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시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성령 강림 대축일이다.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 완성되었고, 이러한 구원의 신비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교회와 함께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이 완성되었음을 경축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여러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날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가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사도 2,1)라는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 따라 성령강림절을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50’이란 숫자를 뜻하는 ‘펜테코스테(Πεντηκοστῆ, Pentecoste)’라는 말에서 온다. 부활 후 50일째이다. 하느님의 시간을 두고 인간의 날짜 계산이 별 의미가 없지만,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사도 1,2.3)라고 루카 복음사가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보이신 행적 끝에 승천하신 날로부터 열흘째에 해당하는 날이다.
유다인들은 일곱 개의 절기 축제를 지냈는데, 그 중 “오순절”은 “너희는 일 년에 (적어도) 세 차례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야 한다.…무교절…맏물을 바치는 수확절…연말에는 추수절”(탈출 23,14-17)을 지내라는 말씀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내는 중대한 3대 절기 축제 중 하나이다. “무교절”無酵節은 발효되지 않은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면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신 하느님을 기리는 절기이다. 유월절逾越節, 과월절過越節, 파스카, 해방절이라는 말들과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유월절이 정월 14일 저녁이며, 다음 날인 정월 15일은 무교절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추수절”은 레위 23,33-44과 신명 16,13-15, 민수 29,12-39 등에 따라 추수를 끝내고 추수한 것의 저장을 마치는 때로서 광야의 초막 생활을 가리키면서 초막절草幕節이라 하거나 장막절, 수장절收藏節(거두어 저장하는 절기)이라 하기도 한다.
“수확절”의 첫날에 맞는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새로운 곡식 제물…흔들어 바칠 예물”(“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레위 23,15-16 ; 참조. 신명 16,9), “햇곡식”(민수 28,26)을 드리는 날, 보리의 첫 수확으로 시작되어 밀의 수확으로 끝나는 수확기가 시작하는 절기이다. 칠칠절七七節이라 하기도 한다. 수확절은 시나이 산의 율법(탈출 19-20장) 수여나 언약 갱신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집트 탈출 50일째(“셋째 달 바로 그날”-탈출 19,1), 유월절로부터 50일째에, 시나이 산자락에 도착하여 율법을 수여 받고 하느님의 계약 공동체가 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광경을 구약은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탈출 19,16) “온통 연기가 자욱…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탈출 19,18) “우렛소리와 불길과 뿔 나팔 소리와 연기에 싸인 산”(탈출 20,18) “원로 일흔 명과 함께”(탈출 24,1.9) “구름이 산을 덮었다.”(탈출 24,15) “산봉우리에서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탈출 24,17) 등으로 묘사한다. 신약에서는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사도 1,14)하던 중에 “오순절이 되었을 때…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불꽃 모양의 혀들이…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한다. 이렇게 구약의 오순절은 신약의 성령강림절이 되고 교회가 출범하는 날이 된다.
우리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간 첫날 저녁…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린다. ‘가, 나, 다’해 모두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제4복음서의 요한 20,19-23을 복음으로 취하는데, 이탈리아를 비롯한 일부 교회에서는 ‘가, 나, 다’ 해의 복음을 각기 달리 취하면서 ‘나’ 해에는 요한 15,26-27;16,12-15을 복음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또는’ 다음에 기록하는 전례 복음의 장·절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신 내용으로서 서로 다른 맥락에 있는 두 부분을 연결하여 전례 복음으로 취하는 것이 되므로 다소 인위적인 색채가 짙고, 연속되지 않은 부분을 하나로 해설하게 되므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요한 20,19-23은 부활 제2주일 ‘가, 나, 다’ 해의 복음이기도 하여 이미 여러 번 강독한 바 있어 교회의 배려를 존중하는 마음과 함께 요한 15,26-27;16,12-15을 읽어나간다.
오늘 성무일도서의 ‘끝 기도’ 후 부활 시기가 공식적으로 끝난다. 미사 끝에 부활 시기의 시작처럼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두 번 반복하여 부활 시기의 끝을 알린다. 부활 시기가 끝났으므로 내일부터는 보통 삼종기도를 바치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부활초는 세례대 옆에 보존해 두었다가 세례 예식 때 영세자의 촛불을 거기에서 켜 준다.
1.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요한 13,1)로 시작하는 최후의 만찬과 ‘고별사’로 알려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만찬 중에 계신다. 복음사가 요한이 속한 교회 공동체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들었고, 간직하였으며, 묵상하였고, 해석한 다음 마침내 이를 글로 옮겨 복음을 기술했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단어 그대로, 말씀하신 방식 그대로를 옮겨 적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그가 속했던 교회 공동체가 최후 만찬의 예수님 말씀을 ‘부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오늘 복음 대목에서 우리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분, 우리 주님께서 시대를 막론하고 당신 앞에 모인 교회를 향해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확인한다.
