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낸다. 원래 전례적으로 이날은 성탄 후 8일째 되는 날이므로 과거에는 성경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의 할례와 작명 기념일로 지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및 ‘세계 평화의 날’로 정리되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보편 교회의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낸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21) 오늘 복음 대목의 정점이자 결론을 이루는 이 마지막 절은 많은 나라에서 새해 첫날로 삼고 있는 오늘 큰 의미를 담는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할례” 자체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는 경향이 있다. 초 세기 <바르나바의 편지>라는 문헌에서는 심지어 요셉과 마리아가 악한 천사의 꼬임에 빠져 예수님에게 할례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기까지 한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후 우리 교회가 할례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도록 결정함에 따라 이러한 결과가 빚어졌을 것이지만, 복음에 엄연히 기록되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사건 하나를 잃어버린 듯하다. 그렇지만 한편에서 그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칫하면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人性에 관한 한 부분을 간과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참조. 루카 2,4.15)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 할례를 받으심으로써 한 번 더 그분의 신분과 소속이 드러난다. 율법서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에 맺어진 거룩한 “계약”(참조. 창세 17,10-11)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그 “계약”에 속하시게 된다. 항상 몸에 지니게 되시는 그 상처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시고, 하느님과 맺은 결정적이고도 영원한 계약의 일부가 되신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그 상처는 예수님이 영원한 히브리 사람이자 유다인임을 말해준다.
복음사가 루카는 할례라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신분과 소속을 결정적으로 말해준다는 이유로 이를 기록에 남긴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루카 1,72-73)라고 한 그대로 예수님의 할례가 하나의 의례적 절차라고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조상들에게 해주신 약속을 이루면서 새로운 계약으로 넘어가는 “계약의 표징”이고, 이미 오래전 예언자가 “마음의 포피를 벗겨내어라”(예레 4,4) 하면서 예고하고 권고해 준 ‘마음의 할례’,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콜로 2,11)를 위한 표징이었다.
2.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할례는 아기에게 이름을 주는 과정이기도 했으니 요셉과 마리아도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실제 이 “예수”(יְהוֹשֻֽׁע, Y’hoshua가 יֵשֽׁוּעַ, Yéshu’a로 축약된 형태)라는 이름은 감히 입에 올릴 수 없고 발음조차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름 JHWH(*참조. “있는 나”·“야훼”·“I AM”·“LORD” https://benjikim.com/?p=9590)이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부여하신 이름이다.(참조. 루카 1,31) “예수”라는 아기는 하느님의 뜻과 행위로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부여하는 것도 하느님께 달린 일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인간 편에서는 『주님, 구원하소서!』 하는 구원의 청원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는 하느님 편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를 뜻한다. 하느님께서 오직 예수님께 맡기신 소명을 온전히 담고 있는 이 이름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루카 1,32)을 알아 모시고, 부를 수 있게 해줄 이름이다. 이 이름은 인간이 구원을 받을 거룩한 이름이요, 표징이 될 이름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게 할 은총의 이름이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게”(루카 10,18) 할 이름이다. 이 이름은 기쁨 중에서나 슬픔의 눈물 중에서나, 생명의 시작이나 죽음의 문턱에서냐를 막론하고 온 마음으로 불러 그리스도교 온 역사 안에서 은총과 거룩함을 이루는 이름이다.
3. “여인에게서 태어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라고 한다. 그 “여인”은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라고 마리아 스스로 노래한 대로 하느님께서 굽어보신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이다. 천사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하고 알려준 대로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한 것은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을 낳게 하신 하느님의 뜻이다. 그렇게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은 자 되시고, 무한이 유한이 되시며, 영원이 찰나가 되시고,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연약한 자 되신다.
