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사랑이 남들의 마음을 상해 주게 되는 몇 가지 경우에 대하여

사랑 깊은 마음을 더욱 깊이 상처 내는 것은, 이 마음 때문에 상처받은 다른 마음을 보는 일이다. 펠리칸pelican은 둥지를 땅속에 만든다. 그래서 가끔 뱀이 새끼를 물기도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펠리칸은 능숙한 자연의 의사처럼 주둥이 끝으로 불쌍한 새끼의 온몸을 상처 내서 독을 나오게 하도록 온몸의 피를 흘리게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애처로운 새끼 펠리칸들을 죽게 한다.(펠리간의 이야기를 이렇게 비유하던 것은 고전에서는 상례였다) 그런데 일단 이 새끼들이 죽은 것을 보면, 이번에는 자기의 몸을 상처 내서 자기 피를 새끼 위에 쏟아 그들을 새로운 순결한 생명으로 살린다.

펠리칸의 사랑은 그 새끼를 상처 낸다. 그러나 즉시 같은 사랑으로 이번에는 자신을 상처 낸다. 우리도 하나의 마음을 사랑의 상처로써 상처 낼 때 반드시 홀로 자기도 상처 내는 것이다. 영혼은 하느님께서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계심을 보면 즉시 같은 상처를 받는다. 하늘의 애인은 술람밋을 향해서 「너는 내 마음을 상처 입혔도다(“나를 때리고 상처 내었으며”-아가 5,7)」한다. 그러자 술람밋은 「내 지극히 사랑하는 분께 말해다오. 나는 사랑에 상처 입었노라.(“나의 연인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주어요.”-아가 5,8)」라고 외친다.

꿀벌은 남에게 상처를 줄 때 반드시 자신도 상처 입고 죽는다. 영혼이 구세주께서 사랑 때문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위에 죽기까지 상처 입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위해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구세주의 상처가 애처롭고 사랑 깊고 참혹한 것인 이상, 우리의 상처도 애처롭고 사랑 깊은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주의 사랑과 그 죽음이 요구하는 정도로 사랑할 수는 없다.

하느님은 영혼의 사랑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사랑을 모르시거나 혹은 의심하시는 듯 다루시는 때가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랑의 상처이다. 친애하는 테오티모여, 영혼은 하느님께서 의심하는 것처럼 하시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경우, 더할 수 없는 고뇌를 당한다.

불쌍한 성 베드로의 마음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넘치고 있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모르시듯,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라고 하셨다. 사도는 대답하기를,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라고 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거듭 물어보셨다.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사도는 대답했다. 「경애하올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그런데 양선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처럼 「베드로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이 불쌍한 마음을 상처 주신 것이다. 그는 대단히 “슬퍼하며” 사랑 깊이, 그러나 슬픔에 차서 부르짖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라고.

어느 날 마귀 들린 사람을 위해 구마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악마는 그 이름을 대어야 했을 때, 「나는 사랑을 박탈당한 불행한 자」라고 대답했다. 거기에 입회하고 있던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St. Catharine of Genoa는 마음이 산란해지고 가슴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사랑의 박탈’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악마는 하느님의 사랑을 대단히 미워하고, 그 증거를 보거나 그 이름을 듣거나 하면, 즉 십자가를 보고 예수의 이름을 들으면 두려워 떠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랑의 박탈을 나타내는 표를 보거나 그와 같은 말을 듣거나 할 때 슬픔과 공포에 떤다.

성 베드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자기가 얼마만큼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모르실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가?」하고 거듭 물으시니, 그 안에 얼마쯤 의혹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대단히 슬퍼했던 것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로 결의하고 있을지라도, 조금도 열성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다시 없는 냉담이 엄습하며, 모든 것이 마비되고 항상 현저한 불완전에 떨어질 만큼 연약함을 느끼는 수가 있다. 테오티모여, 이와 같은 영혼은 완전히 상처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하느님께서는 모르는 척하시고 마치 당신에게 속하지 않는 피조물처럼 버려두시기 때문이고, 영혼은 이 때문에 무척 애처로운 자가 되어 버린다. 또한 영혼은 그 결점, 그 방심, 그 냉담 가운데서 주님이 「너는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으랴? 네 영혼은 나와 함께 있지 않노라」하는 질책을 하시는 것 같이 느낀다. 이것은 영혼에 화살과 같이 그 마음을 꿰뚫는다. 그러나 이 화살은 사랑에서 발하는 슬픔의 화살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녀가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로서 고뇌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 사랑의 상처는 전에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추억만으로 생기는 수가 있다. 삼십 년 동안 이단자였던 저 위대한 성인은 「옛것이며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당신을 사랑함이 어이 이리 늦었던고」라고 했다. 지상至上의 선을 사랑하지 않은 채, 전 반생을 보낸 자의 새 생활에 있어, 과거의 생활은 무서운 것이다.

사랑은 또 가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함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상처받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제 열정이 저를 불사르니 저의 적들이 당신 말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시편 119,139)라고 한 그 사람 같이 숨지듯 탄식하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이것을 들은 한 선량한 사람은 아마도 누가 살해되지나 않는가 싶어 도우려고 달려갔다. 그런데 혼자 있으므로 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우십니까?」 그러자 성인은 「나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허다한 고통을 겪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일을 생각지 않음을 보고 울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또 하염없이 울었으며 그 선량한 사람도 그와 함께 탄식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받은 상처는 그 아픔이 상쾌하며 이것을 느끼는 사람은 모두 여기에 동의하고 온 세상의 어떠한 즐거움과도 바꾸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감탄할 만한 일이다. 사랑에는 아픔이 없다. 만일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사랑하는 아픔이다. 어느 날 화살 끝에서 작은 불꽃이 나오는 금화살을 가진 한 천사가 이 화살로 복녀 데레사 수녀Bl. Mother(St.) Teresa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것을 잡아 빼려고 할 때 수녀는 내장을 쥐어뜯는 것 같아 아픔이 너무도 심하므로, 다만 가냘픈 신음만 낼 뿐이었으나, 이 아픔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녀는 결코 여기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위대한 제노바의 성녀가 개심의 시초에 하느님께서 그녀 마음에 쏘신 사랑의 화살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일변하고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서 죽은 것처럼 되어, 오로지 창조주를 위해서밖에는 살지 않았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는 애처로운 만리향의 꽃다발(“엔 게디 포도밭의 헤나 꽃송이”-아가 1,14 *엔 게디는 ‘새끼 염소의 샘’이라는 뜻을 지닌 이스라엘 유다 광야의 동쪽, 사해 서쪽 해안가에 있는 오아시스, 헤나의 강렬한 향기는 사랑의 여신이 다가옴을 드러낸다고 고대 가나안인들은 믿었다. 송이 지어 피는 그 꽃은 여인들의 치장에 쓰였다)」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애처로운 꽃다발은 그 사랑하는 자의 젖가슴 사이에 매달리는 연인이며, 모든 연인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받으시는 분이시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 제6권 14장 *변기영 신부님의 번역을 따왔으나 현대어로 인용과 맞춤법을 수정하였음, 이미지-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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