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울 치恥

부끄럽다는 뜻이 붙어있어서 부정적이거나 삼가야 할 글자처럼 느껴지지만 원래 ‘부끄러울 치恥’는 사람의 바른 본성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글자이다. ‘부끄러울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해져 만들어진 형성문자로서 귀로 드러난 마음의 상태, 곧 붉은 혈액의 엔진인 심장(마음)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내적 감정의 흔들림이 귀에 전달되어 홍조로 귀가 붉어진 모습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어서 겉과 속이

끙끙거릴, 읊조릴 신呻

작년 말 잠시 귀국하여 건강검진차 1년 반 만에 병원에 갔었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병원에 간다고 하더라도 병원에 가는 길은 유쾌하지 않다. 40이 넘어서면서부터 나의 체질상 필요하다 하여 ‘대장 내시경’이라는 것을 반드시 하는데, 이는 아주아주 괴로운 과정이다. 맛이 별로인 약물과 함께 물을 적어도 4리터 마셔야 한다는 강박은 거의 고문 수준이고 두려움의 극치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달랐다. 약물을

코 비鼻

‘코 비鼻’라는 글자는 「코 모양을 그린 ‘스스로 자自’와 소리부인 ‘줄 비畀’로 구성된 형성자인데, 自가 원래 의미인 ‘코’를 나타내지 못하고 일인칭 대명사로 쓰이게 되자 소리부를 더하여 분화한 글자이다. 이 글자와 함께 구성된 글자는 모두 ‘코’와 관련된 의미를 담는다. 鼻자에 쓰인 畀자는 ‘주다’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코와 폐를 연결하는 기관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鼻자는

작가作家

어디선가 누가 나를 “작가作家” 신부라고 소개했다. 생뚱맞다고 생각했고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a person who writes books, plays, stories, or other works, as an occupation or profession; an author.”라고 정의한 대로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면 나는 작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a writer is a person who writes”라고 한 대로 무엇인가를 쓰는 이가 작가라면

기도라는 예술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엄마 손을 잡고 매일 새벽 미사에 가서 추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미사를 드렸으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라틴말을 외워 매일미사 복사服事도 했다. 소신학교에서는 “주님을 찬미합시다!(베네디카무스 도미노, Benedicamus Domino)” 하시는 신부님의 외침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데오 그라시아스, Deo Gratias)”라는 라틴말을 외치며 아침 눈을 떴고, 선교사 신부님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전례를 따라 매일

점근선漸近線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과에 지원했고 수학에서 분명히 배웠을 ‘점근선’이라는 것이 처음 들어본 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렵고 힘들어 그만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내용이었음일까? 오랜 수학 과목의 개념을 들춰내면서, 인생을 사는 동안 배워야 할 것은 지금이건 오랜 세월이 지나서건 반드시 다 배우고 넘어가야만 인생이 끝나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새삼 그때 그렇게도 어려웠던 내용을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둘씩 짝지어(two by two)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마르 6,7) 파견하셨다 한다. “둘씩 짝지어”라는 말씀을 읽으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헨리 나웬 신부님께 첫 편지를 쓰게 했던 나의 젊은 날이 생각난다.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까닭은 신명 19,15 마태 18,16 2코린 13,1 등에 따라 제자들이 복음의 ① 증인으로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증언의 유효성 입증을 위한 최소의

떠남

어느 날 아침, 형제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한 형제가 사막교부의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준다. 온갖 걱정과 산만함으로 시달리는 젊은 제자가 고명하신 스승님께 “저는 처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나 이처럼 사막에 사는데, 왜 이리 산만합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스승님께서 “너에게 ‘처자식’은 없어도 ‘저 자식’이 있잖아? 떠났어도 떠난 것이 아니지.” 하시더라는 것이다. 우스개로 들었지만, 우리는 늘 함께 사는 누군가를,

첫걸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St.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sus)께서 “오, 저의 하느님! 켜켜이 깊게 쌓이고 끝없이 잡다한 기억의 힘은 실로 위대하면서도 두렵습니다.(Great is the power of memory, a fearful thing, O my God, a deep and boundless manifoldness.)”(고백록 10권, 17.26)라고 말씀하시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혹시 성인께서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설령 아무리

거짓 가假

(*지난주에 만난 여든 넘은 할머니 수녀님께서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깨끗이 빨래해서 햇볕에 널려고 가다가 땅바닥에 엎어버린 꼴이라고 한숨과 눈물을 지으셨다. 정갈하게 살자고 수녀가 되었으나 하느님 앞에 갈 날을 가늠하여 돌아보니 오직 참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하염없이 거짓이고만 지난 날들이었다는 회한悔恨이었다) ‘거짓 가假’라는 글자는 ‘거짓 가’, ‘멀 하’, ‘(어느 목적지에)이를 격’이라는 뜻과 소리를 지닌다. 가면假面, 가장假裝, 가상假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