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체득한 우울증 극복 방법이 있다. 자신을 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처지고 우울해질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타인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라는 뜻이다. 타인을 도우면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은 도움을 받고, 돕는 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깊은 성취감이라는 축복을 얻어 우울증이 치료된다. 재키 왈드만Jackie Waldman 등이 쓴 <내어줄 용기가 있는 십대들Teens With the Courage to Give>이라는 책에서 이런 노력은 누구에게서나 열매를 맺는다고 확인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실행을 효과적으로 해내려면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다른 이의 필요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내가 축복을 얻자고 남을 돕는다고 나서면 자칫 나의 축복을 위해 남을 나의 이익을 위한 디딤돌로 삼고 나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되면서 이타利他가 아닌 이기利己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타인을 돕는 선행의 동기는 그런 뜻으로 순수해야 한다. 타인의 아픔과 필요를 나의 아픔과 필요로 공감하고, 안쓰러운 그를 위해 우러나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그저 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4-27)라고 하신다.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그 자리에 놓는 것, 상대방의 이득이 나의 이득이고, 상대방의 필요가 나의 필요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행실”이고 그 갚음으로 그리스도인은 구원된다.
너를 보면서도 나에게 집중하면 나에게 가려진 너를 본다. 온전히 나를 잃고 너를 얻는 것이 결국 나를 얻는 것이고 내가 사는 길이다.
어떤 우울증을 겪는 친구에게 겨우 병원에 함께 가주고 기도해주는 것 외에는 큰 도움이 못되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꾸준히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 기쁘다. 어제는 병원에서 내시경을 하는데, 매번 수많은 환자를 같은 방에서 내시경 준비하는 간호사가 내 침대 머리를 반대 위치로 놓고 실수를 인지한 후, 가까스로 침대를 돌려 위치를 바꿔 놓았다. 불안과 함께 순간 기억을 잃고….간호사가 나를 한참 깨운 후에야 일어났다. 지인의 도움으로 병원을 떠난 나는, 큰 고마움을 느끼며 하느님께 혼자가 아닌 우리를 만들어주시어 그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어떤 우울증을 겪는 친구에게 겨우 병원에 함께 가주고 기도해주는 것 외에는 큰 도움이 못되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꾸준히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 기쁘다. 어제는 병원에서 내시경을 하는데, 매번 수많은 환자를 같은 방에서 내시경 준비하는 간호사가 내 침대 머리를 반대 위치로 놓고 실수를 인지한 후, 가까스로 침대를 돌려 위치를 바꿔 놓았다. 불안과 함께 순간 기억을 잃고….간호사가 나를 한참 깨운 후에야 일어났다. 지인의 도움으로 병원을 떠난 나는, 큰 고마움을 느끼며 하느님께 혼자가 아닌 우리를 만들어주시어 그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