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대축일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말마디 ‘에피파니Epiphany’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되어 “보여주다(to show)”, “알게 하다(to make known)” 또는 “계시하다(to reveal)”를 의미한다.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축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메시아이자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 드러나심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강조하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방인들이었던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하고 경배하면서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을 왕이요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동방 교회가 공현 대축일에 강조를 두는 듯하고, 가톨릭교회는 성탄 대축일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만 공현 대축일 역시 같은 비중으로 강조하려 한다.
이 축일을 ‘테오파니Theophany’라고도 하는데 이 낱말 역시 그리스어에서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다(자신을 드러내시다)’를 뜻하는 말에서 기원한다. 이 말은 ‘θεοφάνεια(theopháneia)’에서 파생되며, ‘θεός(theós)’는 ‘하느님’, ‘φαίνω(phainō)’는 ‘나타난다’라는 뜻이다. 굳이 구분하여 말할 때 ‘Epiphany’가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이라면, ‘Theophany’는 ‘하느님의 나타나심’ 정도이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한 마디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라고 표현하는데, 이 구절은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와 주님 공현 대축일 전례문에 모두 사용된다. 어떻든 공현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세주로 “계시”하시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교회의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축일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같은 칭호를 기록한다. 탄생 시에 알려지는 칭호는 오늘 복음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처음 사용한 것을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반복한다. 예수님의 죽음에서는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붙여 달게 했다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인데(참조. 마르 15,26과 병행구 및 요한 19,19), 이는 군사들이 조롱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며(참조. 마르 15,18 마태 27,29 요한 19,3), 야만적인 십자가형의 처참한 형장에서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요한 19,20)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같은 ‘계시’가 드러난다. 인간은 하느님을 찾거나 하느님을 거부하는 데에, 아니 어쩌면 희망 속에 좋은 믿음을 갖는 데에서나 믿음을 버리고 폭력과 악을 선택하는 데에 같은 내용을 사용하기도 한다.
1.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으로서 예수님의 정체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과정을 묘사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셨으면서 아울러 세상 모든 이가 찾아가 경배해야 할 임금이시라는 특별하고도 결정적인 의미를 담는다. 마태오가 전해주는 오늘 복음은 역사적인 사건이면서도 복음을 기록하는 복음사가의 믿음을 그 안에 담았다. 평범한 한 시골 장인匠人인 요셉과 그의 아내인 마리아로 구성된 보통 가정에서, 그것도 형편이 옹색한 “유다 베들레헴” 외곽에 양들을 비롯한 동물들을 가두어두기 위한 헛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난다. 그런데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들의 오랜 탐구와 지혜에 따라 인도되어) 예루살렘에 와서”(마태 2,1) 자기들의 추구와 기다림의 완성을 확인하면서 단순한 한 아기의 탄생을 목격한다.
박사들은 기나긴 여행 끝에 도달한 곳의 언어나 관습을 몰랐고 구약성경도 그리 잘 알지 못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하며 당시 현지의 왕인 헤로데에게 새로운 왕에 관해 물어볼 만큼 순진하고 단순하다. 박사들은 그저 갈망하고 기다리며 찾아 헤맨 새로운 왕에 관한 생각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시대와 역사, 문화를 막론하고 진실한 인간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는 모순되더라도 선善을 추구하고 갈망하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 존재는 선, 충만한 삶, 평화를 찾는 내면의 불꽃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의 열정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뭔가가 불충분한 이 땅을 벗어나 불꽃의 인도를 받아 먼 길을 떠나도록 부추긴다. 이를 위해 길을 떠난 인간은 “별을 따라” 온 동방 박사들처럼 하늘, 땅, 바다, 온갖 생물이나 사물들과 교감하며 신호를 찾고 표징을 구한다.
