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25-30(연중 제14주일 ‘가’해)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by Frangi Giovanni

이른바 ‘파견설교’라고 알려지는 마태오복음 제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정하시고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며 당부하는 말씀들을 들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11장과 12장에서는 예수님을 두고 대단한 논란이 있었으며 긴장 국면이 이어졌다는 내용을 듣는다.

11장의 첫 대목에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으로 보아 요한이 예수님께 믿음이 없었다기보다 이미 요한이 지니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고 쇄신하기 위한 요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고, 동시에 이 질문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방식을 놓고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시작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질문에 답을 하시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긴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로 알아보면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로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금욕자의 모습으로 엄한 생활을 할 때는 세례자 요한이 “마귀가 들렸다”고 하더니, 이제 예수님 당신이 와서 죄인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자비의 모습을 보이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는 세대를 개탄하신다.(참조. 마태 11,16-19) 또한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코라진…벳사이다…카파르나움” 같은 도시들이 복음을 전해 듣고도 “회개”의 표시를 보이지 않는 것을 한탄하신다.(참조. 마태 11,20-24)

오늘 복음은 11장의 마지막 대목(마태 11,25-30)으로서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①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리신다. 아버지께서 가난한 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② 당신과 아버지 사이의 내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③ 우리에게 안식을 얻게 해 주시려고 당신께로 오라고,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1. “그때에…아버지!…감사드립니다.…그렇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대목 역시 무거운 분위기로서 예수님의 전도 활동과 사목이 시험대에 올랐으며 혹시 실패하지나 않을까 염려한 긴장된 상황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암시라도 하듯이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대목을 기술하면서 “그때에”라는 말로 때를 강조하며 시작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영광스러운 찬미와 확신을 담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실로 하느님을 향한 탄식의 외침이 아니라 찬미와 찬양을 드리는 고백이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신뢰를 담아 하느님을 “아버지”, 곧 예수님의 언어인 아라메아어로 “아빠”라고 부르신다. 단순한 호칭으로 보이는 이 호칭에 온유와 사랑, 그리고 자애가 모두 담겼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요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지극히 높으신 분일지라도 그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부성애로 알아 모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주님”께 말씀을 드린다.

그렇게 한없는 신뢰와 애정을 담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분께 고백한다. : ‘아버지,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의 뜻과 당신의 업적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 놓으셨던 것들을 이제 스스로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서술어나 be동사를 생략한다든가 말하는 내용 자체가 행동을 지칭하는 등의 예수님의 언어인 셈족 언어의 특징을 고려하면서 이 기도문을 읽어야 한다. 이 기도문을 읽다 보면 사실 이미 예수님의 말마디들 안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을 하느님께서 단죄하시고, 무식한 철부지들을 드높이신 것처럼 보인다. 또 하느님께서 심오한 진리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셨고, 반면에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 미소한 이들에게는 알려주신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그렇지 않다. 셈족의 언어 표현 방식은 말의 전개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체가 그저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함께 하느님의 행위를 직접적이고도 강하게 묘사하고자 할 뿐이다.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탈출 10,20)는 기록에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전달자를 통해 파라오에게 구원의 말씀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완고해져 이를 거절하였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거절한 책임은 충만한 자유와 각자의 책임 안에서도 마음이 굳어버린 파라오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읽어야만 그 뜻이 올바르다.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문을 다시 읽으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지혜를 감추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에게 지혜를 밝히셨는데도 그들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귀와 마음을 완고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주님…이것을 감추시고…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의 뜻이다.

우리도 이런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지혜롭다는 자들, 세속적으로 지혜를 얻었다는 자들, 지적으로 연마하여 세속적 지혜의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칭송받는 이들 중 하나라고 자처하면서도, 복음에 마음과 귀를 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 중 하나는 아닐까? 사도 바오로께서도 세상의 현자들이나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와 같은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해야만 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1코린 1,18.20) 복음을 전한 결과는 미쳤다는 반응과 메아리로 돌아왔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가난한 자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희생된 자들, 인구통계학적으로 수치에 잡히지 않는 자들이었던 반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고상한 자들, 세상의 엘리트들, 성공했다는 자들은 복음을 거부하였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1코린 2,8) 하는 말씀 그대로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마태 11,26) 한다. 당신을 섬기는 겸손한 이들을 살피시고, 작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아시며, 가난한 마음 안에서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는 이를 가여워하시는 분께서는 미소한 이들을 위한 구원과 구세주를 숨겨 놓았던 장막이 시원하게 걷혀 다시 드러나기(계시-revelation < re-velation 베일veil을 걷어내다)를 원하셨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바라보시며 진복팔단(참조. 마태 5,1-12)을 말씀하셨고, 그들을 만나셨으며, 그들을 맞아들이셨고, 그들에 대한 신뢰와 해방을 강조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체험이었다. 예수님과 복음에 적대감을 가졌던 수많은 사람과는 달리 이 미소하고도 소수였던 이들이 결국 예수님을 믿었고 축복을 얻었다. 복음이 선포되어 수많은 남녀 신앙인이 생겨나는 자리는 이처럼 역설의 현장이다.

