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3,24-32(연중 제33주일 ‘나’해)

오늘 복음으로 ‘나’해의 전례에서 마르코복음 낭독을 마감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예고문’ 형식인 13장의 마지막으로서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 수난과 죽음이 임박한 중에 가르침과 위로 및 당부를 하시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13장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마르 13,1) 성전이 대단하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하시며 성전이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

마르 12,38-44 또는 12,41-44(연중 제32주일 ‘나’해)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향해, 어찌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을 향해, 혹독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의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있으므로 그저 비판과 비방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지혜로운 해석이 필요한 대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율법 학자들은 어린

마르 12,28ㄱㄷ-34(연중 제31주일 ‘나’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참조. 마르 12,18-27), 이렇게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마르 12,28)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2,28) 사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 종교 분야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진 논제였다. 당시 유다인들은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에

마르 10,46ㄴ-52(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곧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죽음에 이르시게 되는 길을 가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여러 가르침을 주시면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과 당신께서 형성하신 공동체 양성 이야기를 오늘 복음으로 마감한다. 마르코복음 10장의 오늘 마지막 대목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축제의 분위기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나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참조. 마르 11,7-11)

마르 10,35-45 또는 10,42-45(연중 제29주일 ‘나’해)

※ 전교주일을 지내는 곳에서는 http://benjikim.com/?p=11823 에서 별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음 ————————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이루어진 직후에 열두 사도 중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특별한 청을 드린다. 마르코가 전하는 바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장차 받으실 수난을 예고하셨는데, 그 예고 뒤에 매번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반응을

마르 10,17-30 또는 10,17-27(연중 제28주일 ‘나’해)

지난주 복음이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어”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도록 마련하신 혼인 계약의 아름다움과 그에 관한 하느님의 의도에 관한 내용(참조. 마르 10,6-9)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그렇게 형성된 가족일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상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혼인과 가정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상적인 길이라면, “나(그리스도)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마르 10,29) 실제 열두 제자들에게

마르 10,2-16 또는 10,2-12(연중 제27주일 ‘나’해)

복음의 전반부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조상들이 이혼 가능성을 허락한 경우를 두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며 시비를 걸어와 예수님과 논란을 일으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혼을 반대하는 것이 부당하며, 그렇게 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상황이 된다는 것처럼 몰아붙인다. 이 논쟁은 이미 당시 샴마이Shammai라고 하는 엄격주의자들(간음의 경우 이외에는 이혼 절대 불가)과 힐렐Hillel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어떤 이유라도 이유가 닿으면

마르 9,38-43.45.47-48(연중 제26주일 ‘나’해)

오늘 전례의 복음은 마르 9,38-48에서 취하는데, 신체 일부를 훼손해도 좋다는 식으로 잘못 읽힐 소지가 있는 44절과 46절을 건너뛴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에 오르신다. 그러나 공동체의 분위기는 그리 평화스럽지 않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마르 9,32), 베드로처럼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마르 8,32)하기까지

마르 9,30-37(연중 제25주일 ‘나’해)

※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오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옮겨와 미사를 지내는 곳에서는 http://benjikim.com/?p=11529에서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지난주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마르 8,29)한 이후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주님께서 오늘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서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자, 예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마르 8,27-35(연중 제24주일 ‘나’해)

오늘 복음은 공관 복음이 모두 전한다. 16장으로 형성된 마르코 복음에서 오늘 복음이 위치한 제8장 후반부 대목은 위치상 복음의 정 중앙에 위치하면서 전환점이 된다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베드로의 고백이 등장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중요한 a key moment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