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다’해(루카 18,1-8)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ㄴ)

*전교주일을 지내는 곳에서는 다음 링크에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https://benjikim.com/?p=15701)>를 확인할 수 있다.

루카복음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주님의 기도를 통해 가르쳐주셨으며(참조. 루카 11,1-4), 끊임없이 간청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 졸라대듯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으며(참조. 루카 11,5-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좋은 것”, 필요하다고만 하면 반드시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참조. 루카 11,9-13) 등을 이미 가르쳐주셨다. 오늘 복음의 대목이 위치한 18장을 통해서는 친구에게 고집 세게 계속 청했다는 11장의 비유와 비슷하게 고집 센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이 괴로워할 정도로 계속 간청하였다는 비유를 통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루카 18,1)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먼저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이러한 질문을 외면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우리가 스스로 진리의 한 측면을 제거한 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기도는 매우 어렵고 불편한 행위이다. 그런 까닭에 성숙한 믿음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마저도 때로는 기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인생의 여러 우여곡절 안에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기도로 얻지 못했다면서 낙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와 함께 ‘왜’ 기도하는가도 물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 인간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즉각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것만을 찾아야 한다고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위 자유나 자율성으로 어느 정도 하느님을 잊고 살아도 된다고 믿는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들도 기도를 심각하게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만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하느님과 주저리주저리 잡담하는 이들의 것이며 내면에 발생한 어떤 느낌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자신의 보상을 추구하거나 공로를 쌓으려는 열심한 사람들의 행위 정도로만 인식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릇되고 형편없는, 기도가 아닌 기도가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기도는 하느님께서 즐겨 들으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다.

기도의 일반적인 어려움을 넘어 시간이 없다든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자신도 모르게 하루하루 지나가고 마는 일상의 연속, 여러 가지 주변의 산만함과 영적인 건조함과 같은 갖은 핑곗거리들 안에서 우리가 복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하는 말씀처럼 ‘기도’ 역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생겨나고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도는 결국 “믿음의 기도”(야고 5,15)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마태 6,7)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의 종교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하는 대로 오로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만 한다. 주님과 그분의 뜻, 그리고 결코 받을 자격도 없는 그분의 사랑을 듣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본질적이거나 높은 기도가 없다.

일단 듣게 되면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그분 앞에서 그분의 사랑을 부르는 찬미가 되고 고백과 흠숭이 된다. 기도는 각자가 살아가는 나이나 영적인 여정에 따라 변한다. 기도하는 이의 수만큼이나, 또 기도의 주제 가짓수만큼이나 기도의 방법은 다양하다. 다른 이의 기도를 섣불리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불행하다. “엘리 사제”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던” “한나”를 “나무라며”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판단했지만, 한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즐겨 들어주신 기도였다.(참조. 1사무 1,9-18) 진정 개인적인 기도는 ‘나에 대한 나의 비밀, 나만의 비밀secretum meum mihi(영어로 My secret is my own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은 이사 24,16의 불가타 번역에 기원을 두는 말로서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나만이 지니게 되는 고유의 비밀을 뜻한다)’이다. 아울러 전례典禮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명하신 그대로 거행되어 신자들의 기도를 더욱 고무하고, 더욱 차분해야 하며, 더욱 빛을 주고, 더욱 복음적이 되어야만 한다.

기도가 이렇게 되면 끊임이 없는 항구한 기도가 되고 결코 다함이 없는 기도가 된다. 하느님 앞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삶이 되고, 찬양과 감사가 되며, 인간을 위한 진정한 청원이 되고, 하느님과의 대화가 되며, 하느님의 현존을 영접하는 열림이 되고, 생명을 낳으시며 북돋우시고 위로하시며 지탱하게 해 주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시간과 공간의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루카 18,1)이다. 그런 뜻으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어떤 형식이나 일정한 기도문의 반복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생각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분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여 이루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사도 바오로는 앞서 열거한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하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에페 6,18)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하고 여러 번 반복한다.(참조. 사도 12,5 에페 1,16 콜로 1,9 1테살 1,2;2,13 1티모 5,5 2티모 1,3)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통교 안에 머무르는 것, 그분의 현존을 영접하며 내 마음 안에서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부르는 것, 그래서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나의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로마 12,1) 것이다.

1. “재판관과부줄곧졸랐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불의하게 억압하는 이) 사이에 올바른 판결(정의)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루카 18,2-3) “과부”는 성경에서 고아나 가난한 사람과 함께 자기방어를 할 수 없고 억압받는 이다. 과부의 유일한 무기는 끈질기게 매달리는 일밖에 없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무기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 18,4-5) “하느님도,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은 그 과부를 위해 결코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지 않았을 나쁜 재판관이었다. 그렇지만 그 재판관은 그 과부로부터 귀찮음과 시달림을 받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욕심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로 작정한다. 비교적 짧고 간결한 이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루카 18,6) 하시면서 비유를 듣는 청중에게 두 개의 질문으로 비유의 뜻을 풀이하며 되물으신다.

