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타령: 엉성할 초/풀 초草

풀들이 빛을 잃고 시들해졌으며 죽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뭇잎들이 수북하더니 어느새 눈이 쌓여 풀들은 자취를 감추고 눈 세상이 되었다. ‘풀 초草’는 ‘풀 초艹(艸)’라는 의미부 글자와 ‘일찍 조早’라는 소리부 글자(조→초)가 합해져 만들어진다. 한 해가 시작할 무렵 사방 천지에 일찍 돋아나 변화를 알리는 것이 풀이라지만 한 해의 마감에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풀 초艹(艸)’라는 글자는 싹이 삐죽이 돋아나거나 올라온 풀의 모양(싹날 철/풀 초屮)이 두 개 있는 모양새다. ‘풀 초草’와 ‘풀 초艹(艸)’는 같은 글자이지만, 대개 전자는 단독으로 사용하고 후자는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 사용한다. ‘풀 초草’는 「부드러운 식물의 뜻으로부터 여성을 지칭하고 이리저리 눕는 풀의 속성으로부터 대강하다, 거칠다, 초고草稿, 기초起草 등의 뜻이 나왔다.(하영삼, 한자 어원사전, 798쪽)」

초고草稿나 기초起草(이때 기초는 사물의 밑바탕을 말하는 기초基礎와 달리 글의 초안을 잡는다는 뜻)는 영어로 draft이다. 풀은 흔하게 아무렇게나 있어서 ‘보잘것없다’나 ‘엉성하다’라는 뜻이 있고, 처음 나온 이파리나 싹이어서 ‘처음’이라는 뜻도 있다. 이처럼 ‘풀 초草’는 ‘처음’이라는 의미를 띠기도 하지만, 모든 ‘처음’에 쓰이진 않는다. 예를 들어 ‘초벌·초보’의 ‘초’는 ‘草’가 아니라 ‘初’이다. 그래서 ‘초창기草創期’, ‘초안草案’ 등의 단어에는 ‘처음 초初’가 아닌 ‘풀 초草’를 쓴다. 그렇지만, ‘초벌구이’니 ‘애벌구이’라고 할 때 ‘벌’은 같은 일을 거듭해서 할 때 거듭되는 일의 하나하나를 세는 우리말 단위라서 ‘初벌’이라 쓰고, beginner를 뜻하는 ‘초보’ 역시 初步라 쓴다.

세상이 하나의 너른 풀밭이고 흔히들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 버리는 풀”(참조. 시편 89,5-6 최민순 역)처럼 인생이 그렇다지만, 과연 풀은 무엇이고 꽃은 무엇이며 풀꽃은 또 무엇일까? 잡초와 독초, 약초와 화초도 모두 풀인데, 그 차이는 성분일까 모양새일까? 그 차이는 어디에 있고 그 차이를 규명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풀은 꽃이 아니라는데, 풀꽃이라는 말이 가능하기나 할까? 잡초와 화초의 차이는 무엇일까? 꽃집이나 시장의 거래가 가능하면 꽃이요 그렇지 않으면 잡초일까, 뽑아서 버리면 풀이고 꺾어서 화병에 꽂을 수 있으면 꽃일까, 보는 이 따라 꽃이라 하면 꽃이고 풀이라 하면 풀일까?

하잘것없는 풀이라지만 쪽이라는 풀에서 우려낸 고운 빛, 쪽보다 더 푸른 빛(청출어람靑出於藍)은 어찌하고, 난/란蘭이라는 접두어를 붙였으나 한 무더기 거칠고 성긴 잎의 초草라서 난초일 뿐인데도 그는 왜 품격이 다른 풀일까? 그윽하고 깨끗한 우정의 상징(지란지교芝蘭之交)이라 하며 ‘그린다’ 하지 않고 ‘친다’ 하는 경지境地를 논하는 난초는 풀일까 꽃일까? 곡식도 아니면서 풀도 아닌 가라지는 무엇일까? 우주의 원리가 한 포기의 풀에도 정말 담겼을까, 풀은 풀일 뿐인데 내 마음이 그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는 것일까?

삶과 죽음이 늘 그렇듯이 살아있어 부드러운 풀이 죽어 마르고 거친 까닭은 무엇일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1945~) 시인의 ‘풀꽃’은 원래 못생긴 것이라도 오랫동안 더 보면 정이 들고 알게 되며 그런대로 예쁘게 비친다는 뜻일까, 아니면 놓치기 쉬운 아름다움이 정성을 쏟아야만 발견된다는 것일까? 곰이 먹어 사람이 되었다는 쑥은 풀일까 약일까? 동물도 식물도 먹지 않고 벌레와 풀도 밟는 법이 없이 걷는다는 신화 속의 기린麒麟은 정말일까? 풀뿌리 민초民草는 풀을 베어 베개를 만들어 눕는 이의 자조自嘲일까 유유자적일까? 연못가의 봄풀은 과연 꿈을 꿀 수 있을까? 눈에 눌려 죽은 듯 깔려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할 풀의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 풀이라는 존재를 둘러싼 상상이 괜스레 이어지고 속으로 답을 되뇌어 본다.

눈 덮인 수풀 속에 멍청히 서 있는 나는 괜스레 산만하다.

One thought on “풀 타령: 엉성할 초/풀 초草

  1. 오, 복된 산만함이여. 덕분에 나는 풀숲에 누워 오래간 만에 풀을 자세히도 들여다봅니다. 너는 꽃이냐, 풀이냐.

Yun Asella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