우리는 공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령에 관해 말씀하셨고, 성령께서 당신 세례 때에 당신 위에 내리셨으며(참조. 마르 1,10 및 병행구), 제자들이 선물로, 특별히 박해를 받게 될 때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마르 13,11과 병행구)는 사실을 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도 있는 내용을 제자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요한 14,26)이라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니 “보호자(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Parákletos, 변호자, 옹호자, 위로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하신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한 제자들을 두고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요한 15,27)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첫 제자들에게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늘까지 이어지는 미래의 제자들, 곧 한 여인에게서 나셨고,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지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 인간의 육체가 되시고 살(사륵스, σάρξ, sárx, 영어-flesh)이 되신 예수님,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아드님의 영광을 누리시는 분에 관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 약속이 적용된다.
성령, 하느님의 숨, 영, 하느님 존재 자체의 생명에 관한 묘사,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땅과 어둠의 심연 위를 감돌고 있었던 “하느님의 영”(창세 1,2), 한 여인에게 내리시어 “말씀이 사람이 되게”(요한 1,14) 하신 성령,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당신 제자에게 불어넣으실(요한 20,22) 성령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되신 하느님의 생명이 이제 제자들의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제자들의 증언과 성령의 증언이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들과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이상하게 보고 적대시하며 박해를 할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예수님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신(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329/330~379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6) 하시고,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하셨으니 이제 예수님 제자의 말도 거룩한 성령의 음성이 된다. 한없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제자들 처지에서도 제자들의 증언은 성령에 힘입어 힘이 넘치는 증언이요 세상에 전해지는 예언의 말씀이 된다.
첫 인간 아담도 성령을 받아 생명체가 된다.(창세 2,7 1코린 15,45) 거룩한 영, 뜨거운 불길의 영, 생명의 영, 곧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는 자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자리를 생각할 때 ‘우리가 함께 있는 자리’,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자리’, 그리고 ‘우리가 서로 평화를 선물하는 자리’에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이다. 그 반대는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갈라 5,19-20)”이다. 이사 11,1-2에 근간을 두고 있는 개인의 성화를 위하여, 개인의 신앙을 견고케 하며 덕을 닦을 수 있도록 자세를 키워주는 성령7은聖靈七恩은 슬기와 깨달음(통달)의 영, 의견과 굳셈의 영, 지식과 효경의 영, 주님께 대한 두려움의 영이다. 곧 지혜Wisdom는 하느님의 것들을 바라도록 하고, 이해Understanding는 신앙의 신비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하며, 의견Counsel은 악한 자들의 속임수와 그들이 끼치는 위험을 피해 선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용기Fortitude(courage)는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름에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며, 지식Knowledge은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하고, 신심Piety(Reverence)은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존중을 깊이 하도록 하며, 경외Fear of the Lord(awe of God)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의식하도록 하는 은혜이다. 1코린 12,4-10에 근간을 두고 있는 공동 유익을 위한 9가지 봉사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치유, 믿음, 기적, 예언, 영 분별, 심령예언, 해석의 은사이다.
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16,12-15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만찬 석상에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하신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몇 년을 두고 당신의 행적과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당신 사랑을 통해 하느님에 관해 “알려 주셨고(엑세게사토, ἐξηγήσατο, exeghésato)”, 설명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시고 싶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아는 데에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단계별로 차츰 알아가게 될 것을 아셨다. 제자들은 『절대 끝나지 않을 시작을 매일 시작해야 하는(니싸의 성 그레고리오, 335?~395년)』 주님에 관한 앎의 추구를 매일 거듭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제자들의 삶은 주님에 대한 더욱 깊은 앎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생의 모든 만남과 현실 안에서 성령의 힘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내고, 앎을 심화하고, 의미를 캐가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우리 각자는 개인의 인생 안에서, 역사 안에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며 주님을 더욱 알아가는 삶을 체험하며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시듯이 복음은 항상 같은 복음이다. 복음은 바뀌지 않고 우리 인생과 역사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아간다. 한편, 요한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라며,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적에 관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이해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예수님의 부활이 비로소 제자들에게 믿음으로 가는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3. “이끌어주실 것…이야기하시며…알려주실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하고 말씀하신다.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에 관한 앎이 충분하지만, 그 앎의 깊이는 무궁무진, 무한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지만,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요한 14,26)이며,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더욱 깊이 알게 해주실 것이고,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은 알게 해주실 것이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더라도 성령의 현존이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려 하셨다는 구원의 신비에 관한 인간의 삶과 인류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심화하며, 또한 새로운 계시를 얻게 된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후계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께서 아드님을 구속하신다는 말도 아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 하신 대로 성자 아드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드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성령께서 계시고, 성령께서 계시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루카 24,44),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같은 말씀이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숨이 예수님의 “살”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네 번째 복음의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숨, 생명의 숨이 그리스도의 숨이요 성령이시며, 그 숨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숨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숨, 특별히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며, 우리가 복음화를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시고, 박해와 시련에서 꿋꿋하게 하시며, 언제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게 하시는(참조. 루카 24,48 사도 1,8) 성령을 찬미한다. 아멘!
교회의 시작… 몰랐던 교리네요.
잘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