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0,1-9(주님 부활 대축일 ‘나’해)

“보고 믿었다”(요한 20,8) Photo by Marcus Ganahl on Unsplash

주님 부활 대축일의 복음은 ‘가, 나, 다’ 해 모두 같다. 오늘 복음은 다른 복음에서는 볼 수 없고 제4복음서 저자만이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이들에 관해 묘사하는 세 장면(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 /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님과 토마스)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은 루카복음에 따를 때,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루카 24,10)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름이 명시된 세 여인과 다른 여인들이다. 마르코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마르 16,1)라고 기록하면서 여인들의 수를 셋으로 말한다. 한편 마태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마태 28,1)라고 하면서 두 여인으로 밝히고, 오늘의 요한복음만이 오직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20,1) 혼자였다고 기록한다.

4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관한 목격 진술을 하지는 않지만,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누가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점을 기술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는 모두가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된다는 내용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150년 무렵에 서술된 것으로 보이는 ‘베드로복음’이라 알려지는 책에서는 부활 장면을 환상적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이 훗날 11세기에 들어 이콘이라는 형태의 그림으로 그려지고, 이후 부활을 그리는 예술작품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오늘 복음인 제4복음서는 21장의 복음 중에서 실로 절정이요 대大 종장終章이라 할 수 있는 20장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배치하고, 믿음으로 보아야만 보일 수 있는 신학적 내용을 단어 하나하나에 특별히 신경을 써가며 기록한다. 20장 첫 절 첫마디 말로 요한 복음사가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1)이라 기록하면서 사실적史實的이면서도 신학적인 시간을 알린다. 이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하는 천지창조의 “첫날”을 암시하고, 또한 유다인들의 한 주간이 안식일에 끝나는 것을 생각할 때 새로운 한 주간의 시작, 곧 ‘제8일’이 된다. 제4복음사가는 이 표현으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사도 3,15;10,40;13,30) 하듯이 예수님의 부활로 본격적이며 새롭고도 결정적인 창조의 시작을 알린다. 온전히 한 주간이 끝나고 새로운 창조의 날인 주님의 날, 제8일이 그렇게 시작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생명의 온전한 시작을 하게 되는 세례당은 팔각형이다.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라 하는데, 이는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아직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와 같은 전형적인 요한사가의 표현으로서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는데 사람들은 아직 생명과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음을 뜻한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아가 3,1) 하듯이, 마리아는 어둠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의 무덤으로 무덤 속의 예수님을 찾아간다. 그 순간 마리아는 베타니아에서의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향유”를 잊고 있었다.(참조. 요한 12,1-8) 마리아가 그렇게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것이 주님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였는지…이는 깊은 묵상 소재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모두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가정 아래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서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루카 8,3) 여인이고, 베타니아라는 마을의 라자로와 마르타의 동생(루카 10,38-42 요한 11,1-2)이며,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시에 도와드린 여인(마태 27,55 마르 15,41 루카 23,55)이고, 십자가 아래에 증인으로 있었던 여인이며(루카 23,49),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마련한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본”(루카 23,55) 여인이고, “주간 첫날 이른 새벽 일찍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간”(마태 28,1 마르 16,2 루카 24,1) 여인이며, 천사의 발현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낸(루카 24,4-8) 여인이고, 빈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린”(루카 24,10) 여인이며, 다시 무덤으로 돌아온 여인이고(요한 20,1),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던”(요한 20,11) 여인이며, 주님의 부활 후에 아직 주님의 부활을 이해할 수 없어 “무덤 밖에 서서 울며” 주님을 찾고 있던 여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뵈었고 주님의 부활을 다른 사도들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초대교회 때부터 일명 ‘사도 중의 사도Apostola Apostolorum=Apostle to the Apostles’라는 호칭을 얻기도 하였다.

무덤을 막았던 ()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하는데, 제4복음서의 저자는 정관사를 붙여 복음을 읽는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 돌’이라는 듯이 기록한다. “돌”은 “돌을 치워라” 하시는 라자로의 부활에서도 등장한다.(요한 11,38-38.41) 라자로의 무덤을 막았던 돌은 사람들이 치웠으나, 주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도대체 누가 치웠을까? 무덤에서 치워진 돌이라는 생명의 표징을 두고 마리아는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요한 20,2) 하면서 여전히 죽음의 표징으로 알고 있다.