이 모두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마리아의 태胎를 덮으시고 마리아를 주님 자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그렇게 예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린다. 그렇게 마리아의 태중에서 빚어진 복된 열매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으로서 마침내 예수 안에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시어 온 세상 모든 인간이 그 이름을 복福을 얻게 하신다. 실로 이 모든 것이 “땅이 제 소출을 내주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하셨네.”(시편 67,7) 하고 시편의 기록자가 노래한 그대로이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우리 인생의 또 다른 매듭이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오늘 대축일은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는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 곧 인류 전체의 상징이랄 수 있는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라는 축복이 우리 인생의 매일 안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실로 그 축복은 하느님과 그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인간의 결합이요 혼인과도 같은 축복임을 알려주는 대축일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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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해 첫날, 여인의 태중에서 축복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혼인을 기념합니다. 우리 인성은 항상 하느님 안에 있을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는 영원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그녀는 여인이며 어머니이십니다. 이는 본질입니다. 여인인 그녀에게서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인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인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같은 길을 통해야 합니다. 여인이며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인성을 엮으신 여인인 성모님의 표징 안에서 새해를 시작합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삶의 날들의 씨실과 날실을 엮고자 한다면 여인에게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탄생은 여성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모욕받고, 구타당하고, 성폭행당하며, 성매매에 내몰리고, 태중에 있는 생명을 죽이라는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여성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인류를 위한 구원은 여성의 몸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 인성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여성의 몸이 광고와 수익과 음란물의 저속한 제단에서 희생되고 있는지요! 여성의 몸은 소비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존중과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여성의 몸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몸입니다. 이 몸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랑이신 주님을 세상에 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성의 모성은 모욕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성장이란 경제성장이기 때문입니다. 태중에 있는 생명에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여행의 위험에 처한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임신했어도 공허한 사랑의 마음을 지닌 사물이자 잉여 인간의 숫자로만 간주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여성은 전체 피조물의 요약으로, 창조의 정점에 이릅니다. 실제로 여성은 자신 안에 창조 자체의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출산과 보호, 모든 것과의 친교, 모든 것을 돌보는 것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성모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합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기쁨,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박대에 대한 슬픔, 요셉의 사랑과 목자들의 놀라움, 미래에 대한 약속과 불확실성 등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모든 일에 마음을 다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심지어 역경까지도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정리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마리아의 이 행동은 다시 한번 반복됩니다. 예수님의 사생활의 끝자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이러한 반복은 성모님께서 가끔 행하신 행동이 아니라 그분의 일상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게끔 해줍니다. 생명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바로 여성의 일입니다. 여성은, 삶의 의미란 사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일들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마음으로 보는 사람만이 잘 봅니다. 왜냐하면 “내면을 보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실수를 넘어 그를 보며, 형제가 가지고 있는 약함을 넘어 그를 보며, 어려움 중에서 희망을 보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줄 압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가? 사람들을 마음으로 볼 수 있는가?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는가, 아니면 험담으로 그들을 파괴하는가? 무엇보다도,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가치들, 다른 관심들, 나에 대한 홍보, 재물, 권력을 내 마음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오직 생명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때라야 우리는 생명을 보살필 수 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은총을 청합시다. 올 한 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평화의 집이며 전쟁터가 아닌,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모든 여성의 존엄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여인에게서 평화의 임금이 나셨습니다. 여성은 평화를 제공하며, 평화의 중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에 완전히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자신들의 선물을 전달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은 더욱더 일치되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취는 전 인류의 성취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한 여인의 눈에,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에 비추어졌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어루만짐을 받았으며, 그녀와 함께 첫 미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온유한 사랑의 혁명(la rivoluzione della tenerezza)을 시작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교회는 그것을 계속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실 교회도 마리아처럼 여인이며 어머니입니다. 여인이며 어머니인 교회는 성모님 안에서 자신의 독특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으로 바라보고, 죄와 세속에 “아니오”라고 말하라는 부르심을 느낍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바라보고, 주님을 선포하며, 삶 안에서 주님을 낳으라는 부르심을 느낍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바라보고, 모든 사람을 아들처럼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을 느낍니다.
마리아에게 다가가면서 교회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중심을 재발견하며, 자신의 일치를 재발견합니다. 인간 본성의 원수인 마귀는, 차이들과 사상들과 당파적 사고들 및 정당들을 우선시하면서 인간을 유혹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시스템이나 프로그램, 성향이나 사상 및 기능성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교회의 핵심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붙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로서 하느님의 어머니께 우리가 신앙의 백성으로 하나될 수 있길 간청합시다. “오, 어머니, 우리 안에 희망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일치를 가져다주십시오. 구원의 여인이시여, 올 한 해를 당신께 의탁합니다. 당신 마음 안에 간직하십시오. 당신께 환호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모두 함께 일어나서 마리아께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고 세 번 외칩시다. [회중과 함께] “천주의 성모 마리아, 천주의 성모 마리아, 천주의 성모 마리아!”(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1월 1일 대축일 미사 강론, VaticanNews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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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26년 1월 1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향하여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이 오랜 인사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주님 부활 대축일 저녁에 하신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라는 그분의 말씀은 그저 평화를 향한 바람이 아니라, 이 인사를 받는 이들에게 참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고 결과적으로 모든 현실에도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러하기에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온 세상에 날마다 가장 조용한 변혁을 외칩니다. 로마 주교로 선출된 저녁부터 바로 저는 이 보편된 선포와 더불어 저의 인사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곧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겸손하고 인내하는 평화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평화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레오 14세, 로마와 전 세계에 보내는 첫 강복, 2025.5.8.,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72호-20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7면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며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품어 안으시는 착한 목자이신(요한 10,11.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인류를 갈라놓는 분열의 장벽들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참조). 그리스도의 현존, 그분의 선물과 그분의 승리는 인내로운 수많은 증인을 통하여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우리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더욱 선명히 빛나게 됩니다.
