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의지는 감각적 욕구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그러므로, 테오티모여, 의지는 기억력과 지능과 상상력을 지배하기는 하되, 강제로 하지 않고 권위로써 지배한다. 그러나 가장이 자녀들과 종들로부터 항상 순종을 받지는 못하는 것처럼 의지도 언제나 틀림없는 순종을 받지는 못한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에 관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말씀하시듯이(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이하 ‘신국론’이라고 약칭함=De Cvitate Dei, XIV, 7) 그것은 우리 죄인들 안에 있는 탐욕, 또는 욕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속해 있듯, 욕정은 의지와 이성理性에 예속되어 있으니, 그 까닭은 여자들에게 이르신 바와 같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ㄴ) 그런데 카인에게도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창세 4,7) 죄악이 도사려 노린다고 함은 그에게 복종하고, 예속된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한다.(강론집 5권, De Quadr) “오! 인간이여! 너는 너의 능력 안에 있도다. 만일 네가 원한다면 너의 원수를 너의 종이 될 수 있게 하며, 만사가 다 네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욕망은 네 밑에 있으리니, 너는 그것을 지배하리라. 너의 원수는 바로 네 안에서 유혹의 감정을 일으킬 수 있으나, 네가 원한다면 너는 그에게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있도다. 네가 만일 욕망이 너를 죄로 이끌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때 너는 그 욕망과 죄의 밑에 있으리라. 그리고 욕망은 너를 다스리게 되리니, 누구나 죄를 짓는 자는 이미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로다. 그렇지만 네가 죄를 범하기 전에, 죄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너의 감각 안에, 다시 말해서, 너의 의지로서가 아니고 오로지 욕망에서만이라면, 너의 욕망은 네 밑에 있는 것이니, 너는 그 욕망을 지배할 것이다.”
황제는 선출되기 전에 즉 황제로 뽑히기 전에는, 유권자들이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황제의 품위에 그를 뽑아 올릴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나, 일단 선출이 되어 뽑히게 되면 오히려 그들이 저의 밑에 속하게 되어, 저는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의지가 욕망에 동의하기 전에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나 일단 동의한 후에는 그 반대로 욕망의 노예가 된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이 감각적인 욕망은 참으로 반항적이고 폭력적이며 교란적인 주체라 하겠으니, 우리는 이것이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이를 꺾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이성을 침해하고 또 몹시 괴롭히지만, 의지는 이에 대해서 아주 힘찬 손길을 뻗칠 수가 있고 의지가 원한다면, 욕망은 의지에 묶여 제어되고 그 뜻하는 계획이 깨져서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의 암시적 요구에 동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우선 일종의 충분한 거부요, 물리침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욕정을 우리의 생각에서까지 막아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죄를 잉태할 수 있고 또 완성할 수가 있다.(참조. 야고 1,15)
그런데 이러한 욕정이나 감각적 욕망은 대개 열두 가지 충동을 가지고 있으니, 마치 많은 반항적인 장수들 같은 그 여러 충동에 의해서 욕정은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흔히는 그 충동이 영혼을 소란케 하고 육체를 요동케 한다. 영혼을 괴롭히는 한 그 여러 충동은, 분심이니, 혼란이니, 교란 등이라 부르며, 육체를 요동케 할 때 격정이니, 욕정이니, 욕망이니 하고 부르는데,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밝히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신국론 XIV, 8) 그런데 모두 선이나 악을 제 앞에 자리 잡게 함으로 앞의 것은 취하고, 뒤의 것은 피하도록 할 것이다.
선이란 것을 자연적인 면으로 고찰해보면, 선은 사랑을 일으키고 또 첫 근원적인 욕정을 자극하게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선이 결핍되었을 경우에는 그것은 우리가 동경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동경하면서 그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취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며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절망이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상태로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그 선은 우리가 그것을 누리게 한다.