마리아는 비어 있는 무덤을 본 것이 아니라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실을 두고 성 베다(672/673~735년)는 『천사가 그렇게 한 것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무덤으로부터 나오시게끔 치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이미 무덤에서 나오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그렇게 하였다』고 기술한다. 이어서 성 베다는 『닫힌 무덤처럼 성모님의 닫힌 태중 안에 주님께서 계셨다가 세상에 오셨고, 이제 그 닫힌 무덤을 통하여 세상을 떠나신다』고 기술한다. 또한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380~450년)는 『주님의 부활을 보기 위하여 우리 마음을 막았던 돌을 치워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주님 부활의 힘과 권능무덤 앞에 놓인 돌, 각자의 마음속에 박힌 돌, 너와 나 사이에 맺힌 돌, 하느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돌을 굴려버리시고, 치워 주시며, 부숴버리시기를! 작고 거의 눈에는 띄지 않을지라도, 지표면을 바꾸어놓을 잠재력이 담긴 어떤 새로운 것이, 주님 부활의 능력이 내 몸에, 또 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지라도 모든 것이 변해 있기를! 내가 어둠이어도 당신이 빛이시고, 내가 죄인이어도 당신은 사랑이시니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의 힘이 나와 우리 공동체를 감싸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무덤”, “”, “사랑하신 다른 제자(친구)”라는 말들은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와 연관된다.(참조. 요한 11,11.31.38.39.41)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하고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을 흩어지게 한다.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2) 마리아가 베드로를 찾고 이어 다른 제자를 찾아간다.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라자로를 지칭할 때의 “사랑하시는 이”(요한 11,3)와 같은 말이며, 또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을 두고 “너희는 나의 친구”(요한 15,14) 하실 때의 “친구”와 같은 말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최후의 만찬 때(요한 13,23-25)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어 한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요한 18,15)에 이어 오늘 복음으로 세 번째이다. 세 번 모두 요한 복음사가는 베드로를 부정적인 상황으로 묘사한다. 우리 말에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리아가 두 제자, 곧 복수에게 말하는 것으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방향을 잃었음을 내비친다. 복음사가는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요한 20,2)라는 마리아의 말을 통해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 하는 것을 통해 중요한 암시를 남겨 놓는다.