어둠과 빛의 대비는 새 세상이 태어날 때의 산고를 묘사하는 성경의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파고 들어와 우리가 맞닥뜨리는 시련과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빛을 보고 그 빛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고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초대하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가닿고자 하는 부름입니다. 평화는 실재하며 우리 안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평화는 우리를 깨우치고 우리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부드러운 힘을 가졌습니다. 평화는 폭력에 저항하고 폭력을 이깁니다. 평화는 영원의 숨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악에게는 “그만”이라고 외치지만 평화에게는 “영원히” 하고 속삭입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러한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제3차 세계 대전’이라고 부르신 것들 한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이러한 확신에 힘입어 계속해서 어둠의 확산에 저항하고 밤의 파수꾼처럼 서 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빛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어둠과 공포로 일그러진 세상을 바라보는 편향되고 왜곡된 관점에 휩쓸리고 맙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희망이 없고 다른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잊어버리는 이러한 담론들을 ‘현실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죄로 상처를 입었더라도 언제나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작용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 깊이 평화를 소중하게 여김으로써 평화의 빛나는 온기를 주변에 전파할 수 있도록 평화와 떼어낼 수 없는 우정을 맺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성인은 그의 공동체에 전하는 설교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평화로 인도하고 싶다면 여러분부터 평화를 지니십시오. 평화 안에서 굳건해지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불꽃을 전하고 싶다면 여러분 안에 타오르는 불꽃을 지녀야만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Sermones), 357, 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선물을 지녔든 지니지 않았다고 느끼든, 우리 마음을 평화에 열려 있게 합시다!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또 우리의 손 닿는 곳 너머에 있다고 여기기보다는 그 평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알아봅시다. 평화는 하나의 목표이기 이전에 실재이고 여정입니다. 평화가 폭풍우의 위협을 받는 작은 불꽃처럼 우리 안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위험에 놓일 때에도 우리는 평화를 보호해야 하며 평화를 증언해 온 이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는 우리의 선택을 이끌고 밝히는 원칙입니다. 폐허만 남은 곳 그리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잊지 않은 이들을 발견합니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이 두려움과 낙담 속에 모여 있는 곳에 오신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는 계속해서 그분 증인들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서 문과 장벽을 뚫고 들어갑니다. 이러한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선을 기억하고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선을 다시 선택할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함께 이룰 수 있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
예수님께서는 잡혀가시기 바로 전에 친밀한 신뢰를 나누시며 당신과 함께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곧이어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그들의 고통과 공포는 분명 예수님께 곧 닥칠 폭력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깊이 살펴보면, 복음서들은 제자들을 힘들게 하였던 것이 예수님의 비폭력적인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비폭력적인 응답은 그들 모두가, 그 가운데에서도 베드로가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하였던 길입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그들에게 끝까지 이 길을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계속해서 불편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분께서는 무력으로 당신을 보호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히 되풀이하십니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한 18,11; 참조: 마태 26,52).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는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입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한가운데에서도 그분의 평화는 비폭력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또한 비극적인 상황에 너무나 자주 연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이 새로움의 예언자적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위대한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인식을 지니고 자비로이 행동하도록 초대합니다(마태 25,31-46 참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폭력의 속임수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된 형제자매들을 자기 곁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평화를 향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지라도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세상 앞에서 종종 큰 무력감에 짓눌리곤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미 이 특별한 역설을 언급하였습니다. “평화를 소유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평화를 찬미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평화를 찬미하기 위해서 우리는 필요한 재능이 부족함을 깨닫고 올바른 생각과 단어를 신중히 고르며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얻기를 바란다면 평화는 우리 손 닿는 곳에 있어 노력하지 않고도 이를 소유할 수 있다.”(『설교집』, 1)