반대로, 우리가 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즉시 이를 미워하고, 만일 악이 결핍되어 없으면, 이를 미리 피하며, 미리 피할 수 없으면 이를 두려워하게 되며, 우리가 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런 때 우리는 담대하고 용감해지지만, 만약 악이 당장 현존해 있다고 느끼게 되면 애통해한다. 그리고 노여워하며 격분한 나머지 갑자기 이를 거부하려고 서두르며 물리치려고 애쓰든가 아니면 적어도 앙갚음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에 성공치 못하면 몹시 통분케 된다. 그러나 만일 악을 멀리 쫓거나 또는 앙갚음을 제대로 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만족과 흐뭇함을 느끼는데, 이것은 승리의 즐거움인 것이다.
즉, 선에 대한 소유가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하듯이 악에 대한 승리는 정신을 들어 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는 모든 감각적 욕정 위에 왕 노릇 하며, 욕정의 암시를 물리치고, 그 공격을 퇴각시키며, 그 효능을 방해하고, 아주 굳세게 거절하며 동의치 않으려 하는데, 이러한 동의가 없이 욕정은 결단코 우리를 손상치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거부함으로써 욕정은 정복을 당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래 걸쳐 계속됨으로써 욕정은 파괴되고 약화되며 기진해 버리게 되고 격퇴당하게 되며, 만일 다 한꺼번에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적어도 죽은 체하고 있든가 아니면 극복된다.
그런데, 테오티모여, 이 욕정의 무리는 덕행과 영신적 공로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머물도록 허락되어 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욕정이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스토아파 학자들은 크게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히려 말로 부정하러 드는 것을 실제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니, 이는 마치 성 아우구스티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과 같다.(신국론, I권 IX, C IV)
아울루스 젤리우스Aulus Gellius는 어느 날 좀 유명하다고 하는 스토아파 학자 한 사람과 같이 바닷가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폭풍이 일자 그 스토아파 학자는 안색이 창백하여지기 시작하였고, 너무나 드러나게 벌벌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그 배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모습을 다 보게 되었다. 사실 그 배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그와 함께 똑같은 운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그 학자를 이상히 볼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바다는 다시금 잔잔해지고 위험이 가셔져서 다시 서로 모여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눌 만큼 안정이 되자, 성미가 급한 어떤 아시아 사람 하나가 그 스토아파 학자를 꾸짖었다는 것이다. 즉, 남들은 모두 겁 없이 침착하였는데, 유별나게도 그렇게까지 겁에 질려 안색까지 변했던 것을 책망한 것이었다. 그런데 스토아파의 그 학자의 대답은 바로 예전에 소크라테스파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티푸스Aristippus가 이와 비슷한 공격을 당했을 때 하던 말을 빌려 되풀이하였다.
즉, 당신은 불한당같이 악한의 영혼을 지녔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내가 아리스티푸스의 영혼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잘못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아울루스 젤리우스가 직접 목격한 이야기였다는 사실로서 이 이야기의 가치가 또한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스토아파 학자의 대답에 내포된 것은 그 내용이나 잘못보다도 그 재치 있는 말투다. 그 후에 이 벗과 그 공포를 되새기면서 그는 두 가지 비난받을 수 없는 증거를 댈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는 스토아파 사람들도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과 또 다른 하나는 그 느끼는 공포가 눈과 얼굴과 태도로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결국 욕정, (격정激情 또는 욕정欲情이라고 번역되는 원어인, passio라는 말의 본뜻은 라틴어의 patri-겪다, 당하다, 참아 받게되다……에서 나온 명사로서, 사람이 자기의 잘못이 없이, 자기 탓이 없이 당하게 되는바, 예컨대, 갈증, 기아, 희로애락 등의 감정 및 감각을 의미한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Passio는 없을 수가 없었고, 없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 암브로시오와 그의 학파에서 범인들이 갖는 passio와 구별지어, 구세주께서는 pro-passio를 가지셨다고 말하였다) 또는 격정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지혜를 지닌 현자가 되려 함은 대단히 미련한 짓이다. 이 교회는 그 옛날 어느 거만한 아나고리티Anchorites들이(아나고리티는 오리제네스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추종자들로서 552년에 있은 제2차 콘스탄틴 공의회에서 교황 비질리우스에 의하여 단죄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와서 에까르트를 대표로 하는, 유사한 신비주의가 재기하려 하였다. 내용은 대개 펠라지아니즘에 물들어서 절대적인 완전성에 본성적으로 능히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고 있었던 그 어리석은 지혜를 정죄하였으며, 모든 성경뿐 아니라 특히 위대한 사도께서는 이를 반대하는 말씀을 하신다.
