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묵상

피터 존 카메론Fr. Peter John Cameron, op이라는 도미니코회 소속 사제(우리나라의 ‘매일미사’와도 같은, 그러나 훨씬 다양하고 많은 기도나 자료 등이 담긴 미주 지역에서 유행하는 ‘마니피캇Magnificat’이라는 월간지의 전前 편집장이었던 분)께서 가톨릭 웹사이트 ‘알레테이아Aleteia’에 2023년 4월 1일 자로 기고한 글(https://aleteia.org/2023/04/01/heres-a-7-step-pattern-for-growing-in-holiness/)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제목부터 달리하고 첨가하여 윤색하고 정리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이미지 역시 로렌스(Fr. Lawrence, op)라는 도미니코회 사제의 것으로서 Aleteia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1. 욕망의 수준과 회심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수난기의 본격적인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유다 이스카리옷과 군대, 그리고 성전 경비병들을 향하여 “누구를 찾느냐?”(요한 18,4.7) 하고 물으신다. 같은 복음인 요한복음 첫 장에서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는 “무엇을 찾느냐?”(요한 38) 하고 물으신 다음 그들을 첫 제자들로 삼으신다. ‘무엇’이라는 복음 초반의 질문이 복음 후반부에서 ‘누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 상당한 기간을 지낸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병행구) 하고 물으신다. 4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싶어 했으며 제자들도 그러했으나,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해답을 얻어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라면서 제4복음서의 마지막 장은 끝난다.(참조. 마태 21,10 마르 1,24 마르 4,41 루카 4,34;5,21;7,49;8,25;9,18.20;9,9;20,2 요한 4,10;5,12-13;6,68;8,25.53;9,36;12,34;20,15;21,12) 복음은 시종일관 “누구”,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그분의 신원을 밝히는 것만을 관심사로 삼는다.

인간의 욕구와 갈망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우리가 사는 인생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욕구와 갈망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하느님을 충분히 갈망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우리의 갈망과 욕구를 깊이 인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수난의 신비 역시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신 그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사랑의 신비를 알아듣지 못한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St. Thérèse of Lisieux(1873~1897년)는 “영혼들은 정확히 하느님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그것만을 그대로 얻는다.”라고 말한다. 현세의 복락만을 구하면 그것만을 얻을 것이고, 영원한 구원을 얻고자 하면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2. 인간과 죄의 허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빵, 세상의 빛, 양들의 문, 착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포도나무”라고 아주 분명한 단문(I AM.)으로 선언하신다.(참조. 요한 6,35;8,12;10,7;1,11.14;11,25;14,6;15,1.5) 그런데, 그 해의 대사제인 한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던 곳에서 몇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베드로 사도는 일개 문지기 하녀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라고 묻자 “나는 아니오.(I AM NOT.)”(요한 18,17.25)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만다. 예수님의 자기 선언과 베드로의 자기 부인否認 사이 어디쯤인가에 우리 인간의 죄가 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1347~1380년)는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두려움의 해결책은 피조물인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존재이며, 무엇인가를 우리가 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허물과 죄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한번 알게 되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선하심도 알게 된다.”라고 말한다.

시몬 베드로도 그랬다. 시몬 베드로 역시 유다 이스카리옷과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자기의 배반과 비겁함을 절망 속에 그대로 가두어두지 않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 루카 22,62) 베드로는 하느님을 떠나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면서, 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한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마태 26,34 루카 22,34)라고 했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세 번이나 거듭하여 주님을 향해 사랑을 고백한다.

3. 유혹과 방황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으시는 장면(요한 18-19장)을 유심히 보면, 요한 복음사가는 빌라도가 갈팡질팡 오락가락하며 사람들 앞이나 예수님 앞, 그리고 총독 관저 안과 밖을 무려 일곱 번이나 들락거리고 있음을 묘사한다.(참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18,29절,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18,33절,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18,38절,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19,1절, “빌라도가 다시 나와”-19,4절, “내가 데리고 나오겠소.…밖으로 나오셨다”-19,4.5절,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19,9절,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19,13절) 당시 현장의 최고 실력자요 권력자였던 빌라도였지만 예수님 앞에 선 그의 태도는 인간의 두려운 방황과 우유부단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도 종종 예수님 앞에서 그처럼 흐리멍덩하게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세상의 유혹과 사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나 생각이 진리로부터 우리를 가로막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하고 물었던 물음이 한편에서는 비아냥이라기보다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님을 풀어줄 방도를 찾으면서 사람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 하고 말한다. 이때 “이 사람”, 곧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이시다. 죄 없는 인간,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본뜬 완전한 인간, 이 땅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던 인간의 완성과 생명의 원천이시다. 빌라도가 뺨 맞고 채찍질을 당하며 가시관을 쓴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자, 이 사람이요!” 했던 장면은 마치 하느님께서 ‘너희 인간이 너희 본래의 모습과 하느님께 저지른 모습을 보라’고 하시는 듯하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것을 스스로 당신 몸에 짊어지신 하느님, 인간이 구원을 찾아야 할 바로 그분을 보라고 하는 듯하다. 그 순간이 바로 유혹이 믿음과 확신으로 전환되고 대치되어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한 18,6)라고 외치자 빌라도는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요한 19,14) 하고 말하지만, 군중은 “없애 버리시오.”(요한 19,15)를 거듭 외친다. 우리가 우리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고, 없애버리는 것은 우주의 중심인 우리 자신을 끌어내리고 없애버리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이해에 고집스럽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우리의 임금을 보려고 움직이는 순간 진리가 모든 것을 바꾼다.

