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성소聖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은 특별히 사제나 수도자 성소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는지를 듣고 기념하는 부활시기를 지내오는 중에 교회는 벌써 네 번째 주일을 맞는다. 부활 제2주일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다른 시선으로 듣기 위해 부활 제3주일에 루카복음을 취한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여전히 제4복음서에 머물고 있다. 지난 주일들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공동체에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셨던 당신의 신분에 관해 시종일관 깊이 계시하시고 설파하신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나는~이다’(ἐγώ εἰμι, Egó eimi) 하고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신 것과 같은 형식의 이름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이름은 일찍이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느님께 감히 여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신 바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JHWH라는 표기로만 알려지는 이 하느님의 이름은, 자음만 있어서 어찌 발음하는지도 모를, 인간의 말로는 감히 묘사할 수 없는, 그리고 함부로 발음하거나 부를 수도 없는 하느님의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JHWH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읽을 수도 없어 하느님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 ‘엘로힘’이나 ‘아도나이’, 혹은 ‘하솀=그 이름이라는 뜻’ 등으로 대체해서 읽다가 훗날 사람들이 여기에 자음을 더해 ‘야훼’나 ‘여호와’로 발음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한 15,5)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는~이다’라는 패턴으로 밝히신다.
1. “나는 착한 목자다”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 말씀하신 후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 대목에서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우리말 “착한”은 희랍어에서 ‘칼로스καλός, kalós’이다. 영어에서 통상 ‘good’으로 번역하고 ‘훌륭하고 멋진’이라는 뜻이다) 하고 두 번이나 연거푸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구약의 오랜 역사 안에서 모세와 다윗,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 백성들에게 보내신 수많은 목자, 나아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믿으며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80,2)라고 불렀던 내용까지 아울러 당신 안에 집약하시며 당신이 참 목자이심을 밝히신다.
양 떼를 이끌고 보호하는 “목자”의 표상은 구약성경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적용된다. 목자이신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 앞서 나아가시는”(시편 68,8) 분, 당신 백성을 “바른 길로 끌어주시는”(시편 23,3) 분, 당신 백성을 “잔잔한 물가로 이끄시는”(시편 23,2) 분, 당신 백성을 “막대와 지팡이로 지켜주시는”(시편 23,4) 분, 당신 백성인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에제 34,11-이사 40,11 참조) 분, “위로하며 이끌어주고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는”(예레 31,9)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양 떼와 그 양을 치는 목자의 모습을 두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참조. 마태 9,36;10,6;15,24 등등), 급기야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메시아로서 그 “목자”이며, “양들이(인간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라는 사실을 밝히신다. “착한 목자”는 일한 만큼의 대가인 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자기 양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저 일로만 생각하는 “삯꾼”에 반대된다. 삯꾼이 삯꾼인 것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기만 살겠다고)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요한 10,12)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고용된 삯꾼은 그저 돈 받는 만큼만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거나, 설령 세속적인 대가는 없다 하여도 목자가 된다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는 일이어서 수행하는 이들이다. 같은 목자라 하더라도 누가 삯꾼이고 진짜 목자인지는 일상에서 쉽게 드러나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삯꾼은 양들을 그저 관리하고 통치할 뿐이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요한 10,13)
2.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반대로 자기 양들을 사랑하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이 (자기 목자를) 안다.”(요한 10,14) 착한 목자는 “양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착한 목자는 그저 양들과 함께 살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에 있으며 양들을 이끌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풀밭으로 인도한다. 착한 목자는 양들에게 다가오는 위협이 있으면 그 위협을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협으로 느끼기에 이 순간이 착한 목자인지 아닌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처럼 양과 목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목자가 삯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목자가 자기 양들 하나하나를 일일이 잘 알고 그 하나하나에 맞는 고유하고도 특별한 방식으로 그 양들을 이끌 수 있음을 알 때만 가능하고, 그러한 앎은 양들 가까이서 양들 하나하나를 챙기고 보살필 때만 주어진다.
진정한 목자의 일차적 자질은 양과의 친밀이다. 착한 목자는 밤낮으로 양들과 같이 있고, 광야와 초원을 가리지 않으며, 뜨거운 볕이나 빗속에서도 같이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까이 있는 밥그릇(의 근접성)’에 관해 말씀하신 바 있다. 엄밀하게 번역하면 먹고 마시는 ‘부엌의 근접성’이다. 양들은 예외 없이 밥그릇이 있는 곳에 관심이 있으며 목자는 통상 양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뒹굴며 양들이 먹을 때 자기도 먹는다. 그래서 목자에게서는 ‘양 냄새’가 난다. 인간의 삶에서도 밥 먹는 자리에서 중요한 결정들이 이루어진다. 양들 ‘곁’에도 아니고 양들 ‘위’에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양들 ‘저편’도 아닌, 양들 ‘가운데’에 있어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양들과 혼연일체가 된 목자가 착한 목자이다.
