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의지가 지닌 여러 가지 애정에 대하여
지성적 또는 이성적 욕구를 바로 의지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도, 육감적이며 감각적인 욕구에 못지않게 적지 않은 충동이 있다. 그러나 저 감각적인 것은 흔히 격정이라 부르고, 이 지성적인 것은 보통으로 애정이라고 부른다. 철학자들, 더욱이 외교인 철학자들도 때로는 하느님이 나, 그들의 나라나, 덕행이나 학문 등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악습을 미워하고 명예를 추구하며, 죽음이나 누명을 회피하려다 못하고 절망에까지 이르며, 지식을 열망하고, 죽은 후에 행복하게 잘 머무는 것을 보고자 한다. 그래서 덕의 길을 가로막는 난관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용기를 내며, 책망을 무서워하고 과오를 피하며 공공연한 모욕을 복수하고, 폭군을 반대하며, 아무런 이익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이런 일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충동은 다 이성적인 면에 속하는 것이니, 감각이나 육감 따위는 이러한 대상에 적용될 능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내적 충동은 지성적이며 이성적인 욕구이지, 결코 감각적인 격정이 아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우리의 육감적 욕구 또는 탐욕 속에서 그러한 격정을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더욱이 이성적인 욕구, 또는 의지 속에서, 우리가 동시에 느끼는 그 이성적 애정에 상반되는 감각적 격정을 자주 체험함이 사실이다. 성 예로니모St. Jerom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있다. 그 청년은 자신을 육체의 쾌락으로 불태우듯 유혹하고 있는 못된 여자에게, 자기의 이(齒)로 혀를 끊어 그 얼굴에 뱉었다고 한다. 이 경우 강제로 육체의 쾌락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그는 육체의 쾌감에 극단으로 상반되는 불쾌감을 동시에 의지에서도 느끼고 실행한 것이니, 이 얼마나 명백하게 양자의 관계가 드러난 것인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우리 의지가 만들어 놓고 우리를 머물게 하는 위험 속에서 떨고 있는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감각적 욕구가 쾌락을 취하고 있고 사랑은, 불쾌한 영신적 선을 취하고 있는 즐거움을 미워하고 있는가? 이러한 경우에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경험하는바, 정신과 육신 간의 전쟁이 생긴다. 즉, 우리 감각기관의 지배 아래에 있는 외적 인간과 이성의 지배 아래에 있는 내적 인간 사이에 있는 투쟁이, 하와 또는 탐욕을 쫓는 옛 아담과 천상적 지혜와 거룩한 이지理智를 따르는 새 아담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신국론 XIV), 지혜로운 자들도 격정을 가질 수 있고, 스토아파에서 부르는 선정(善情, eupathies, good passions이란 eu-善·良·好 + paties-情·感…, sympathia-好感과 조금 다른 뜻으로서, 행복하게, 다행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의미한다)이라고 하는 애정, 또는 좋은 격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토아파에서는 부정하고 있으며, 치체로Cicero는 이러한 것을 상정(常情, constancies, =Constantia이란 치체로가 쓰던 용어로서, 사람의 심중에 한결같이 있는 주관적인 감각 주체가 외부에서 닥쳐오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흔들림 없이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Tuse. Ⅳ권 14절, -tranquillitas status animae 참조)이라고 불렀다. 