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절 다음 주일이다. 성탄으로 나신 예수를 기리는 교회가 그 첫 주일을 성 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이 세상을 찾아오신 예수께서 인간들의 일상과 가정, 곧 인간들의 법과 제도 안에 들어가셨음을 새기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가정이라는 제도와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함이다. 이 축일에 우리는 ① 나자렛의 성 가정, ② 우리들의 가정, 그리고 ③ 교회라는 하느님의 가정에 대하여 묵상한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10계명 중 제4계명, 곧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효성을 강조한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시대의 혈육의 가정과 믿음의 가정을 거론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서로 참아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을 입으십시오.”(콜로 3,12-14) 하며 그리스도인 가정들을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복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성 요셉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어떻게 보살폈는지와 그 가정이 맞아야 했던 어려움과 도전에 관한 내용을 전한다. 성 요셉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두고 다윗 왕을 조상으로 둔 사람으로서 약속된 예언의 성취를 위해 오롯한 믿음으로 매일매일 성실하게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새싹’이신 예수님을 키워낸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대목으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술을 마감한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요셉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에 비해 루카는 마리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고, 마르코는 이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음도 기억할만하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한 것에 관한 내용을 담은 16-18절을 생략한 이유는 전례적으로 성 요셉이 성모님, 그리고 아기 예수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였고 그로부터 다시 돌아오셨다는 내용으로 구성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6.15.17.23절)”라는 문형으로 반복하여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개의 예언 성취를 듣는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듣는 이 복음은 ‘예수님의 참 가족’(마태 12,46-50)이라는 대목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의 예형임을 상기할 것이다. 성모님과 성 요셉은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성실히 수행하신 분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가정’이 우리 교회임을 상기할 때 그 교회가 성 요셉이 이루었던 성 가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함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가정의 아기 예수가 끊임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중에도 성 요셉과 성 마리아가 믿음을 잃지 않았듯이 하느님의 성 가정인 오늘 현세의 교회도 사악한 무리의 위협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다.
『나자렛 집: 나자렛의 집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즉 복음의 학교입니다. … 여기 이 학교에서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할 때, 왜 영적인 규율을 갖는 것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나자렛의 이 겸허하고도 숭고한 학교에 들어가, 마리아와 함께 생의 참된 지식과 신적 진리에 대한 고귀한 지혜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으면 합니다.
첫째로 침묵의 교훈입니다. 영혼이 살아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대시하는 마음이, 법석대고 지나치게 민감해진 우리 현대생활에서 그렇게도 많은 고성高聲과 소음 및 소란으로 포위당해 있는 우리 안에서 재생되었으면 합니다. 나자렛의 침묵이여, 우리 마음을 거룩한 반성과 내적 생활에 집중시키고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영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주소서. 또한, 마음의 준비와 영적인 것의 연구와 묵상, 각 개인의 내적 생활 그리고 하느님 홀로 은밀히 보시는 그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를 가르쳐 주소서.
다음으로는 가정생활에 대한 교훈입니다. 나자렛의 집은 가정생활이 무엇이고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및 간소하고도 단순한 미美,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성격 등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또 가정에서 받은 교육은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참으로 감미로운 것임을 보여 주며, 사회질서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이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교황 바오로 6세의 1964년 1월 5일 나자렛에서 하신 강론에서-성 가정 축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부분 발췌)』
1.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마태 2,13-14) 여기 “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박사들이다.(참조. 마태 2,1-2) 마태오 복음에서 “주님의 천사”는 요셉이 마리아와의 파혼을 작정하였을 때(1,20), 이집트로 피신하라 할 때(2,13),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라 할 때(2,19), 헤로데의 아들 때문에 유다로 돌아가기가 두려울 때(2,22) 꿈에 나타난다. 요셉은 꿈결에 들은 천사의 음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들은 대로 행한다.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버리려고 한다.”고 하는데, “아기의 목숨을 노린”(20절) 사건은 성경 외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헤로데의 잔인한 성품으로 보아 개연성이 크다. “이집트”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헤로데의 통치 권한 밖에 있었다. 옛날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 이집트로 피신하는 사례들은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1열왕 11,17.40 2열왕 25,26 예레 26,21) 이제 아기 예수도 이집트로 피신하여 살다가 나자렛 마을로 옮겨감으로써 몸소 탈출을 겪으신다. 이집트로의 피신은 ‘식별’을 위한 피신이요 ‘겸손’의 피신이며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피신이다. 이집트 피신은 당시 험난한 시골길로 보름여 걸어야 하는 여행길이었다.