2.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요한 20,3) 베드로가 항상 먼저 언급된다. 오늘 복음에서 무려 아홉 번이나 언급되는 “무덤”, 곧 죽음의 장소와 달리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던 생명의 장소인 “정원”(요한 19,41)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4) 제자로서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랑하신 제자”의 “사랑”은 그를 더 빨리 달리게 한다.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 전체가 아니라 ‘바위,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라는 이름만이 언급되면서 베드로에게서는 다소 부정적이고 완고함이 드러나며, “사랑하신 제자”에 비해 빨리 달리지도 못하여 나이가 들었음도 드러난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는 “베드로”가 유다인들을 대표하고, “다른 제자”가 이방인들을 대표하여 온 교회를 상징한다고도 이해하기도 하였다. 혹은, 이를 두고 “베드로” 사도는 사목적 직무pastoral ministry를, “다른 제자”는 예언적 직무prophetic ministry를 상징하며, 또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얼굴official face of the Church을 대변하고, “다른 제자”는 관상적인 교회contemplative Church를 대표한다고 해설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서에서 단 한 번도 직접 거명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뜻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최후 만찬 때에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요한 13,23) 있던 제자이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4절)이며,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다다른 제자(8절)이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제자(8절)이다. 이 무명의 제자는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그것도 중요한 일화에 등장한다.(요한 13,23;19,26-27;20,2-10;18,15-16) 그런데도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교회의 전통에서는 대개 이 제자를 공관 복음에 나오는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과 동일시 한다.(마르 1,19.29;3,17;5,37;9,2.38;10,35.41;13,3;14,33 등, 사도 1,13;3,1.3.4.11;4,13.19;8,14 갈라 2,9) 아무튼, 이 제자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이 제자는 신앙의 본보기로 나오는가 하면(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 가운데 이 사람만 십자가 밑에 있었다), 때로는 베드로와 함께 등장하는데 그 경쟁 상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요한 20,2-10 참조) 이 사람이 복음서 저자가 구상해 낸 상징적 인물인지, 아니면 이 인물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무덤에 베드로보다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침대보 같은 “아마포”는 생명의 표징이다. 라자로의 부활 때 라자로는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무덤에서 나왔고, 예수님께서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하심으로써 라자로가 여전히 죽음의 올무에 묶여있었던 것이 드러났는데, 여기서는 아마포가 놓여있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라자로는 죽음의 띠에 묶여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묶었던 천을 이미 풀어 죽음의 천에 쌓이거나 묶이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죽음에서 벗어나셨다.(참조. 로마 6,8-9) “다른 제자”는 먼저 도착하였음에도 “먼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게 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하기까지 했던 바로 그 제자가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했다.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요한 20,6) 앞서 언급된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비로소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뒤따라와서”라고 하는데, “따르다”라는 동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최후의 만찬 때 시몬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요한 13,36)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실 적에 바로 앞 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하신 것에 따를 때 베드로는 당시 아직 충분한 “사랑”을 담지 못하였으며 충분한 제자가 아니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유일하게 폭력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던 제자였다.(참조. 요한 18.10) 예수님을 따르기에 항상 부족하고 충분한 제자가 되기에 실패를 거듭했던 베드로는 요한복음에서 시종일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사랑하시는 제자”를 뒤따르면서(참조. 요한 21,20-22) 결정적인 생명의 체험을 한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20,7) 한다. 이는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건이…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던” 사실이 부활의 증거로 이해된다.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아마포를 잘 개켜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쌌던 수건”은 땀을 닦는 것과 같은 수건을 이른다. 죽음의 상징이다.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요한 11,44) 나왔던 라자로의 수건이 죽음의 상징이었다면 여기서는 이제 그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음”으로 생명의 상징으로 대비된다. “얼굴”은 변화의 상징적인 신체 부위이다.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요한 복음사가는 죽음의 상징인 아마포생명의 상징인 수건을 섬세하게 분리하여 기록한다.

“따로 한 곳에”라 하는데, “한 곳”은 ‘장소’나 ‘자리’ ‘곳’으로 번역하는 그리스 말 τόπον, tòpon이라는 말로서 제4복음서에서 예루살렘 성전(요한 4,20;5,13;11,48)이나 예수님께서 계신 곳, 새로운 지성소(요한 6,10.23;10,40;11,6.30;19,13.17.20.41) 등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를 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하신 다음에야 모두 완성되고 이루어지게 된다. 복음사가는 이 모든 표징을 목격한 베드로의 반응을 한 마디도 전해주지 않는다.

3. “보고 믿었다

복음은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 모든 정황을 목격한 뒤에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는 구절로 이어진다. 생명의 표징 앞에 선 두 제자 중 베드로의 반응은 없는데, 먼저 다다른 “사랑하시는 제자”는 “보고 믿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요한 13,23) 제자, 십자가 밑에 “어머님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9,26)만이 주님 부활의 표징을 “보고”, “믿었다.” 제4복음서의 저자는 오늘 복음에서 반복되는 ‘보다’라는 동사를 세밀하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 ①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보는 빈 무덤의 시각적인 봄(요한 20,1.5) ②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피는 베드로의 봄(요한 20,6) ③ 믿음으로 이어지는 봄, 혹은 믿음에서 터져 나오는 봄(요한 20,8) *이 동사는 라자로의 부활 앞에서 동생 마리아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하실 때와 같은 동사이다. 사실 요한복음에서 ‘믿다’라는 동사는 ‘보다’, 곧 ‘믿음으로 보다’라는 동사와 동격이 되면서 ‘믿다’와 같은 동사가 된다.

