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0,17-30 또는 10,17-27(연중 제28주일 ‘나’해)

지난주 복음이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어”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도록 마련하신 혼인 계약의 아름다움과 그에 관한 하느님의 의도에 관한 내용(참조. 마르 10,6-9)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그렇게 형성된 가족일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상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혼인과 가정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상적인 길이라면, “나(그리스도)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마르 10,29) 실제 열두 제자들에게

마르 10,2-16 또는 10,2-12(연중 제27주일 ‘나’해)

복음의 전반부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조상들이 이혼 가능성을 허락한 경우를 두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며 시비를 걸어와 예수님과 논란을 일으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혼을 반대하는 것이 부당하며, 그렇게 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상황이 된다는 것처럼 몰아붙인다. 이 논쟁은 이미 당시 샴마이Shammai라고 하는 엄격주의자들(간음의 경우 이외에는 이혼 절대 불가)과 힐렐Hillel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어떤 이유라도 이유가 닿으면

마르 9,38-43.45.47-48(연중 제26주일 ‘나’해)

오늘 전례의 복음은 마르 9,38-48에서 취하는데, 신체 일부를 훼손해도 좋다는 식으로 잘못 읽힐 소지가 있는 44절과 46절을 건너뛴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에 오르신다. 그러나 공동체의 분위기는 그리 평화스럽지 않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마르 9,32), 베드로처럼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마르 8,32)하기까지

마르 9,30-37(연중 제25주일 ‘나’해)

※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오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옮겨와 미사를 지내는 곳에서는 http://benjikim.com/?p=11529에서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지난주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마르 8,29)한 이후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주님께서 오늘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서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자, 예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루카 9,23-26(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9월 20일

(*직접 저술이 아니라 인터넷 검색을 바탕으로 편집한 내용임. 9월 20일 대축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많은 이민 교회의 특성을 고려하고, 주일로 옮겨 대축일을 지낼 수 있다는 지침에 따라 참고자료를 수록함) 전례배경 1583년에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 마태오 리치 신부의 저서 『천주실의』 등을 조선으로 들여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학자들은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그 문하생들이다. 그들 가운데 특히 농은

마르 8,27-35(연중 제24주일 ‘나’해)

오늘 복음은 공관 복음이 모두 전한다. 16장으로 형성된 마르코 복음에서 오늘 복음이 위치한 제8장 후반부 대목은 위치상 복음의 정 중앙에 위치하면서 전환점이 된다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베드로의 고백이 등장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중요한 a key moment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이라는

마르 7,31-37(연중 제23주일 ‘나’해)

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 복음만이 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에서(요즘 말로 외국에서)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예언되었던 표징 중 하나(제1독서)를 완성하신다. 치유과정은 매우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묘사는 그리스도교의 입교 예식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마르 7,31) 지리적인 이동 경로를 밝힌다기보다

마르 7,1-8.14-15.21-23(연중 제22주일 ‘나’해)

지난 5주 동안 “생명의 빵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으로 요한복음 6장을 통해 예수님의 긴 교리 수업과도 같은 말씀을 들었으며 다시 ‘나’해의 복음인 마르코 복음으로 돌아왔다. 오늘 복음이 처한 문맥상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이신 이야기(참조. 마르 6,30-34) 뒤에 이어지는 마르코복음 7장의 서두로 오늘 복음은 전개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일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제기하는

요한 6,60-69(연중 제21주일 ‘나’해)

전례적으로 요한복음 제6장의 종결부에 드디어 도달했다. 다음 주부터는 ‘나’해의 복음인 마르코복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말씀이 유다인들뿐 아니라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논란과 충격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공동체 간에 야기된 이러한 논란과 위기에 맞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요한 6,51-58(연중 제20주일 ‘나’해)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라고 시작하는 총 21개의 장으로 형성된 요한복음의 저자, 그리고 편지글에서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복음사가 요한, 적어도 그와 같은 계보에 있었다고 여겨지던 저자는 시종일관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내용을 그 근본 핵으로 삼아 자기의 복음을 엮어간다.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면서 유별나게 인간들의 ‘밥자리’를 모티브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