동방박사들은 긴 순례길에서, 특히 마음과 정신의 순례길,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순례길(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표현)에서, 별을 보았고, 사막의 모래들을 보았으며, 길을 동반해주는 동물들을 보았고, 일상을 위한 보따리들을 보았으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선물들을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멀리 지평선을 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별이 떠오르는 법이어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왔다. 그렇게 동방박사들은 해가 뜨는 곳, “동방에서(ἀπὸ ἀνατολῶν, apò anatolôn)”부터 “세상의 중심”이요 “한가운데”이며 “아름답게 솟아오른 산”(참조. 에제 5,5;38,12 시편 48,3), 세상의 배꼽(ὀμφᾰλός, omphalos)이라 생각하던 예루살렘에 왔다. 박사들은 유다인의 왕이면서 자기들의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아직 가늠도 하지 못한 헤로데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묻는다.
2. “헤로데…유다 베들레헴”
박사들의 질문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성전의 사제들이나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성경 전문가들을 막론하고)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 2,3) 마땅히 알았어야 할 사람들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연구 끝에 성경 말씀(미카 5,1 2사무 5,2)에 따라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5-6)라고 보고한다. 보고하는 이나 보고를 받는 이나 분명하고 확실한 내용을 접하지만, 그들 모두 근본적으로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말씀과 하느님의 목소리를 인용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이에게 가르치기까지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귀먹고 눈먼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마음이 완고”(마태 19,8 마르 3,5;6,52;10,5)한 때문이다. 하느님의 활동과 현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완고함(스클레로카르디아, σκληροκαρδία, sklerokardía)으로 식별과 분별의 눈과 귀가 막혔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질문은 정치 권력의 대표자와 온 예루살렘을 “깜짝 놀라게” 하며 불안과 혼란을 빚는다. 하나의 정치 권력은 또 다른 정치 권력이 등장할 때 두려워하고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이 혼란과 불안은 아기의 탄생인 이때로부터 그 아기가 유다인의 왕으로서 자주색 망토를 걸치고 갈대로 지휘봉을 들며 머리에 가시로 된 왕관을 쓴 채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발가벗겨져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몹시 불안했던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하며 자신을 감추고 거짓말을 한다.
한 생명의 탄생과 그 생명을 죽이려는 힘의 통치가 충돌한다. 헤로데는 박사들을 회유하여 그들이 지녔던 본래의 여행 목적과 바람을 저버리도록 유도하여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없애고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박사들이 “더 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라는 기쁨의 아기가 있다. 그러나 헤로데는 모든 이에게 미칠 이 ‘기쁨’이 두려웠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는 모든 이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인간의 생명이 점점 더 두려워지는 세상을 산다.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고, 키우며, 축복하고, 이 위대한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하는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3. “엎드려 겸배…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유다인들의 성경을 듣고 그 말씀에 순명하며 그 성경 말씀의 인도를 따라 동방 박사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9-10) 박사들은 “(별이 멈춘)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박사들은 자기들이 꿈꾸고 기다렸던 것과 사뭇 다른 상황을 맞는다. 왕의 탄생에 걸맞은 궁궐이나 화려함이 아니며 초라하기 그지없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헛간에서 어머니와 가난한 한 아기의 탄생을 만난다. 동방박사들은 마음으로부터 불타올라 약속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들을 부추기고 몰아붙이며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불꽃을 따라 “하늘의 별”에 의지했고, 예상하지 못했으나 세상이 반드시 알아모셔야만 할 상황을 깨우쳤으며, 알 수 없는 것을 밝혀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성경의 인도라는 세 표징에 성실히 순명했다. 세 가지 표징을 따랐던 이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다.