보고 믿었다”는 표현은 이른바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의 절정이다. “보고 믿었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의 전개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1절)”을 보았고, “다른 제자”는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5절)”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 –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는 것(7절)”을 보았다. 보고 믿는 것에 대한 점진적인 전개이다. 복음의 대목에서 “보다(1.5.6.8절)”라는 낱말과 그에 상반되는 “모르겠습니다(2절)” “깨닫지 못하고(9절)” 등의 낱말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의 전개상 부활하신 주님의 표징을 만나는 이 첫 장면에서 조금 더 나아가 마지막 장에 당신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장면을 배치함으로써(참조. 요한 20,24-29)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처를 보아서 진정으로 믿게 되는 것처럼 기록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진리의 기준을 갖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말씀”이라는 기준이다. 그런 까닭에 요한 복음사가는 앞서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을 보기 전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라고 하실 때에도 위에 세 번째로 언급한 동사를 사용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이사 26,19) “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십니다.”(시편 16,10 참조. 사도 2,27)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호세 6,2) 하는 말씀들처럼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고, 당신 현존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당신 오른편의 끝없는 감미로움을 느끼게 하실 것이다.

오늘 전례에서는 낭독되지 않지만, 빈 무덤의 부활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의 대목은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10)는 구절로 끝난다. 부활하신 주님의 표징을 만난 제자들은 이상스럽게도 자신들이 겪은 체험을 전하러 나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표징인 빈 무덤만을 본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였다. 제자들은 아직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실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과 같은 체험이 필요했다. 그렇게 실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만이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라면서 요한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 전한 것으로 기록한다.

묵상

– 바로 그날 아침, 이른 새벽에 역사가 다시 시작한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 여덟째 날, 태양이 떠오를 때 비로소 주님의 날이 시작한다. 당신 안에 떠오르는 태양,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창조를 담으신 분의 날이 시작한다.

– 성경의 시대가 끝나고, 기나긴 기다림과 지침이 끝난다. 바로 오늘, 때가 이르고 모든 생명이 터져 나온다. 그리스도의 시간은 무척 짧다.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 희망의 말씀이 일순간에 완성된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루카 1,11)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는 말씀들처럼 구원은 순간에, 현재에, 오늘에 이루어진다.

– 공간과 시간이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시공을 넘어서는 분이다. 이제와 영원히, 알파요 오메가이시다. 부활의 은총, 생명의 재생, 모든 생명의 재확인이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죽음, 무덤과 침묵, 부활이라는 사흘에 이루어진다.

– 한계를 넘어서, 슬픔을 넘어서, 멸망을 넘어선 보증,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오늘 그분께 탄생,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생명이 모두 하나이다. 창조된 모든 것들에 대한 희망과 담보, 바로 그분께서 부활하셨고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시간과 공간에 이제 모두는 다시 살아날 운명이 되고 구원의 리듬을 타게 되며, 오늘 시작되는 영원의 흐름에 과거로부터의 모든 것이 담긴다.

– 오늘은 새로운 창조의 날, 새로운 하늘의 날, 새로운 땅의 날, 하느님의 손길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온갖 생물들과 모든 것의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날이다.

– 오늘은 모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열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 어리석은 정복과 야심에 묶인 이들이 무색해지며, 터무니없는 민족주의나 사람들을 가로막는 숨 막히는 국경이라는 것이 무너지는 날이다.

– 교회공동체는 거룩한 표징 안에서 희망의 활력을 다시 찾고, 쇄신과 정화, 성령의 불꽃을 다시 되살린다. 촛불의 눈물, 물터에서 터져 나오는 세례의 생수, 기쁨의 노래 안에서 교회는 온갖 장벽을 허물고, 끝없는 하느님의 바람을 늦추는 장애를 제거하며, 서로서로 너나없이 형제 되어 만나는 만남을 시작한다. ‘사람들의 빛’이 되겠다는 약속을 갱신하며, 우리가 비추는 빛으로 밝아진 구원의 길, 모든 이가 보고 싶고 오고 싶어 할 그 길로 모든 이가 나아오도록 인도한다. 아멘!

3 thoughts on “요한 20,1-9(주님 부활 대축일 ‘나’해)

  1. 오늘은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날, 신앙의 변화… 그동안 신부님의 복음강해를 읽으면서 말씀이 저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십니다. 감동 받으며 제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은혜로운 부활절입니다. 감사드립니다. Happy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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