평화를 먼 이상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평화가 부정되거나 심지어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올바른 생각들, 사려 깊은 말들, 그리고 평화가 가까이 왔다고 말할 역량이 우리에게는 부족한 듯합니다. 평화가 사람들이 살아가고 가꾸며 지켜 나가는 현실이 되지 않을 때, 가정생활과 공공 생활 안에 공격성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시민과 통치자의 관계에서는 전쟁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고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며 폭력에 폭력으로 되갚지 않는 것조차 결점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정당방위의 원칙을 훨씬 넘어서는 이러한 대립의 논리가 이제 세계 정치를 지배하며 날이 갈수록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정부 지도자가 군비 증액을 거듭 촉구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내리는 것을 외부 위협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제시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군사력의 억제력, 특히 핵 억제력이라는 발상은 법과 정의와 신뢰가 아니라 공포와 무력 지배 위에 세워진 국가 간 관계의 비합리성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 이미 그 시대에 말씀하신 대로, “결국 사람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폭풍전야처럼 끔찍한 폭력이 덮쳐 올까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그러한 무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초래할 끔찍한 살육과 파괴를 감히 책임지겠다는 자가 있으리라 믿기 어렵지만, 우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재난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요한 23세,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4.11., 111항 수정 번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와 사회』, 1994(제1판), 241면)
또한 2024년, 전 세계 군비 지출이 전년 대비 9.4% 증가하여 지난 10년간의 증가 추세를 이어가며 총 2조 7,180억 달러(전 세계 GDP의 2.5%)에 이르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SIPRI Yearbook: Armaments, Disarmament and International Security, 2025 참조) 더욱이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대응은 재무장을 위한 막대한 경제적 투자뿐만 아니라 교육 정책의 전환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20세기에 힘들게 얻은 교훈을 지키고 수많은 희생자를 잊지 않는 기억의 문화를 증진하기보다 학교와 대학교, 언론 매체에서 위기의식을 퍼뜨리고 무장 방어와 안보의 개념만 부추기는 조직적인 선동과 교육 프로그램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화의 원수들도 사랑합니다.”(「설교집」, 357, 1)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며, 관계를 단절하거나 줄기차게 비난만 하지 말고 경청하며 다른 이들과 최대한 대화를 나누라고 권고하였습니다. 6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 현대 세계의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인식을 새롭게 다지며 마무리되었습니다. 특히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전쟁의 진화에 주목하였습니다. “현대 전쟁의 독특한 위험은, 현대식 과학 무기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범죄를 자행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종의 냉혹한 연쇄 반응으로 인간 의지가 극도의 참혹한 결정을 내리도록 충동을 받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앞으로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한자리에 모인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국가 통치자들과 군사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또 온 인류 앞에서 그토록 막중한 책임을 심사숙고하기를 간청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965.12.7., 80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글판, 2008(제3판), 201면)
공의회 교부들의 호소를 되새기고 대화가 모든 차원에서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식임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급격한 기술 발전과 인공 지능의 군사적 활용이 무력 분쟁의 비극을 더욱 악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정치 군사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이 점점 더 기계에 ‘위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보호하는 인본주의의 법적 철학적 원칙들을 유례없이 파괴적으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사적 경제 금융 이익의 극심한 편중이 국가들을 이러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실정을 규탄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과 비판적 사고를 일깨워야 합니다.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러한 깨달음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망루와 방벽이 가득한 그 세상에서 도시들은 유력 가문들이 벌이는 피로 얼룩진 전쟁을 겪었고, 소외된 변방의 비참한 지역은 더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프란치스코는 내면의 참평화를 얻었고 다른 이를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웠으며, 스스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모든 이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방법을 찾았습니다.”(프란치스코,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2020.10.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제1판), 4항)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계속 본받도록 부름받는 이야기로서,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곧 열린 마음과 복음적 겸손에서 비롯되는 평화를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선은 무기를 내려놓게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하느님께서 어린아이가 되신 이유일 것입니다. 가장 깊이 내려가 죽은 이들의 거처에까지 다다르는 그 강생의 신비는 젊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시작되어 베들레헴의 구유 안에서 드러납니다. 천사들은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하며, 무방비 상태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알립니다. 인간은 그분을 돌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루카 2,13-14 참조). 