『과부를 우리 영혼의 상징으로 보면…우리를 작게 만들고자 다가오는 우리를 압도하는 세상의 음성보다 영혼이 더 세다는 것을 우리는 기도 중에 경험하게 된다. 영혼은 기도 중에 활짝 핀다. 영혼은 기도 중에 날개를 단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자기’, 하느님께서 본디 만드신 우리의 하느님 이미지와 접하게 된다. 세상은 우리 영혼의 하느님 이미지를 흐리게 할 수 없고 파손시킬 수도 없다.(안셀름 그륀, ‘예수, 인간의 이미지’, 분도, 2009년, 114쪽)』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숨이 막힐 것이고, 살아갈 수 있는 기력이 떨어지며, 볼 수 있는 빛이 없어지고, 성장할 수 있는 영양이 결핍될 것이며, 삶에 의미를 주는 기쁨이 없어져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께 조금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싶겠지만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 5분이라도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든 그렇지 않든, 주님께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브루노 포르테Bruno Forte주교, 1949년~, ‘기도에 관한 편지’에서)』

2. “하느님께서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의 법이나 인간적인 정의를 아랑곳하지 않은 이 땅의 불의한 재판관도 그렇게 하는데, 의로우신 하늘의)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당신께서 몸소 부르시고 선택하시어 당신과 거룩한 언약을 맺으신 당신의 백성과 공동체)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7-8ㄱ)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정의를 실현시켜 주실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확언하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알려지는 루카복음의 공동체는 오늘날까지도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수호자이시고 방어자이신 하느님을 믿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불의가 계속 횡행하는 것 같고 외침과 기도는 공허한 것만 같은 데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판결해 주실 것”이라 하신다.

하느님의 판결은 모든 이에게 들이닥칠 것이고, 인간적인 눈에는 늦어지게 보일지라도 종말의 재림처럼 갑작스럽게 오고야 말 것이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 같습니다.”(시편 90,4)라고 시편이 노래한 것처럼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이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하바 2,3)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히브 10,37)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1베드 3,9) 하신 그대로 기어이 오고야 말 주님의 날이요 판결이다.

기도의 기다림은 반드시 효과가 있으며 빈말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설령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일지라도 반드시 의로움으로 판결하시는 심판자이심을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그리고 다른 이에 관한 하느님의 활동, 곧 하느님의 역사歷史와 역사役事를 볼 때, 많은 경우 우리가 근시近視와 맹목盲目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비유를 이해하면서 재판관이 하느님이시고 과부가 우리 자신인 것처럼 대부분 생각한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우리가 재판관이고 하느님께서 과부가 아닌지 가정해 볼 수도 있다. 성서는 재판관이 “하느님도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이라 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의하다. 우리는 흔히 그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고자 하는데도, 재판관처럼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 척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과부와도 같으신 하느님께서는 물러서지 않고, “밤낮으로 부르짖으시며”, 우리를 “귀찮게 하시고, 졸라대신다.” 마침내 “올바른 판결을 내릴” 때까지, 마침내 우리가 착한 일을 할 때까지, 마침내 우리가 사랑을 배울 때까지 우리를 다그치신다.

3.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동전의 이쪽저쪽과도 같다. 한편에서는 믿음의 시작이 담겼고, 다른 한편에는 믿음의 웅변雄辯이 담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유를 다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ㄴ) 하고 질문 하나를 덧붙이신다. 이 질문에는 세상살이에서 헤매는 우리 믿음의 모습과 걱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질문은 우리가 지닌 믿음이 무너지면서 결국 우리가 행여 이 땅에 존재하는 마지막 그리스도인이지나 않을까 하는 우리의 걱정이 담긴 질문이기도 하다. 얼핏 보기에 그 어떤 보장도 없고, 그 어떤 확실한 것도 없어 보인다. 불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역사 끝까지 항상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가를 진지하게 되물으면 아무도 이를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우리는 분명하게 믿지만, 어느 날 우리 교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가 아닌 채로, 숫자가 점점 줄어서 일부 소집단으로, 아니면 극도의 세속화로 세상 속의 일부가 된 채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어떤 소수 종교인 집단 정도로 남아버릴지도 모른다.

하느님께서야 우리를 항상 부르시고 우리를 믿어주시기에 변함이 없는 분이시지만,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는 주님을 부인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오늘 이 사회의 죽어 있는 믿음, 이 교회의 현실적인 믿음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 미래의 믿음을 담보할 수 있을까?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하는 말씀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형제를 믿지 못하면서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믿음의 부족은 이미 우리 안에 병적인 상태로 깊이 자리 잡았고, 우리가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알량한 믿음마저도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유혹은 매일매일 우리 주변과 우리 마음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의 아들”, 의로우신 재판관, 형제들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시어 목숨까지 내놓으셨던 분, 바로 그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러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으로 우리 믿음을 쇄신하고자 기도한다. 아멘!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