즉,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3)라고. 그뿐 아니라, 위대하신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도 말씀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즉 거룩한 성경과 건전한 도리를 따라 살고, 하느님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하느님을 따라 살지만 우리는 현세의 공포와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에 쌓인 여행 중에서 산다.”(신국론, XIV, 9) 그뿐 아니라, 이 나라의 으뜸인 임금조차도, 역시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열망하며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고, 몰골이 창백하여 떨고 피땀까지 흘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욱이 이 임금에게 있었던 격정과 그 동기나 충동이 비록 우리에게 있는 것들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역시 그러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위대하신 성 예로니모와 그의 뒤를 따르던 학파에서는(신학대전, 111a, q. XV, a,4) 주님의 인격을 존중키 위하여 격정, 또는 욕정이란(passio) 말을 감히 쓸 수 없다 하여, 대격정代激情 또 대욕정對欲情(=Pro-Passio)이란 단어를 쓰기까지 하였었다.
이러한 사실이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은 곧 우리의 구세주 안에 있었던 감각적인 충동이, 비록 격정은 아닐지라도 격정의 위치를 대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주께서는 당신께 기쁨이 되시고 당신께 좋게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격정 같은 충동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고통하거나 참아야할 것이 없었음을 보면, 주님께 있었던 내적 충동은 우리의 격정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 죄인들은 그렇지 못하니, 우리는 우리 의지에 반항하는 부조리와 무질서한 충동으로써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이며, 또한 이로써, 우리 영혼의 선량한 상태와 질서를 크게 깨뜨리는 짓이 된다.
제4장
사랑은 온갖 애정과 욕정을 지배하며 의지가 사랑을 지배하지만 사랑은 의지를 지배한다
사랑이란 우리가 선에서 취하게 되는 첫째 만족으로서 자연스럽게 열망이란 것을 생기게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열망할 것이랴? 사랑은 또한 쾌락을 낸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치 않고서는 거기서 무슨 쾌락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은 또한 희망을 낸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선을 우리는 희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미움도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랑을 제외하고는, 다시 말해서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악도 우리는 미워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선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면 악이라도 악이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테오티모여, 다른 모든 욕정에 대해서도 이처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욕정은 사랑을 제 근원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랑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정이나 애정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또는 덕스러운지 악스러운지 알 수 있는 원인은, 그 모든 욕정이나 애정의 근원이 되는 사랑이 좋고 나쁨에 달려있는 것이다. 즉 사랑이란 제게서 나온 모든 것에 제 성질을 퍼뜨려주므로 사랑에서 나온 것들은 그 사랑을 닮게 되는 까닭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욕정과 애정을 네 가지로 귀결시켰는데 이것은 보에시우스Boetius, 치체로Cicero, 비르질리오Virgil 및 대부분 옛사람이 생각했던 바와 같다.
즉, “사랑이란 제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려 들 때 이를 탐욕이니, 열망이니 하고 부른다. 그리고 이미 사랑하는 것을 지녔거나 소유케 되었을 때, 기쁨이니 향락이니 하고 부르게 된다. 또 제게 상반되는 것을 회피하려 할 때 그것을 공포라고 부른다. 회피하려던 것에 부딪혔거나 이미 당해서 느끼고 있게 되면 그것을 슬픔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 사랑이 착하고 좋은 사랑이면 거기서 솟는 격정도 또한 착하고 좋으며, 사랑이 약하고 나쁜 것이었으면 거기서 내뿜는 격정도 약하고 나쁜 것이 된다.(신국론, I, XIV, 7,9.21)”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두려워하고 열망하며, 슬퍼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올바른 것이므로 그 모든 애정도 역시 올바른 것들이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인간 정신을 하느님께 예속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인간 정신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며, 또 모든 격정을 정신에 종속시킴으로써 정신은 그 격정들을 제어하고 조절하며 경의와 덕행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이용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지는 바로 좋은 사랑이 되며 나쁜 의지는 약한 사랑이 된다.(신국론De Civ. Dei, XIV, 9) 말하자면, 테오티모여,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이와 같은 사랑은 의지를 잘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은 의지를 온전히 자기처럼 되게 한다.
