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35-48(부활 제3주일 ‘나’해)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Trio sur fond bleu by Escolier Odile

지난주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들은 교회는 이번 주에 루카복음의 마지막 장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듣는다. 지난주 복음인 요한 20,19-31과 대동소이하지만, 서로 보충하고 보완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셨다 하는데, 루카복음은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 하셨다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난주에는 토마스 사도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오늘은 토마스 사도가 아닌 열한 제자들과 그 동료들, 그리고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제자와 함께 만나신다.

이번 주일의 복음은 루카복음의 맨 마지막 장에 수록되는 내용으로서 빈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루카 24,1-11), 그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루카 24,1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카 24,13-35)에게 나타나셔서 근래의 예루살렘 사건을 도무지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루카 24,18)의 이야기들에 이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1.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

이 모든 일은 여전히 “주간 첫날”(루카 24,1), 주님의 날, 주님 부활의 날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배경은 시간이 흘러 어느덧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으로 돌아와(참조. 루카 22,12 마르 14,15)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얘기들을 나누고 있는 열한 제자와 다른 동료들(루카 24,33-34)에게 자기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준”(루카 24,35) 다음의 저녁나절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을 두고는 길에서 겪은 일이라 한다. 바오로 사도 역시 “길에서” 주님을 만난다.(참조. 사도 9,27)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이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잘 묘사한다.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해 주었다 한다. “이야기”를 함께 나눈 제자들의 공동체는 교회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교회는 체험하고, 보고, 알아본 것을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또 어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이 시몬에게 나타났노라고 전한 예루살렘의 제자들처럼 타인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부활은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 다른 이의 눈을 열어주는 곳, 대화를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그곳에 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곳이 바로 거기이다.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하느님 체험을 떠벌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체험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것을 나름대로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했는지, 진실하면서도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말할 때, 그들 한가운데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신다. 그러면 대화는 부활이 된다. 부활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말하고 싶도록 부추기는 내면의 충동이다. 미루지 말고 말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내 안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4,36)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실 때 제자들이 도망했던 것에 대해서, 그리고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했던 것에 대해서, 또 맨 처음 공동체를 꾸렸을 때 열둘이었는데 이제는 왜 열하나인가에 대해서도 일체 말이 없으시고, 그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다. “샬롬 알레이켐”( שלום עליכם, Shalom ‘aleikhem)이라는 말은 유다인들의 평범한 인사말이지만, 이날 저녁에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와 힘을 담은 인사말이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뿌리째 흔들리고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 인사는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의미를 담았다.

제자들을 다시 만난 예수님은 그간 제자들의 행적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꾸지람이나 탓이 없이 그저 평화를 빌어주시고, 그들의 지난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시며, 이제는 괜찮다며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이렇게라도 다시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기뻐하시며 격려하시는 애정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나를 모른다고 배반하였던 베드로야, 두려워하지 마라. 나를 두고 멀리 도망쳤던 너 요한아,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나를 배반할까 생각하였고 나를 버렸던 너희 모든 제자야, 그리고 지금 나를 보면서도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너희 제자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나다. 너희를 은총으로 불렀고, 너희를 용서하여 선택하였으며, 너희를 연민으로 붙들었고, 내 사랑 안에 너희를 품어 안았으니, 오늘 오로지 나의 선함으로 너희를 다시 맞이하고자 한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380~450년)』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신”(루카 24,26)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변모되셨고, 다른 분이 되셨기에 이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아볼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에게 이 믿음은 어려운 것이었고 더구나 그 믿음을 살아내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복음사가 루카가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7)라고 기록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그저 이상하고도 다른 순례자의 하나로 보고 있었다. 제자들이 다시 만난 예수님을 두고 그토록 무섭고 두려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예수님을 지키지 못하였으며, 또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함께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배반하고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던 행동 때문이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 하신다. “보아라”하시고, “만져보아라” 하신다. 그 말씀에 우리도 우리의 손과 발을 보고, 만져보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은 내가 누군가에게 못된 짓을 하면서 상처 입은 내 손, 거꾸로 나를 상처 입히기 위해 다가오던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던 손을 부정하기 위해 내젓느라 상처가 생긴 나의 손, 누군가와 동행하기를 거부하면서 생겼던 내 발의 상처들…, 그런데도 나의 상처 가득한 그 손에 성체를 놓아주시고, 나의 상처투성이인 발과 함께 걸어주시는 주님의 발을 생각한다. 그분께서 그렇게 내 손과 발의 상처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는다.

