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40-45(연중 제6주일 ‘나’해)

몇 주째 우리는 여전히 마르코복음 1장에 머물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특정 시간이나 장소가 명시되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다소 갑작스러운 듯 듣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들을 수 있게 된다. 예수님과 어떤 나병 환자의 만남 이야기이다. 1.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성경에서는 문둥병(한센병)뿐 아니라 타박상이나 상처들 및

마르 1,29-39(연중 제5주일 ‘나’해)

지난주 우리는 이른바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4)라고 알려지는 대목의 전반부에서 예수님의 일과에 관해 듣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셨고, 그에 관한 표징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이 놀랐으며,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래아 지역에 두루 퍼져나갔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말씀과 표징들의 연장이며,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중 후반부에 해당한다. 1.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예수님과 첫 번째로

마르 1,21ㄴ-28(연중 제4주일 ‘나’해)

지난주 복음에서 네 제자의 부르심(마르 1,16-20)을 전한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제 예수님께서 더는 혼자가 아니시라고 강조한다. 바야흐로 예언자이자 교사였던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후에 그의 제자라고 추정되는 예수라는 라삐 한 분이 사해 해안을 따라 갈릴래아로 오셨는데, 그 라삐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작은 공동체는 점점 커질 것이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 삶에 끝까지 동행할 것이었다. 복음사가

마르 1,14-20(연중 제3주일 ‘나’해)

노인이더라도 노인성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종종 과거의 기억, 특별히 뭔가를 새롭게 시작했거나 그로써 인생이 달라졌다거나 인생에 흔적을 남긴 사랑과도 같은 것, 아직도 나의 인생을 일정부분 사로잡고 있는 무엇인가를 기억하며 회개와도 같은 순간을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하곤 한다. 감히 회개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소聖召의 순간, 부르심의 순간, 소명召命의 순간, 주님께서 그때까지 살았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신다고

요한 1,35-42(연중 제2주일 ‘나’해)

1.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insegnare<in+signum: 방향을 가리키는 신호 / educare: 끌어내다 2. “무엇을 찾느냐?” 공생활 시작의 예수님의 제1성→부활하신 주님의 제1성 “누구?” “무엇”에서 “누구”에로 가는 여정 3.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매력에 이끌리는 삶, 사랑의 시작, 삶에 동참하려는 원의 4. “와서 보아라” 발과 눈이 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동작 ‘보다’, ‘눈여겨보다’ 가다→보다→믿다 내가 가고 내가 보아

마태 2,1-12(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하느님 경배는 평범한 상황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눈을 들다”, “길을 떠나다”, “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동방박사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을 이같이 세 가지 동사로 요약했다. 교황은 동방박사들이 아기로 오신 주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 기억하라면서 물질적 재화나 성공과 비교할 수 없는 내적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루카 2,22-40 또는 2,22.39-40(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나’해)

성탄 후 12일간 주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유일한 주일에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기리는 주일을 지내면서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신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기가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라는 사실을 기념한다. ‘가족’이라는 가치가 무너져 가는 현시대에 내가 사는 ‘가족’의 가치를 돌아보는 축일이기도 하다. 성탄절에 교회가 이스라엘의 가난한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루카 1,26-38(대림 제4주일 ‘나’해)

대림절의 막바지인 대림 제4주일에는 항상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노래하였던 나자렛의 한 여인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하느님의 일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된다. 천사가 마리아라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에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잉태되신다는 사실을 알렸던 그 장면은 수도 없이 많은 예술 작품으로 묘사된다. 이는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느님 말씀의 성취이다. 1.

요한 1,6-8.19-28(대림 제3주일 ‘나’해-자선주일)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 복음사가(참조. 마태 3,7-12 루카 3,7-18)와는 달리 복음의 기록을 시작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출현에 관해 간결하면서도 종합적으로 짧게 전한다.(참조. 마르 1,1-8) 그런 까닭으로 전통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을 읽는 대림 제3주일 ‘나’해에는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다른 내용을 알려주는 네 번째 복음인 요한복음에서 복음을 취한다. 그런 배경 안에서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3구절을 취하고,

마르 1,1-8(대림 제2주일 ‘나’해)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전례력에 따라 읽는 오늘 마르코복음의 첫 대목에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마르코복음의 제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제목을 붙인 다음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제목에 걸맞은 내용의 시작을 위해 곧바로 이사야 예언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사명을 언급한다. 복음의 제목에 등장하는 “시작”이라는 말은 즉시 구약 성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