스토아파의 이유를 들어보면, 현자는 무엇을 탐하지 않고 원할 따름이고, 즐거운 것에도 반하지 않고 누릴(not glee but joy) 따름이라는 것이며, 또 무서움이 없는 대신, 다만 미리 보고 조심함으로써 현자는 이성에 의해서, 이성을 따라 합리적으로 밖에는 결코 충동을 받거나 느끼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호히 부정하고 있는바 현자는 어떠한 슬픔도 느낄 수가 없으니, 슬픔이란 막 닥친 악을 보는 것 외에 별것이 아니며, 그들의 격언을 따라, 현자는 자기 자신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상처와 해를 받을 수 없으므로 실제로 현자에게는 아무러한 악도 올 수 없다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정말 저들은 인간 안에서 선정善情, 또는 좋은 애정을 인간의 합리적 면에서만 봄으로 과히 틀렸다고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인간의 감각적 부분에까지 격정이라는 것이 없고 슬픔이란 것이 현자의 마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들 자신이 우선 위와 같은 격정에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두고라도, 예컨대, 우리의 이웃이 당하고 있는 악으로부터 그를 구하여 내고자 하는 열망을 우리의 심중에 넣어 주는 덕스러운 슬픔이라 할 수 있는 「불쌍히 여김」과 같은 격정을 지혜라는 것이 어떻게 없이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이교인들 중에 가장 지혜로웠다는 이들 중의 하나인 에피텍투스는(Epictetus는 본래 종의 신분으로 있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스토아철학을 비롯한 모든 철학에 전념한 자로서 2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윤리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Enciclopedia 참조) 이러한 오류, 곧, 현자에게는 격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며, 성 아우구스티노가 입증하고 있듯이, 이 문제에 있어 다른 철학자들과 스토아파와의 차이점이란 단순히 말장난과 말씨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이지적 부분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애정은 그 대상이 고상하면 할수록 또 그런 감정이 정신의 높은 단계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고상하고 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애정들이 우리 감각기능의 경험에 의해서 획득된 종합적인 결론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인간적인 지식에서 추리되어 나오는 것들이고, 또 다른 것들은 신앙의 원리에서 나오며, 끝으로 또 어떤 것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감정에 그 기원을 두는 것도 있으며 혹은 하느님의 뜻에 의합한 애정도 없지 않다. 그런데 첫째의 것들은 자연 본성적인 애정이라고 하겠으니, 건강이나 의식주의 마련이나 달갑고 상통하는 대화 같은 것을 열망치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둘째 등급의 애정들이란 이성의 영신적 지식 위에 다 함께 기초를 두고 있으니, 합리적인 이성적 애정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애정에 의해서 우리의 의지는 마음의 평정과 윤리적 덕행과 진정한 영예와 영원한 것에 대한 관상을 찾아 구하도록 자극받게 된다. 애정의 셋째 등급에 속하는 것들은 그리스도교적인 것들이라고 이름하겠는데 왜냐하면 그 과정의 탄생이 바로 우리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먹고 행하는 가난과 완전한 정결과 천국 낙원의 영광을 포옹하게 하신다. 그러나 최고 등급에 속하는 애정들은 신神적이고 초자연적인 애정들이라고 불릴 만한데, 그 까닭은 하느님께서 친히 그 정情들을 우리의 정신에 부어 주시며, 그 정들도 어느 과정의 중재나 자연 본성적인 광명의 도움이나 중재가 없이 직접 하느님께로 향하며 하느님을 관망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영혼의 지성소에서 실천되는 동의와 감정을 따라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드림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초자연적 애정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신앙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관한 정신의 사랑이고, 또 하나는 후세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의 유익성에 관한 사랑이며, 끝으로 남은 또 하나는, 지극히 거룩하고 영원한 신성神性이 지니고 있는 최상의 선에 관한 사랑이다.
