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시기의 여정은 본질에서 부활로 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내려가심과 올라가심, 낮추심과 들어 높이심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사순 제1주일에 광야에서 여러 가지로 유혹과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 악마로부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 ”(마태 4,3.6) 하는 말을 들어가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신적神的인 자질까지 들먹거리는 상황에 부닥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면,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 ”(마태 17,5)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광에 둘러싸여 변모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다.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온 생애를 둘러싸고 있는 부활의 역동성 안으로 온 교회를 초대하는데, 변모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하고 명령하신다. 영광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조건 안에서 일단 당신의 본래 모습을 다시 숨기신 셈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여정 동안에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의 영광과 신비를 엿보게 해주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잘 들으라고 권고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내용은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하고, 2베드 1,17-18에도 다른 형태로 전해진다.
예수님의 변모라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다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 하신 말씀으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마태 17,1) 열둘 중의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실” 때에도 함께 있게 된다. 세 제자는 예수님의 특별한 증인이 되도록 선택을 받는다. 베드로는 훗날 스스로 “나는…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1베드 5,1)이라 증언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하고 약속하신 바에 따라 순교하기까지 실제 자기들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살아내는 증인들이 된다. “세 제자”는 모세가 산에 오를 때 동행했던 세 제자(참조. 탈출 24,1.9), “엿새 후”는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은 다음 이렛날 모세를 부르신 장면(참조. 탈출 24,16),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는 모세의 얼굴이 빛나던 순간(참조. 탈출 34,29)을 각각 떠올리게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새로운 모세인 것처럼 묘사하려 한다.
『… 우리는 그곳에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늘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 것처럼 우리도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면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빛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우리 영혼의 모습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되며, 그분의 모상으로 형성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더욱 큰 영광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기쁨을 지니고 그 산으로 달려가 모세와 엘리아, 야고보와 요한처럼 구름 속에 들어갑시다. 베드로처럼 이 신적 영상에 넋을 잃고 이 아름다운 변모의 영광으로 변모되어 이 세상 것들을 벗어나 높이 들려지도록 합시다. 육신과 피조물은 뒤에다 남겨 두고 탈혼에 빠진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면서 창조주께로 향합시다.…(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 주교, 700년경, ‘주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한 강론’에서-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 예수님께서는 세 친구를 (타볼의 영광스러운 산만이 아니라) 겟세마니 동산으로도 데려가셨다. 거기에서 친구들은 고뇌에 찬 예수님의 얼굴과 피눈물이 흥건히 땅을 적시는 그런 처참한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루카 22,44) 우리 마음의 기도 역시 이렇게 타볼과 겟세마니의 두 모습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헨리 나웬, ‘The only necessary thing’, Crossroad, 2008년, 120쪽)』
1. “예수님께서…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따라 타볼 산으로 여겨지는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예수님의 몸과 옷에 변화가 일어난다. 복음사가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통교에 관하여 말로 잘 표현되지 않는 이 사건을 묘사하는데 무척 고민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 하는 것을, 마르코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 하고, 루카는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한다.
옷은 그렇다 치고 매일 마주했던 예수님의 얼굴을 두고는 마태오가 “해처럼 빛나고”라고 하는 반면, 마르코는 아예 예수님의 얼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루카는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루카 9,29)라고만 기록한다. 늘 보던 예수님의 얼굴이 아닌 모습으로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올 수 있는 빛나는 어떤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한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2. “모세와 엘리야가…예수님과 이야기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태 17,3)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의 표상이다. 믿음의 열매 덕분에 믿음을 넘어선 은총으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시나이·호렙 산에서 모세는 주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주님의 얼굴을 뵙도록 주님께 간청하였으나 그는 겨우 주님의 “등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참조. 탈출 33,19-23) 엘리야 예언자도 같은 산에 올라 주님을 뵙고자 하였으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 안에서만 주님을 알아 모실 수가 있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한 그대로 죽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하느님을 변모하신 예수님 안에서 마침내 만나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한다. 예수님의 빛나는 변모 중에 베드로가 “주님”이라 칭하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초막 셋을 짓겠다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를 하고 온 민족이 예루살렘에 모여 나뭇가지로 초막을 세우고 이레 동안 그 안에서 지내는 초막절을 지냈다. 이는 시나이 사막에서의 천막생활을 회상하는 축제였다. 우리에게 집을 지어주실 분은 우리의 주님이신데도 베드로가 주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 한다. 모세나 엘리야뿐 아니라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주님을 위한 초막을 지어야만 한다.