이것을 감추시고”(마태 11,25)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춘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본질적으로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는데”(요한 1,18) 하느님 아버지께서 믿는 이들에게 아드님 예수님에 관해 밝혀주신 계시이다. 이 계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13장에서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과 파견은 이처럼 실패와 성공 속에서, 의미 깊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2.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이어지는 복음의 대목은 누군가가 ‘마태오가 빠진 요한계 문헌의 불구덩이’라고 묘사했던 위대한 계시 대목이 된다. 훗날 교회 안에서 신학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우쳤던 내용들을 뒤로하고 여기서는 단순하게 예수님의 자기 계시라는 형태로만 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두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시기까지 당신 홀로 아시는 아드님 예수님께 모든 것을 넘겨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을 온전히 아신다.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왔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알게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정체와 그분과 하느님과의 관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에 관한 계시이다. 27절의 이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마태오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계시의 정점을 만난다.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넘겨받으신 예수님’이라는 바로 이 계시가 제자들에게 넘겨진 신비이다. 제자들이 찬미를 드리고, 침묵 속에 받아들여야 하며,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이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면서 매일 살아야 하는 신비이다.

3.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렇게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하시며 당신 말씀을 듣는 이들을 초대하신다. “네 영혼이 쉴 곳”(예레 6,16)을 당신에게서 찾으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찾는 이들,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싶은 이들, 하느님과 통교하고 싶은 이들, 하지만 인간적으로 못 배운 이들, 종교적으로 홀대 받는 이들, 윤리적으로 억압당하는 이들, 아는 대로 살아볼 길이 없는 이들을 당신께로 부르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지우실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며 즐거운 것이어서, 수고할 필요가 없이 오직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을 말씀하신 그대로 참행복을 사신 분이시다. 마음이 가난하신 분, 슬퍼하며 눈물로 다른 이들을 공감하실 수 있는 분, 온유하신 분, 의로움으로 주리고 허기진 분, 자비로운 분, 마음이 맑고 깨끗하신 분, 평화를 이루시는 분,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분이셨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믿고 그분께 간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모든 이를 환대하시는 스승과 예외 없이 하나가 되고 위로를 얻으며 통교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짐과 멍에를 그분 앞에 가져갈 수 없는 사람도 그저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하면서 당신 팔에 안아 당신 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는 주 예수님께 갈 수 있다. 쉰다는 것, “안식”은 예약이 없더라도 언제나 가서 기댈 수 있는 사랑하는 분에게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자들이 ‘힘센 자들과 부자들의 착취로 약한 자에게 지워진 짐’이라 해석하고, 심리학자들이 인간 각자 내면의 상처로 지게 된 십자가로 해석하는 “멍에”와 “짐”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리 무거운 짐일지라도 ″사랑″으로 지는 가벼운 멍에』라고 해석한다. 주님의 멍에는 명령하고 가르치려 들고 감시하고 관리하고 경쟁하고 양보를 모르는 그런 멍에가 아니다. 환대, 사랑, 자비, 관심, 형제자매애의 멍에이다. 쉬운 멍에가 아니고 불편한 멍에일지라도 더욱 사랑받으며 더욱 사랑하기 위한 멍에이다. 내가 혼자만 지는 것같이 외로운 멍에처럼 느껴져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옆에 오신 예수님께서 기꺼이 함께 나누어 짊어지시는 멍에이다. 그러나 세상의 멍에는 의무적으로 져야 하는 멍에이므로 무엇인가를 지켜야만 한다는 강박이 따라붙는다. 설령 그것이 사랑으로 이름 지어진 멍에라 할지라도 숙명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위해 주어야만 하고 받아야만 한다는 수고로움이 상존한다. 이 멍에의 비밀은 예나 지금이나 하늘 나라의 작은 이들, “철부지들만이 알아차리는 신비이다. 아멘!

2 thoughts on “마태 11,25-30(연중 제14주일 ‘가’해)

  1. 아빠는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느꼈던 어릴 적 7살의 나이, 아빠에게 뛰어가 뭐든 청했고 들어주신 모든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청을 드리며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또 다른 아버지가 있어 참 행복하다.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아버지, 철부지만이 알아 차리는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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