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브로시안 전례력을 따르는 곳이나 미국의 Boston, Hartford, New York, Newark, Omaha, Philadelphia 교구들은 부활 제7주일을 지내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많은 곳에서는 부활 후 40일째에 지낸 주님 승천 대축일(목요일)을 주일로 옮겨 지낸다. 부활 시기 안에서 ‘부활 대축일’이나 ‘성령 강림 대축일’은 ‘가, 나, 다’ 해 어느 해를 막론하고 모두 같은 복음을 낭독하지만 ‘주님 승천 대축일’만큼은 각 해의 고유 복음을 낭독한다. ‘나’ 해는 마르코복음의 해이므로 당연히 마르코복음을 낭독한다.
교회가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의 복음으로 선정한 복음은 마르 16,1-8로 끝나는 마르코복음의 종결부에 훗날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하는 부분(9-20절)에서 취한다. 이 부분은 가장 오래된 마르코복음 사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많은 교부에게도 그리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이 부분을 “성경 말씀대로(secundum Scripturas)”(1코린 15,3.4) 복음에 마땅하다고 여겨 공식적인 복음의 대목으로 받아들인다. 이 부분은 부활하신 예수님,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다른 복음(특별히 공관복음)의 결론을 종합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1.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배반자 유다가 빠져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마르 16,14)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적어도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예수님의 수난에 이르러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그러던 중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알려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다.”(마르 16,14) “믿지 않았다(에피스테산, ἠπίστησαν, epístesan)”는 말은 앞선 마르 16,11에서도 반복된다. 그뿐만 아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를)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2-13) 이처럼 마르코복음 16장에 추가된 것으로 알려지는 9절 이하에서 거듭거듭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식을 “믿지 않았다”(11‧13‧14절)는 내용이 수록된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나타나셔서는 그들의 “불신(아피스티아, ἀπιστία, apistía)과 완고한 마음(스크레로카르디아, σκληροκαρδία, sklerokardía)을 꾸짖으셨다.”(마르 16,14)
사도들이 이처럼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다는 복음적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열한 제자는 의심이 깊었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공생활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공동체를 향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18) 하시던 때와 다름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열한 제자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인 바리사이들을 향해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마르 10,5)라고 야단치시던 상황, 고향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하는 상황과 같았다. 장차 증인들이 되어야 할 사람들의 믿음이 이런 정도였으니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믿지도 않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하고 암담한 상황이었다.
2.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셨다. 당신 수난의 흔적인 손과 발을 보여 주시지도 않고(참조. 루카 24,39-40),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시지도 않은 채(참조. 요한 20,20.27), “온 세상”으로 가라 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하신다. 믿음이랄 수도 없는 보잘것없는 그들에게 국경 없는 선교로 나아가라 명하시고 우주적인 사명을 수행하라 하신다. 참으로 우주적인 선교 사명이다. 제자의 사명은 인간적인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선포하면서 완성되어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 어디든 모든 사람, 모든 문화, 모든 피조물에게 나아가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선교의 보편적 사명을 분명하게 하시고, 아울러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 천사와 악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하신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장벽도 없고 거룩한 땅이라는 경계도 없다. 하염없이 연약했던 제자들 앞에 모든 창조물과 피조물이 놓여있다. 복음은 어떤 한 민족, 한 문화, 심지어는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어떤 하나의 종교에만 갇혀 있고 국한될 수 없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은 자기들의 땅과 가족, 관계와 문화를 뒤로 하고, 항상 단순한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풍성한 열매를 맺을 새로운 문화, 새로운 땅을 찾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경제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뛰어넘어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확실하다고 믿는 것들, 지적이고 문화적인 지원,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왔던 종교적 자산들을 벗어나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 투신해야 한다. “복음은…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뒤나미스 테오, δύναμις Θεοῦ, dýnamis theoû, the power of God)”(로마 1,16)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최우선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식의 문화적인 시도들이나 노력이 아니다. 우리의 거추장스럽고도 잡다한 여러 가지를 벗어버릴 때야 복음은 더욱 담대하게 뿌려지는 씨앗이 되고 껍질이 없는 씨앗처럼 훨씬 쉽게 싹이 틀 것이다. 우리는 복음화를 한답시고 우리가 마련하여 우리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를 가두고 마는 그런 소위 수단 마련을 하느라 저지른 실수, 다른 이들의 배경과 문화를 무시하고 그들 안에 우리 것을 배양한답시고 저질렀던 실수들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소위 서양에서 번성했던 복음의 씨앗을 능히 서양과 대적하고도 남는 아시아의 문화에 심는답시고 뿌려대면서, 결국은 어떤 면에서 서양식으로 다 자란 씨앗을 뿌려 더 자랄 수도 없었고 더더욱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썩어버린 씨앗을 두고 교회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마태 23,15)이라고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셨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저 한 사람이라도 개종자를 얻으려는 그릇된 열정으로 온 바다와 뭍을 싸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디에 있든 삶 자체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아니 먼저 복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말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를 두고 현 교황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빌리면서 『예수님께서는 설득이나 강요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복음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복음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신앙의 증거가 된답시고 이 무대 저 무대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이야기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성공 사례를 나불대고 다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증거요 증언이라고 얼굴에 핏대를 세웁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부활하신 주님 앞의 초라한 열한 제자들처럼 단순하고, 겸손하게, 그저 매일 자기가 있는 곳에서 복음을 살고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필요하고 이런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총칼로 무장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신다.