주님께서 “바로 나다.”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온전한 “나”가 되신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 우리도 온전한 “나”가 되어야 한다. 온전한 나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다른 이들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애초에 지으신 본래의 참된 “바로 나”가 되어야 한다. 헛된 삶에서 벗어나 참된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 흔적인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지 다른 분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의 흔적, 사랑의 흔적에서 먼저 시작하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은 곧 상처 입은 인간,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병든 사람, 억압의 희생자인 사람, 불의와 폭력으로 망가진 사람의 손이요 발이다. 이처럼 고통받는 인간의 살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도 없고, 부활은 그저 한낱 신화로 남고 만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루카 24,41)만 한다. 인간은 종교에는 쉽게 이르지만 믿음에는 쉽게 이르지 못하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성스럽고 진지한 종교적 감정 정도는 쉽게 갖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쉽게 지키지는 못한다. 열한 명의 제자들이 이루었던 이 공동체의 모습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그 믿음을 살면서도 여지없이 우리의 불신을 표출하고 마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2.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인내로우시고 좋으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에 다시 한번 또 다른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신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시며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41-42) 갈릴래아에서 공동체와 늘 함께 살며 같이 먹던 그 음식이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음식을 드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고기”뿐만 아니라 “빵”도 드셨다.(요한 21,13)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루카는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면서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 했다고 적고 있다. 일찍이 만찬 때에 식사로 제자들과 이별하셨던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식사로, 먹는 행위로 당신의 부활을 알리고 계신다. 식사는 누구에게나 필수 불가결하며 일상적인 지극히 평범한 행위이다. 같이 먹고 마신다는 일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부활을 알리시니 우리도 일상을 통하여 부활을 깨우쳐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구워 제자들에게 주셨다 하고(요한 21,1-14), 루카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빵과 물고기를 드렸다 한다. 먹고 마신다는 식탁의 일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재현되고, 인식되며, 발견되고, 완성된다. 먹고 마심은 오직 집에서만 가능한 행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여러 번 먹고 마셨으며 당신을 만져 보게 하셨고, 이 준비를 위해 일찍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의 성사요, 이는 누군가의 생명 연장을 위해 나를 바치는 제사의 성사이다. 빵을 비롯한 음식은 생명의 연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죽지 않게 연장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고자 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빵을 나누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며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세상에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말한 대로이다. 성체성사는 누구나 부활하신 주님을 먹고 마시며 만져보는 성사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실 때”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 것은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먹어서 하느님을 알게 하려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루카는 루카복음에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사도 1,3)라고 기록했지만, 그래도 이 여러 가지 증거들이 사도들을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수시고 말씀을 건네신 뒤에 뒤따르는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지 않는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다시 “전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말씀하신”(루카 24,44) 내용,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하셨던 복음을 다시 선포하시고 강론을 재개하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했을 때 하셨던 말씀, “성경”을 기억하라 하시며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루카 24,45) 제자들의 “마음이 열리어” 성경을 깨닫게 되는 또 다른 기적이 이루어진다.

마음을 여시어” 할 때 사용되는 ‘열다’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치료의 의미를 담는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실 때 “열려라!”(마르 7,34) 할 때나 엠마오의 제자들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할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힘이 작용하시는 상황이다. 이제 ‘마음이 열리고’ ‘성경을 깨닫게 된’ 제자들은 믿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예언의 말씀들을 설명해주시고, 갈릴래아에서 지내면서 가르쳐주셨던 말씀들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께서 “고난을 겪고…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46)는 것을 몸소 말씀해주실 것이다. 파스카 믿음은 신경에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참조. 1코린 15,3-4)』라고 고백하는 대로 성경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중에 흩어지고 믿음을 잃었던 제자들의 믿음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시고, 제자들에게 당신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며,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이 되어 “모든 민족에게 선포해야 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루카 24,47)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신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어떤 기적을 믿기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육체의 눈으로만 보면 눈이 부시고, 믿는 마음으로 보면 찬란히 빛난다.』라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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