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는 피천득 선생의 ‘오월’을 먼저 배웠는지, 성모성월의 오월을 먼저 배웠는지 가늠이 안 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나 누나를 따라 성모님께 바치던 꽃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오월이면 반드시 어디선가 한번은 듣게 되는 피천득 선생의 존함과 그분의 작품 <오월>이다. 듣는 어감만으로도 상큼한 느낌을 주는 피천득(皮千得, 1910~2007년) 선생의 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동안 ‘죽음’을 두고 썼던 오래된 글들을 뒤적여 한 자리에 모으는 ‘짓’을 한다. 청승일까? 생의 시작에서는 한참 멀어져 이제는 훌쩍 가까워져 버린 죽음이 무의식 속에서 두려워서일까? 세상은 참 스마트해져서 이런 검색도 가능하고, 이런 모음도 가능한데, 이렇게 항상 죽음을 달고 살면서도 무서운 줄 모르고, 죽는 날까지 생의 정산定算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
더운 여름 지방으로만 알려진 미국 플로리다에서도 계절이 나름 변한다. 9월 말이나 10월쯤 되면 사람들이 ‘지옥 끝, 천국 시작’이라고 부르는 좋은 시절에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이때만 나오는 과일들을 보면서 이를 실감한다. 반대로 천국이 끝나고 지옥처럼 더운 여름이 될 때면 ‘아, 또 그때가 왔구나!’ 싶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것 같아도 계절이나 사물, 혹은 상황이나 사실이 A에서 B로,
백 년도 넘는 세월 전에 샤를 페기Charles Péguy(1875~1914년)라는 작가가 “현대 사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훼손하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것마저도 훼손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죽음이라는 존엄성이다.(The modern world has managed to debase the thing that is perhaps more difficult to debase than anything else, because it has a singular dignity: death.)”라는 통찰을 이미 내놓은 바 있다. 거의
‘슬기로울/지혜 혜慧’라는 글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모양을 살펴보면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모습의 상형인 ‘풀 초艸’, ‘또/손 우又’, ‘마음 心’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丰丰는 갈대나 싸리 같은 것을 한데 모아 묶은 형상이어서 이것이 ‘풀 초艸’이고, ‘또/손 우又’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을 간략하게 서양의 포크나 삼지창처럼 표현하여 옆으로 눕혀놓은 것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살 별 수/세/혜彗’가 소릿값이 되어
‘메/뫼 산山’이라는 글자는 가운데 긴 획을 먼저 쓰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산봉우리 셋을 표현하는 3획으로 된 글자로서 부수로 쓰일 때 산이나 고개 등과 관련된 글자이다. 발음에 해당하는 ‘산’은 우리말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말 ‘산’을 표현하는 수화의 글자 모양새는 서양에서 가운데 있는 손가락을 세워 상대방을 모욕하는 욕설에 해당하는데, 이는 한자의 글자 모양을 그대로 본떴을 뿐이다. 그 ‘산’을 두고
지난 주말 설을 지냈다. 떡국 차려 줄 이 없는 처지엔 북어포 몇 가닥 넣고 보리새우 넣어서 국물을 뽀얗게 우린 다음 라면과 함께 끓이는 떡국 라면이 제격이다. 나는 먹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 먹었다 하고, 해는 절로 가며, 나이는 스스로 든다. 아무리 동안童顔이라고 자위를 해도 나이와 해의 자발적自發的인 작동은 야금야금 어느새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문득 옛
무엇인가를 끊는다는 뜻으로 글자를 찾으면 맨 먼저 연상되는 것이 ‘칼 도刀’가 들어가 있는 ‘끊을 절切’이다. 소리에 해당하는 ‘일곱 칠七’과 뜻에 해당하는 ‘칼 도刀’가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끊을 절切’은 ‘일곱 칠七’ 역시 내려치는 칼질의 모양새이므로 칼날과 같은 것으로 무엇을 베어내고 잘라내어 동강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는 또한 ‘온통/모두 체切’라고도 새겨서 ‘일체一切’와 ‘일절一切’이 어떤 경우에 쓰이는가 하고
행복이 원하고 추구해서 되는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현재의 자기 행복을 가늠하는 습성을 지닌다. ‘행복’이라는 말마디를 만드는 앞 글자의 ‘행’은 괜히 기분 좋고 포근한 느낌을 주며 영어의 happy를 연상하게 하지만, 한자로 쓸 때는 ‘다행 행幸’이라는 글자를 쓴다. 이 ‘행幸’이라는 글자는 본래 신체의 일부를 묶고 가두어 꼼짝 못 하게 하는 형구의
이 글자는 팔에 힘을 주었을 때 근육이 불거진 모습이라고도 하고, ‘칼 도刀’의 변형으로 칼에서 나오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고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농경 사회로 전환되면서 동물이 끌기 전 사람들이 밭에서 힘들여 끌었을 쟁기나 가래의 모양이라는 것이 훨씬 더 근거 있는 얘기이다. ‘사내 남男’이 밭(田)에서 힘들여 쟁기질(力)하는 남자를 가리키고,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여럿이 쟁기질을 해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