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

‘꽃자리’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함께 사는 수녀님께 부탁해서 외람되이 첫 연과 마지막 연의 반복되는 부분만을 책갈피 크기로 만들고 복사해서, 코팅까지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 대신 몇 년을 두고 나누어주었던 시이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具常, 1919~2004년) 선생님께서 지으신 시이다. 내가 이 시를 명함 삼은 것은 단순하면서도 내용이 깊어서였다. 또 주로 애들 만나면서 사는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들만 주로 만나다 보니 애들 만나는 현장에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만날 때 반갑고 고맙고 기쁘게 만나야 한다는 뜻이었고, 아이들을 꽃 삼아 꽃 피우되 시장에 잘 팔리는 그런 꽃이기보다는 민들레, 채송화, 나팔꽃들처럼 시장에 내다 팔리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고유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으로 피어나게 해야 한다는 사족을 달아서 그렇게 했다.

몇 해를 두고 이 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도 내심 구상 선생님의 시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평소 읽었던 구상 선생님의 시詩와는 어딘지 다소 거리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 시의 내력을 구상 선생님께 여쭤볼 수 있으면 하던 차였는데, 마침내 의외의 자리에서 해묵은 소원을 이루었다. 내가 명함으로 만든 그 대목을 예서체로 단정하게 쓴 조그만 액자를 걸어놓으신 장익(張益, 1933~2020년) 주교님의 사무실에서였다. (돌아보면, 주교님께서는 오랜 시간 나를 참 대견하게 여겨 주시고 많은 사랑을 주셨다) 주교님과 말씀을 나누다가 주교님께서 구상 선생님과 가까우심을 떠올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에 걸린 그 시에 대해서 아시는가를 여쭈어보았다. 주교님께서는 좀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히 알고 계셨다. 침실 쪽 책꽂이에서 책 세 권(오상순 詩集 허무혼의 선언-자유문학사; 具常 編, 詩를 體現한 시인 空超 吳相淳 評傳-자유문학사, 1988년; 空超 吳相淳 詩選-후기를 구상 선생이 쓴 유고집)을 들고나오시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필자는 책을 아끼시어 빌려주지 않으시는 주교님으로부터 책 제목만을 적어와 즉시 국회도서관에서 복사본을 만들어다가 탐독했고, 아직도 그 복사본을 추억으로 가지고 있다)

‘꽁초’ 선생으로 잘 알려진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1894~1963년)이라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평생을 초인超人으로 기인奇人으로 살며 몇 편의 시만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분 살아생전의 소일이 담배를 무던히도 태우시며 사람 만나는 일이었다. 그분께서는 항상 공책을 앞에 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반갑고 고맙고 기쁘네’ 하시면서 뭔가 한 소리씩을 쓰게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처자식도 없이 재산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고 당신 쓰신 시 몇 수와 만나는 사람마다 선생님께 써 드린 공책들만을 남기고 ‘내가 자유에 얽매여 살았구나’ 하는 임종게로 이 세상을 뜨셨다. 6월 3일 그분 기일이 오면 구상 선생님은 공초 선생님 묘소에 다녀오셨다. 꽃자리라는 시는 구상 선생님께서 존경하는 공초 선생님의 삶과 평상시 말마디를 앞뒤에 놓고 선생님의 임종게를 염두에 두어 중간 대목을 쓰셨다. 장 주교님께서는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이 설명을 들으셨다고 했다.(*참고. 한국 전쟁 후 조계사에 기거하시던 공초 선생님께서는 낮에 연극인 이해랑이 운영하던 명동의 청동다방에 머물고 담배를 태우시며 여러 사람을 만나셨는데, 이 만남을 기록한 서명첩이라 할 수 있는 공책 195권의 이른바 ‘청동산맥靑銅山脈’을 남기셨다. 지금은 애석하게 장주교님께서도 세상을 뜨셨다.)

 
空超吳相淳碑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魂(공초선생묘비)

공초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 두 분의 아름다운 우정이 부럽다. 문득 이 시를 제멋대로 사용하여 두 분 큰 선생님께 어쭙잖은 누를 끼치지나 않았나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나도 감히 두 분께 큰 은혜를 입었구나 싶다.(200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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