복음 선포에 직면해서 사람들은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으며,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라는 신비는 너무나도 위대한 신비이므로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이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판단하실 수 있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판단에 참여하거나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각자의 마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대답이다. 우리는 복음의 선포가 회개와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며 심판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면서 주님과 다른 이들의 만남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아 죄에서는 죽고 “그리스도께서…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참조. 로마 6,1-6) 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표징”들을 우리도 이루려는 열망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표징들은 악과 악마의 힘을 무력화하는 것이고, 다른 민족이나 언어와의 소통이며, 병들고 상처 입은 이들의 치유와 건강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열한 제자들을 파견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이 구절이 사실상 마르코에 의한 복음의 결론에 해당하는 절이다. 종말에 다시 올 것으로 알려진 엘리야 예언자(참조. 2열왕 2,9-18)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진 거룩한 사람들(참조. 창세 5,24)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하늘에 들어 올려져 그분 곁에 계시고, 일찍이 다윗이 시편 110편을 통해 예언한 대로 메시아요 주님으로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 그분은 하느님과 함께 다스리시는 아드님이시고, 죽음을 이기시어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에 참여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과 창조된 것들의 주님으로 선포되신 분이시고, 시간의 끝에 다시 오실 심판관이시다.
『선생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 분으로 되셨다는 말이고,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다는 말은 그들의 ‘지금·여기’로 들어오셨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선생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선생님이 승천하셨다는 언급에 이어 곧바로, 사방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라고 기록한 것 아니겠습니까?(이현주, ‘예수에게 도를 묻다’, 삼인, 2005년, 534-538쪽 참조)』
오늘 복음은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하는 구절로 끝난다. 제자들이 떠나가 복음을 선포한다. 주님을 믿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유혹으로 흔들리는 믿음 속에서도 제자들은 온 세상 어디나 복음을 믿어야 하는 곳이며 자기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임을 알고 세상 곳곳에 나가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함께 일”하시며 “표징”을 일으키시고 제자들의 권위와 진리를 “확증”해 주시는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
“믿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표징들을 거꾸로 뒤집어 장차 믿는 이들에게는 마귀들이 극성을 부릴 것이고, 뱀들이 독을 내뿜을 것이며, 각종 질병이 괴롭힐 것이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다. 주님의 승천 후에 이제 바야흐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에 교회가 만나게 되는 마귀들은 이기심selfishness과 폭력violence의 마귀들이고, 교회가 말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는 사랑의 언어이며, 교회가 마주할 뱀의 독들은 굶주림hunger·인종차별주의racism·性차별주의sexism와 쾌락주의hedonism·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소외victimization of the poor 등과 같은 것들이며, 교회를 괴롭힐 병들은 물질주의materialism·상대주의relativism(편리한 대로 가치의 기준이 오락가락하는)·개인주의individualism와 같은 것들이다.
『거룩한 교회는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육적으로 행하였던 이러한 표징들을 지금도 날마다 영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제들이 구마 은총으로 신자들에게 안수하고 악령이 신자들의 정신 안에 살지 못하게 할 때, 그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어떤 신자든지 속된 옛 삶을 버리고 거룩한 신비를 말하며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권능을 거듭 찬미할 때 그들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선한 권고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을 제거하는 사람이 곧 “뱀을 집어 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표징들은 영적이기에, 곧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키는 수단이기에 더 위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원하기만 하면 이러한 표징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성 大 그레고리오, 540~604년)』
예수님의 승천과 마지막 재림 사이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민족들 사이에서 교회 선교 사명의 주체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충만한 현존으로 임재하신다. 믿어야 하고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항상 교회의 몫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고, 교회 안에 함께 일하시며,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말씀과 표징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을 때 더욱 효율적으로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