보통으로 아내는 남편의 신분을 따라 자기의 신분을 바꾸게 마련이다. 그래서 남편이 양반이면 아내도 양반이 되며, 남편이 왕이면 아내도 왕후가 되고, 남편이 공작이던 아내도 공작 부인이 된다. 우리의 의지도 자기의 짝이 되는 사랑을 따라 그 성질을 바꾼다. 사랑이 육체적이면 의지도 육체적이 되고, 사랑이 영신적이면 의지도 영신적이 된다. 또 열망과 기쁨과 공포와 슬픔의 모든 애정이나 감정도, 마치 사랑이 의지와 결혼하여 낳는 자녀들처럼, 결과적으로 그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사랑의 성질을 받아 닮게 된다. 테오티모여, 간단히 말하면, 의지는 애정에 의해서 움직여지는데, 그 여러 애정 가운데서 사랑은 제1원동자(primum mobile)와 제1애정(first affection)과도 같이 모든 다른 감정과 애정에게 동력을 주며 영혼의 모든 원인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사랑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의지는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자기에게 제시된 많은 사랑 중에 좋고 잘 맞는 것으로 보이는 사랑에 애착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다면 금지된 사랑과 명령받은 사랑의 구별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여러 사랑 위에 주인 노릇을 하며 지배력을 가지는데 이는 마치 한 처녀가 자기를 따르는 여러 남자에 대해서 차지한 자리와 흡사하여, 그 여럿 중에서 제 마음에 드는 자를 고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후에는 그녀의 모든 자유를 잃게 되어 처녀는 아내가 되고 남편에게 예속하게 되니 처녀는 자신이 골라잡은 이에게 되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꼭 같이, 제 마음대로 사랑을 선택한 의지는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든 간에, 일단 의지가 포옹한 사랑 밑에서 살게 된다. 이것은 여자가 자신이 선정한 남자에게, 그가 생존하는 한, 늘 종속되어 있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혹시라도 죽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여자는 옛날, 결혼 전에 누렸던 자유를 되찾게 되어 다른 아무 남자하고 다시 결혼할 수 있게 되듯이, 한가지 사랑도 의지 안에 살고 있는 동안은 매 한 가지라 하겠다.
즉, 사랑은 의지 안에서 다스리며, 의지는 사랑의 여러 충동 밑에서 살게 된다. 만일 이러하던 사랑이 죽게 되면 의지는 그 후임으로 다른 사랑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의지 안에는 자유가 있으니, 이러한 자유는 결혼한 여자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의지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이미 제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랑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자유이다. 즉 지능을 써서 그 사랑의 못됨을 발견하고 그 사랑의 여러 동기를 살핀 후, 대상을 바꾸겠다는 결심 하에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고 다스리게 하도록 우리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죽여야 하며, 만약 이 자애심을 전적으로 말살시킬 수 없다면 적어도, 비록 우리 안에 약간 남아 있긴 하더라도 더이상 우리 안에서 왕노릇 하지는 못하도록 약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때때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던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을 중단시키고,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로 이끌려 가서 애착하게 되며, 이러한 사실은 곧 천상의 정배가 자주 죄인들에게 질책하시는바, 부끄러운 간음행위라 하겠다.(부끄러운 간음이란, 이스라엘의 역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하느님과 결혼한 여자로 묘사하여, 우상숭배를, 간음한 여인의 행위에 비교하였듯이, 하느님께 사랑받은 영혼이 하느님 대신 다른 것을 사랑함을 이 죄에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