『(천사의 피하라는 말을) 듣고 요셉은 당황하지 않았고,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불과 얼마 전 (천사가)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 하였던 바로 이 아기는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단 말인가, 정말 우리는 피난을 가야만 하고 긴 여행을 해야만 하는가?…’ 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성실하고)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라고 말을 하였음에도 ‘도대체 그때가 언제입니까?’라는 말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들이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요셉은 순명했고, 믿었으며, 모든 시련을 기쁨으로 견뎌냈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예수께서는 평화로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의 주변에는 살인과 폭력, 통치자들의 음모, 추방과 재난이 널려 있었다. 예수께서는 외국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망명자로 살아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시사적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흡사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간존재의 높이와 깊이를 모두 체험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고, 그래서 모든 것을 구원하실 수 있었다.(안셀름 그륀, ‘예수, 구원의 스승’, 분도, 2008년, 39쪽)』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5) 헤로데 원조 왕은 기원전 4년, 3~4월경 예리코에서 병사했다. 마태오는 호세 11,1을 인용하여 하느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셨듯이 예수님을 구출하셨다고 한다.
2. “헤로데는…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는 탈출 1,15-22에 나오는 파라오의 칙령, 곧 히브리인들을 두려워하여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던 내용을 연상시킨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예레 31,15의 인용이다. 마태 16,14;27,9 등에도 마태오가 예레미야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마태오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예수님의 예형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라마”는 베텔과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창세 35,19에 의하면 라헬은 베들레헴이라고도 하는 에프라타로 가는 중간에 묻혔다 한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마태 2,20)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네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탈출 4,19)라는 비슷한 구절이 보인다.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은 마태 2,4에 따라 “헤로데”와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겠으나, 마태 2,3에 의하면 “온 예루살렘”일 수도 있다. “주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네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다 나귀에 태워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다.”(탈출 4,19)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마태 2,22) 기원전 헤로데 왕이 병사하자 세 왕자가(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립) 왕국을 분할 통치하였다. 그 중 아르켈라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6년까지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아를 다스린 폭군이었다. 그의 통치는 기원후 6년에 로마군이 진격하여 자기들의 총독(그중 유명한 이가 바로 본시오 빌라도이다)을 임명할 때까지 그의 잔인성과 정치적인 혼란으로 특징지어진다. 대조적으로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다스린 헤로데 안티파스는(참조. 루카 23,6-12) 비교적 온건한 군주였다. 그리하여 요셉은 나자렛으로 향한다.
3. “나자렛 사람”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23)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는데, 사실 구약 어디에도 이런 예언은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 2,22 역시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 부른다. 이는 ‘나조래오스’라는 그리스말을 옮긴 것인데 어원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나자렛’은 홍해를 거쳐 이집트로 무역 상인들이 드나들던 길목에서 멀지 않은 농업지역이지만,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요한 1,46)에서 보듯이 별 중요성이 없는 곳이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는데, 이 구절에서 인용한 글귀나 ‘나자렛Nazareth’이란 단어는 구약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다. 이 인용에 대한 가장 가능성 큰 설명은 이사야서 11,1의 히브리 사본의 구절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shoot)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nezer)이 움트리라.”에 근거한 재담(wordplay)이라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된 불가타 성경을 집필한 성 예로니모(St. Jerome, 340~420년)는, 그의 이사야서 11,1 주석에서 ‘나자렛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음은 이사야 11,1에 기록된 예언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전체 자손의 새싹(nezer)으로 실현된 것을 뜻한다고 서술한다.(굿 뉴스 게시판)』
『“나자렛 사람”이 이사 11,1의 “새싹(히브리어로 Nezer)”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보인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에서 이스라엘은 도려내진 나무 그루터기에 비유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여정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종말을 고한 바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신다. 하느님은 예수에게서 온 인류를 새롭게 하고 싱싱하게 할 새싹을 틔우신다. 마태오에게 “나자렛 사람”이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뜻이다. 마태오는 이 이름에서 메시아가 유다교 전통의 기대와 달리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근거를 찾는다. 예수만이 나자렛 사람으로 불렸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도 나자렛 사람으로 불렸다.(안셀름 그륀, ‘예수, 구원의 스승’, 40쪽)』
요셉은 꿈결에 들은 천사의 음성을 곰곰이 새기면서 배경처럼 남아서, 드러나지 않은 삶의 주인공으로서, 예수와 마리아와 함께 지내는 자잘한 일상사 안에서, ‘새싹’이신 그리스도의 날을 그렇게 마련했다. 아멘!
아.
무슨 스펙타클한 영화 보는줄 알았습니다.
마지막엔 살짝 건너뛰기도 했지만.
그렇게 요셉은 성가정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 하셨군요.
뭉클했습니다.
예수님 탄생 복음은
언제나
재밌고 흥미진진합니다.
오늘 성탄미사는 제게 참 의미있었답니다.
저도 새롭게 태어났거든요.
신부님. 늘 복된 말씀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좀 더 영적으로 성장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