3.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실 때 그분 둘레에서 이스라엘(모세와 엘리야)과 교회(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통교가 이루어지는데,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태 17,5) “들어라!”(신명 6,4) 하는 가장 큰 계명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하는 계명으로 다시 울려 퍼진다. 하느님을 듣는 것이 곧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님을 듣는 것이 된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태 17,8) 하는 까닭이다.
율법과 예언이 증언을 마치고 예수님을 통하여 말하고자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린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진실로 드러내시고, 모든 인간에게 이 땅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 안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명,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라는 기쁜 소식을 펼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시나이(탈출 13,21;19,16;24,15-16), 만남의 천막 위(탈출 40,34-35), 그리고 성전 위에서(1열왕 8,10-12)처럼 “구름”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그리고 현존하신다는 상징이다.(2마카 2,7-8 참조) “빛나는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을 “덮어” 그늘이 되어 하느님을 감춘다. “구름”은 계시이자 숨김이다.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시고 감추시는 하느님이시다.
‘들음’은 순명을 요구한다. 들어서 시작한 순명은 대답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는 하늘의 목소리가 예수님께 말하지만,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군중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 잉태 때에 천사의 전갈로(마태 1,20), 하느님의 계시로(마태 2,15),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마태 3,17),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제자들의 입을 통해(마태 14,33),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통해(마태 16,16) 드러난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6) 제자들이 깜짝 놀라 엎어지며 경외심으로 두려워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마태 17,7)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하시듯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신뢰와 사랑의 몸짓으로 손을 대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일으켜 주시지 않으면 영영 일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하였듯이 이제 듣고, 보고,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본 것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신 사실을 더해 증언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9) ‘하늘’이 계시한 비밀을 지키라는 당부는 묵시 문학의 고전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다니 12,4.9 참조) 이것이 공관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맥락 안에서 되풀이된다.(마태 8,4;9,30;12,16;16,20 마르 1,34.44;8,30) 부활의 신비로 완전히 밝혀질 메시아에 관한 비밀을 지금은 지키라 하신다.
제자들은 이제 자기들이 체험했던 예수님의 영광이 주는 힘으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십자가 산 위에까지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부활 이후로까지 이어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여정이다.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타볼 산에서 광채 속에 묻혀 계시는 주님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잠에 취해 몽롱했지만, 그 추억은 후에 시련을 겪을 때 희망의 샘이 되어 주었다. 아마 내 인생에는 한 차례 타볼 산 체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체험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힘은 골짜기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인생의 긴 어둠의 밤에서 나를 지켜주기에 충분할 것이다.(헨리 나웬, 제네시 일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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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선택하셨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거룩한 변모를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그들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세 명을 택하신 걸까요? 그들이 더 거룩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험의 순간에 그분을 부인했고,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는 그분의 나라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습니다.(마태 20,20-23 참조)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의 사랑의 계획에 따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 척도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사랑의 계획을 통해 선택하십니다. 조건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선택, 자유로운 계획,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신적인 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세 명의 제자를 부르셨던 것처럼, 오늘도 당신을 증거할 수 있기 위해,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누군가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받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능력하다는 변명을 내세우며 뒤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타보르 산에 가서 태양처럼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도 구원의 말씀이 전해졌고, 신앙이 주어졌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이기주의와 탐욕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빛은 일상의 걱정으로 흐려졌습니다. … 하지만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가 우리를 증인이 되게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 덕분에 증인이 됐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3월 8일 삼종기도 훈화, *출처-바티칸 뉴스 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