제6장
하느님의 사랑은 다른 여러 가지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의지는 인간 정신의 모든 다른 기능을 다스린다. 그러나 의지는 제가 지니고 있는 사랑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그 사랑은 의지가 제 스스로와 닮게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랑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최고 왕홀王䓤을 차지하며, 또 이렇듯 권위를 가지고 분리될 수 없도록 일치되어 하느님의 본성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만일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사랑이 주인이 아니라면 즉시 존재를 그치고 소멸하고야 말 것이다. 이스마엘은 자기의 어린 동생 이사악과 더불어 공동상속자가 되지 못하였었고(창세 21,10), 에사우는 제 아우의 종으로 봉사하게끔 지정되었었으며(로마 9,13),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에게서뿐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한테서도 경배를 받았으며(창세 43,26), 벤야민이라는 인격을 빌려서 자기 어머니한테서도 받았으며, 이것은 그가 어릴 때 이미 꿈속에서 미리 보았던 사실이었다.(창세 37,6-10) 그런데 나이 많은 형들이 동생들에게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사실에는 확실히 그 어떤 신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인간 마음이 지니는 모든 애정 중에 가장 끝자리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도께서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1코린 15,46)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막내둥이는 권위를 상속받았으며 자애심은 또 에사우와도 같이 그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영혼의 모든 다른 감정들뿐 아니라, 마치 그 막내의 형제들과도 같이, 다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경배하며 거기에 예속되어 있을 뿐더러 마치 부모 격인 지능과 의지도, 거기에 속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죄다 이 천상적 사랑에 종속되어 있으니, 이 사랑은 언제나 왕으로 있든가 아니면 없어지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만일 최상 전권으로가 아니면 다스리거나 지배하지 않으며, 다스리거나 지배치 아니하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은 초자연적 후손다운 아들들이었다. 자연적으로는 수태치 못하던 사라와 레베카와 라헬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힘으로, 즉 초자연적으로 수태하여 마침내 저들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써 저 세 동생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자기 형제들의 주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도 기적적으로 잉태되어 낳은 아기와 같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 인간의 의지가 그러한 사랑을 잉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모든 애정 위에 좌정하고 군림하듯이, 지성과 의지 위에도 군림한다.
영혼 안에는 초자연적인 다른 충동들, 예컨대, 공포, 신심, 강압, 희망 등이 있고, 이는 마치 에사우와 벤야민도 레베카와 라헬의 초자연적 아들들이었듯, 이러한 것들이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주권과 상속권과 우월권은 하느님의 사랑에게 있으니,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란 약속의 아들(갈라 4,28)과 같은데, 이는 하늘이 사람에게 약속되었다는 호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고 희망을 위해 준비된 것이지만 애덕으로 아니고는 주어지지 않았다. 신앙은 구름과 불로 된 기둥처럼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데, 구름과 불이란, 말하자면 광명과 암흑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망덕은 맛있는 만나로써 우리를 양육하지만, 애덕은 결약의 궤와도 같이 우리를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며, 이 결약의 궤는 우리를 요르단강으로 지나가게 하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심판의 과정이며,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된 천상적 복지福地에 있는 백성들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이며, 거기에는 신앙의 기둥도 더 이상 안내자도 쓰일 필요가 없겠고, 망덕의 만나(manna)도 더 이상 음식으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인간 경신의 가장 높고 가장 드높이 치솟은 데에 머물며, 거기서 그 사랑이 하느님의 신성神聖에 희생과 번제를 바친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자기 제사를 드렸음과 같이 또 우리 주님께서 칼바리아(라틴어-Calvary<Calvariae 혹은 Calvariae locus, 희랍어-골고타Γολγοθᾶ, 참조-마태 27,33 마르 15,22 요한 19,17) 산 위에서 희생의 번제를 드림으로써 그 드높은 곳에서 만백성을 순종케 하신 것처럼 이는 또한 영혼의 모든 기능과 애정의 작용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비할 데 없이 양순한 감미로써 다스리는데, 이는 사랑이 죄수나 노예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벅찬 기쁨과 즐거움으로 모든 것을 순종시키기 때문에, 사랑만큼 힘센 것도 없고, 사랑만큼 감미로운 것도 없는 것이다.
덕행은 영혼 안에서 그 여러 충동을 제어하고 조절하며, 애덕은 만덕의 으뜸으로서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조절한다. 왜냐하면 만사에 있어서, 첫 자리를 잡는 것이 다른 것들의 척도와 측량의 표준으로 이용되기 때문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상따라 당신을 닮도록 창조하셨고 따라서 당신 안에서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서, 사랑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정돈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