어린아이만큼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존재는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자녀들과 그처럼 연약한 다른 이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꿰찌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사도 2,37 참조). 이와 관련하여, 존경하는 선임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무엇이 오래 가고 무엇이 덧없이 지나가는지, 무엇이 생명을 가져다주고 무엇이 죽음을 가져오는지 우리가 더 명료하게 깨우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까닭에 우리에게는 흔히 자신의 한계를 부정하려 할 뿐만 아니라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 개개인과 공동체가 선택한 방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편집인들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the Directors of “Corriere della Sera”), 2025.3.14.)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할 때에만 이룰 수 있는 ‘완전한 무장 해제’를 최초로 소리 높여 외친 교황은 성 요한 23세입니다. 그분께서는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전쟁 목적을 위한 군비 경쟁의 중지와 그 실제적 축소를 실현해야 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장 해제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에서 무기를 제거하고 전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무장 해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 무기의 균형으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신뢰로써 참된 평화가 확립된다는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올바른 이성의 외침이며,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고, 더욱 높은 유익을 인간에게 가져올 것입니다.”(「지상의 평화」, 113항 수정 번역)
고통받는 인류를 위하여 종교가 해야 하는 본질적인 역할은 생각과 말까지도 무기로 삼고자 하는 유혹이 날로 자라나지 않게 막아내는 일입니다. 올바른 이성만이 아니라 위대한 영적 전통들도 우리에게 혈연이나 민족을 넘어설 것을,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거부하는 집단을 넘어설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결코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음을 목격합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의 표현이 정치 투쟁의 장으로 끌어내려지고 국수주의를 축복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과 무장 투쟁을 정당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무엇보다 삶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하는 이러한 형태의 신성 모독을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따라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물론 평화의 길이요 전통과 문화 안에서 만남의 언어인 기도와 영성,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증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평화의 집’이 되어, 대화로써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정의를 실천하며 용서를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레오 14세, 이탈리아 주교회의 주교들에게 한 연설, 2025.6.17) 바람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는 배려하며 생명을 살리는 사목적 창의성을 통하여, 평화가 그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것이 정치적 차원의 중요성을 결코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공적 책임을 맡은 이들은 “전 세계 국가들이 더욱 인도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숙고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정은 상호 신뢰, 조약의 성실성, 체결된 조약 의무 이행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의 초점을 정밀하게 검토해야 하는데, 여기서 계약 이행의 성실성, 계약의 지속성, 계약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상의 평화」, 118항 수정 번역) 이것이 외교와 중재, 국제법이 맡은 무장 해제의 길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초국가적 기관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 시기에, 어렵게 맺은 조약들을 위반하는 일이 늘어나 무장 해제를 위한 이 길이 너무도 자주 훼손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국제적 힘의 균형이 깨지는 가운데, 정의와 인간 존엄성의 위기는 경종을 울리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불안과 분쟁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희망을 살아 있게 하는 모든 영적, 문화적, 정치적 발의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세계화의] 원동력이 인간 의지와는 동떨어진 알 수 없는 비인간적 익명의 힘이나 구조의 산물인 양” “숙명론적으로 보는 시각”(베네딕토 16세,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009.6.2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9(제1판), 42항)의 확산에 맞서야 합니다. 앞서 제시하였듯, “사람들을 지배하고 무한히 승승장구하는 최고의 방법은 어떤 가치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절망의 씨를 뿌리고 끊임없는 불신을 조장하는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5항) 우리는 이러한 전략에 대항하여 시민 사회 안에서 자기 인식, 책임 있는 연대의 형태들, 비폭력적인 참여의 경험, 크고 작은 수준에서 회복적 정의의 실천을 북돋워야 합니다.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체험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려는 절실한 바람을 느낍니다.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 자신들의 노고에 대하여 좋은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 준다. 그러나 외톨이가 넘어지면 그에게는 불행!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다(코헬 4,9-10).’ 또한 ‘의좋은 형제는 요새와 같다’(잠언 18,19).”(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5.15., 35항 수정 번역, 『교회와 사회』, 7면)
이것이 바로 희망의 희년이 맺는 열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희년은 수많은 사람이 순례자로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마음과 정신과 삶의 무장 해제를 내면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써 분명 이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4-5)
바티칸에서 , 2025년 12월 8일, 레오 14세 교황(*출처 https://cbck.or.kr/Notice/2025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