차도 이슬람교도들만의 음료가 되다시피 한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사탄의 음료에서 카푸치노로 변신

커피는 지중해 북쪽 해안에서 쌍수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세기를 거듭하여 무슬림과 전쟁을 치르고 대항해 시대를 거쳐 가면서 그리스도교 유럽인들은 커피를 ‘사탄의 음료’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커피는 바티칸으로까지 길을 내고 말았다.

클레멘트 8세 교황은 1592년에 임기를 시작했는데, 그는 분명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가진 분이었고, 노련하고 대담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면서도 통치자였던 분이었다. 당시 교황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과의 전쟁에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을 규합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황은 주변의 조력자들이나 정통 무슬림, 그리고 콥틱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커피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음에도 커피를 몸소 마신 최초의 교황으로 기억된다.

교황께서 “이 사탄의 음료는 너무나도 훌륭하여 이교도들만이 이를 즐기도록 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닐스 버틸 왈린스Nils-Bertil Walins가 쓴 ‘에티오피아로부터 시작된 머나먼 길(A Long Way From Ethiopia)’이라는 글에서는 클레멘트 교황이 커피가 술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장려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탈리아가 커피를 수입하여 서유럽 전역에 대량으로 유통하기 시작한 것이 이 교황의 재임 기간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그렇게 커피를 유통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인들은 즉시 커피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렸으니 그것이 바로 카푸치노의 탄생이다.

카푸치노는 세계적으로 커피를 즐기는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에스프레소라는 커피 샷에 밀도가 높은 우유 거품을 얹는 커피를 가리키는 ‘카푸치노Cappuccino’라는 말마디가 애들이 흔히 입는 모자 달린 ‘후드 티’의 ‘후드hood’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카푸치노의 어근이 되는 셈인 ‘카푸쵸cappuccio’라는 이탈리아 말은 영어의 ‘후디hoodie’이고, 이는 16세기에 탄생한 ‘카푸친Capuchin’ 수도자들을 가리킨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께서 이끌었던 카르멜 수도회Carmelite Order의 개혁 운동에 동참했던 마테오 바시Matteo Bassi라는 분이 1525년에 원래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수도회가 카푸친 수도회이다. 마테오 바시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 추구하고자 했던 13세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원래 지향인 청빈과 단순이라는 가치로 돌아가자고 촉구하면서 카푸친 수도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 카푸친 수도회는 후드가 달린 소박한 커피색 통옷에 흰색 띠를 두른 복장으로 수도복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원래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수도자들의 수도복에 굳이 커피색을 지정하지는 않았으며 그저 “겸손하고 값싼 옷”을 입도록 규정에 명시했을 뿐이다.

마우로J.P Mauro라는 분의 논문에 따를 때 13세기의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에게 제공된 수도복은 프란치스코 수도자들보다도 결코 형편이 낫다고 할 수 없는 농부들이 만든 것이었으며 중세 시대의 농부들이 입는 의복의 일반적인 색깔은 천의 재료로 사용되었던 양털이 지닌 다양한 회색이나 갈색 류의 색조였다. 어떤 경우에라도 염색하지 않은 천이 가장 싸구려 천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질기면서도 실용적인 의복이 필요했던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은 처음에 색깔 같은 것에 그리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점차 수가 불어남에 따라 통일된 색깔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커피와 우유의 색깔을 따오듯이 커피색과 흰색 끈으로 그들의 복장을 정했다.

트라베르소V. M. Traverso라는 이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분파인 카푸친 수도회의 수도자들이 입은 복장에 길고 뾰족한 두건이 달린 것을 아이들이 보고 ‘카푸치니cappuccini(카푸치노cappuccino의 복수형, 후디들hoodies)’이라고 놀려대면서 이런 이름이 고착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레오폴드Leopold 1세가 마르코 다비아노Marco D’Aviano라는 카푸친 수도자를 측근으로 영입하면서 비엔나의 커피숍들이 ‘카푸친kapuzin’이라는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온 세상에 카푸친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1만 명이 훨씬 넘는데, 아마도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유명했던 카푸친 수도자 중 한 분이 바로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일명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일 것이다.

바리스타의 수호 성인은 12세기 프랑스의 생드로고Saint Drogo이다.(*번역 글, 원문과 이미지 출처-alete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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