4. 그리스도의 고통과 교회

성금요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고난苦難·고뇌苦惱(agony)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사탄이 잔치를 벌이는 지옥(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888~1948년)’의 고통을 앞두고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니”(마태 26,36-46와 병행구)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이때의 상황을 묘사하는 ‘agony’라는 어휘는 일상 어휘로 ‘버둥거리는 상황’을 뜻하는 영어 단어 ‘struggle’에 해당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어 아고니아(ἀγωνία)에서 온다. 아고니아의 어근은 agon(ἀγων)이다. 이는 사람들이 경쟁이나 시합, 혹은 경연에서 승리하기 위해 함께 운집하고 집합한 상황이다. 이를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말할 때 이는 ‘교회’이다. 교회는 인간과 세상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승리를 경축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영적 전쟁의 승리를 도모하고자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성모님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두고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또 제자 요한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는 말씀을 남기신다. 그래서 요한은 “그때부터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주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속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속할 것인지를 알고 이해한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이의 어머니시다. 성모님은 모든 것이 생명을 얻어 살게 하시는 바로 그분의 어머니이시다.(복자 이그니의 게릭Bl. Guerric of Igny, 1070/80~1157년)”

5. 고통의 은총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은총은 항상 상처를 통해 들어온다.(쥴리안 캐론Julián Carrón 신부, 1950~)”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지만 고통을 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고통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지만, 세상에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우리는 고통을 줄이고 고통에 맞서 싸우고자 노력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고통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에서 도망침으로써 고통을 피하려고 할 때, 또 진리와 사랑과 선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수고를 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는 공허한 삶으로 떠돌게 됩니다. 그런데 삶에는 아픔이 거의 없을지 모르지만 무의미함과 고독으로 훨씬 더 큰 어둠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치유되는 것은 고통을 비켜 피하거나 고통에서 도망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며 무한한 사랑으로 고통받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고통의 의미를 찾는 능력을 통해서입니다.…인간다움의 참된 척도는 고통과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중요하게 판가름 됩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고통을 겪음(com-passio)’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안으로 견디도록 돕지 못하는 사회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베네딕토 16세,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2007년, 36.37.38항)” 고통을 회피하려고만 할 때가 바로 우리 삶이 공허하게 표류할 때이다. 고통을 이리저리 피하려고만 살고 그렇게만 산 사람은 다른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완고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무관심이라는 현상은 고통과 고통이 지닌 거룩한 가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혼의 타락은 고통받을 수 있는 능력의 상실로 구성된다.(베르나노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즈카 12,10) 하는 말씀처럼 “우리가 십자가 위에 달려 창으로 찔리신 이를 바라볼 수 없다면 하느님을 바라보는 대신 인간의 비참함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시몬 베일Simone Weil, 1909~1943년)”이다. “예수님의 상처는 찌른 자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회개하고 그 열린 옆구리의 상처에 들어가 그 상처 안에서 천상의 복락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될 것인가 하는 선택을 우리 앞에 남긴다.(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1225~1274년)” “하느님께서는 영혼에 상처를 입히신다. 그 상처가 바로 사람의 아드님이시다. 그 상처로 우리가 열린다.(니싸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of Nyssa, 335?~395년)”

6. 하느님과의 일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다.”(요한 19,38-42)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몸 안에 받아 모시는 영성체이다. 성체성사는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실제이다.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의심과 번민에 몸과 영혼이 사로잡힐 때라도 바로 그 몸과 영혼의 구원이 성체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겨질 때라도 바로 그때가 주님의 엄숙한 약속, 거듭된 약속의 성체를 받아먹고 내 몸 안에 모시어 그에 의지해야만 할 때이다.(프랑수아 모리악François Mauriac, 1885~1970년)”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도 인간에게서 얻을 것이 없으시지만 인간은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얻어야 한다.(성 이레네오St. Irenaeus, 활동 연도-130/140?~202년)” 그분과의 일치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다.

7. 희망·달려감

“새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9,42) 무덤은 감실이다. 우리가 흠숭과 찬미를 드리는 지성소이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신적 위격은 죽음으로 분리된 그 영혼과 육신을 계속 지니고 계셨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참조. 사도 13,37(가톨릭교회교리서, 630항)” 인간의 상황이 아무리 비참하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으신 무덤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갈 데까지 다 간 돌무덤의 맨 밑바닥에서도 말이다.

사람은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 일지라도 가라앉고 있다거나 바닥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떠나버렸고 모든 것을 앗아갔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막막함, 그래도 그것은 이제 모든 것이 비로소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신神의 신호이다.(베르나노스)”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죽음, ‘끝’이라는 체험은 우리에게 죽음을 마주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수많은 죽음의 연속을 통해서 완성에 이른다.”라고 대 바실리오 성인St. Basil the Great(330~379년)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정말, 진짜로 비참해지면 하느님께로 갈 수밖에 없다.(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 모두가 지치고 슬픔에 절어 실망만을 안고 허탈하던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 제자들은 무덤에 간다. 그러나 제자들은 곧바로 “달려간다.”(참조. 요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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