이렇게 혼연일체가 된 양과 목자 사이를 두고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양과 목자 사이의 관계를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당신과의 관계로 설명하시려고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 10,15)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목자와 양 사이가 서로가 서로를 관통하는 상호 앎이라고 하는 사목적 보살핌의 본질이 담겨있다. 목자만이 양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관계요 사랑의 유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양들도 그들과 가깝고 친한 목자의 삶, 행동, 감정, 걱정, 기쁨을 속속들이 안다. 양들은 목자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그 목소리만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양들은 설령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목자가 자기들과 함께 있음을 알고 안정과 평온을 느낀다.
“양”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일이다. 기질상 태어날 때부터 천방지축이고 자꾸만 길을 이탈하여 목자의 속을 썩이는 양도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런 양을 만나게 될 때, 그런 양의 다리를 기술적으로 부러트리고 다리가 나을 때까지 안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면 이내 양이 길이 들고 목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양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혹시 하느님께서 나를 길들이시려고 나의 다리를 부러트리신 순간은 아닌지, 내가 길을 잃었던 양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끝까지 나를 잃지 않으시려는 은총의 순간이고, 또 하느님께서 나를 안고 다니시는 시간이다.
한편 “양”은 동물 중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이 낮고 우둔한 동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서커스장에서도 훈련받은 양에 관한 서커스를 본 적이 없질 않은가 말이다. 또한 “양”들은 독립적으로 행동하지를 못하고 떼로 몰려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강한 동물이다. 무리에서 격리하면 생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집짐승이 된 이래 야생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하는 짐승이며, 그뿐만 아니라, 추위에 견디기 위한 털 이외에는 자기 몸의 보호 장치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며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 동물이다. 오히려 털이 있어 사나운 짐승들에게 쉽게 잡히거나 가죽이 벗겨지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울음소리도 다른 동물들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다. 이렇게 약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 양인데, 그 양들에 견줄 우리 인간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목숨을 내어놓는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지내신 공동체 생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목자가 양들을 알 듯 아셨고, 제자들 역시 양들이 목자를 알 듯 그렇게 예수님을 알았을 것이다.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끌어 당신과 함께 살아가게 될 역사의 사람들, 부활하신 주님과 그분을 믿는 이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이들과의 상호 앎과 통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이라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생명에 생명을 얻고 또 얻게 하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몸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라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사랑하신 모든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주실 것”(묵시 7,17)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요한 8,12)이시고, “세상의 구원자”(요한 4,42)이시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요한 3,16) 분이시므로 그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목자가 아니시다. 하느님께서 몸소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고백하고 증거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목자이시다.
3.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이처럼 당신이 착한 목자이심을 스스로 계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하시면서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과 통교를 다른 말씀으로 설파하신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목숨까지 내놓으며 “끝까지”(요한 13,1) 가는 사랑이 있고, 그래서 그 목숨을 다시 얻을 것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라는 구절에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저렇게 한다’는 식의 조건부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다시 얻는다”(동사. 람바노, λαμβάνω, lambanó)에서 이를 ‘re-take’가 아니라 ‘receive’로 읽어야 함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말 번역에서 차라리 “다시”를 빼고 읽는 것이 낫다. 예수님의 목숨이요 생명이 이것저것이 따로 있는 것이라거나 이것 다음에 저것 하는 식으로 다른 목숨이 있다는 식으로 읽힐 오류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아버지”는 항상 당신 활동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시작의 모든 것, 사랑의 명령, 지상의 삶 동안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려는 식별의 모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신 것처럼 이루어짐이요 성취이며 완성이고 “끝까지” 가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내어놓으시고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그렇게 해서 어떤 보상을 받자거나 상賞이나 공로의 대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년) 성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할 뿐(Love is sufficient of itself.)』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종교적이거나 신비스러운 이유로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들을 위해 당신의 사랑 전부를 내어놓으시고 쏟아부으셨을 뿐이다.
2세기 말의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베르시오의 무덤에는 『모든 사람에게 눈길이 가닿는 큰 눈을 가진 거룩한 목자의 제자』라는 묘비명이 쓰여 있다. 예수님은 과연 거룩한 목자, 착하신 목자, 훌륭하신 목자, 멋진 목자,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눈길이 와닿는 큰 눈을 가진 목자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눈길에서 보호받고 인도됨을 느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