박사들은 이방인이었지만 마음과 정신을 바꾼, 어떤 의미에서 ‘개종자’가 되어 참 왕권과 거짓 왕권을 식별하고, 웅변적인 말은커녕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하염없이 약하고 어린 아기의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도 보편적인 왕권을 지니신 그분을 진정으로 알아모신다. 이방인 박사들은 성경이나 계시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그분을 알아모시는 믿음에 이른다. 이렇게 유다인들과 이방 백성들에게 메시아에 관한 계시가 드러난다. 이 세상의 세속적인 권력과 힘의 왕이 아니라 연약하고 작은 한 아기의 미소함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진정한 왕권과 그분의 정체를 이해하게 된다. “별을 보고…아기를 보고…”라 하는데, 같은 내용을 두고 루카복음은 예수님을 ‘본다(관상觀想, contemplation, theoría)’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참조. 루카 23,48)을 본다는 것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바라봄이란 예수님을 땅에 떨어진 씨앗(참조. 요한 12,24)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 박사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예물”을 드린다. 자기들 고장에서 나오는 귀한 예물, 그곳의 백성들과 문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빚어낸 귀한 선물을 드린다. 마태오복음 맨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마태 28,19) 하실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미 이 장면에서 여기 동방박사들을 제자로 삼으신다. 박사들은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 모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첫 번째 이방인들이다. 이러한 박사들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라고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라 한다.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미 “다른 길”에 들어선 이들이 된 박사들이 “자기 고장에” 돌아간다.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곧 길을 나선다. 동방 박사들도 “다른 길로 (바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베들레헴에서 나신 “유다인들의 임금”이신 분의 ‘공현公顯’ 앞에서 사람들은 이미 두 편으로 갈린다. 한편에서 이방인이었음에도 그분을 알아모시고 경배하는 사람들, 약속의 자녀요 후손들이었음에도 그분을 알아모시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방 박사들처럼 선善을 추구하고 찾는 사람들, 그것에 사명감을 느끼고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 그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요 더 나은 인간으로 사는 길이라며 기나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오는 모든 아기도 그들이 알든 모르든 임금과 같은 존엄으로 경배받아야만 마땅하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로서 우리가 지닌 “황금(소유)”, 우리가 내뿜는 향기로운 “유향(현존)”, 우리가 바쳐야만 하는 “몰약(희생)”을 예물로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으로 오시어 작은 아기가 되신 분이 당신을 희생하여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 공현의 뜻이었다. 그런 의미로 주님의 공현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든 인간의 진정한 왕적王的 존엄성과 신분을 밝힌다. 세상 모든 임금 중의 임금, 우주의 임금이시고 메시아이신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이렇게 당신을 드러내신 까닭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기 위함이고, ‘내가 너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친다’ 하시기 위함이며,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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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죄를 씻어주시니, 교회는 천상 신랑과 결합하였도다.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임금님의 혼인 잔치에 달려오고, 물이 술로 변하여 잔치 손님들이 기뻐하였도다. 알렐루야.(성무일도, 주님 공현 대축일 아침기도 즈카르야 노래 후렴)』
『오늘 세 가지 기적으로 이날을 기념하였도다. 별이 박사들을 구유에로 인도하였고, 혼인 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알렐루야.(성무일도, 주님 공현 대축일 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후렴)』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와서 보물 상자를 열어 주께 예물을 바쳤도다. 황금은 위대하신 임금을, 유향은 참 하느님이심을, 몰약은 그분의 묻히심을 상징하는 것이로다. 알렐루야.(성무일도, 주님 공현 후 월요일 아침기도 즈카르야 노래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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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가톨릭 작가였던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1888~1948년)는 오늘 우리가 지내는 이 공현 대축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처음부터 나의 교회는 오늘과 같았고 세상 끝날까지도 강한 자들에게는 문제요 약자들에게는 실망일 것이며 나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찾지 않는 내면의 영혼에는 시련과 위안일 것이다.…그렇다.…누구든 거기에서 나를 찾는 자 그곳에서 나를 찾을 것이지만, 반드시 ‘찾아야만’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잘 숨어있기 때문이며, 나의 사제들이 당신을 믿게 하는 것보다도 더 잘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이 겸손하게 베들레헴의 왜소한 마구간의 나를 찾았듯이 그렇게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나를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나를 기리고자 수많은 왕궁이 지어졌고, 수를 셀 수도 없는 갤러리와 회랑들이 생겨났으며, 밤낮으로 화려하게 조명을 비추고 관리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그곳들을 지키고도 있다. 하지만, 진정 나를 찾고자 한다면 옛 유다의 길, 눈 덮인 길에서, 별과 순수한 마음만을 청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