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막幕-성상聖像을 가리는 관습

*사진-https://www.catholiceducation.org/

‘장막 막幕’이라는 글자는 ‘없을 막莫’ + ‘수건 건巾’으로서 수건이나 천, 헝겊과 같은 것으로 어떤 것을 가리거나 덮어 보이지 않게 하고 없는 듯이 하는 상태를 뜻한다. ‘수건 건巾’은 얼핏 보기에 깃대에 걸린 천 쪼가리의 형상이니 금방 그 글자 생김새의 유래가 짐작이 가지만, 그 ‘수건 건巾’ 위에 올라앉은 ‘없을 막/저물 모/ 덮을 묘莫’는 조금 따져봐야 한다. 이 글자는 ‘초두머리 초艹’와 ‘햇빛 대旲’가 결합하여 있고, ‘햇빛 대旲’는 다시 ‘큰 대大’ 위에 ‘날/해 일日’로 나뉜다. 그렇지만 ‘莫’이라는 글자는 원래 ‘풀 초屮’라는 글자를 네 개나 그려서 사방으로 풀이 돋아나 있는 상황인 ‘잡풀 우거질 망茻’ 한가운데에 ‘해 일日’이라는 글자를 담아 수풀 사이로 해가 없어져 날이 저무는 모습을 그렸다고 본다. 그런데 아래에 있던 ‘풀 초屮’ 두 개가 ‘큰 대大’로 잘못 변형되어 지금의 莫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날이 저문 것을 표현한 ‘莫’은 점차 ‘없다’라는 뜻까지 담았다. 성경의 언어로 ‘해, 태양’은 항상 그리스도이시다.

가톨릭교회는 오늘날 대개 성목요일 만찬 미사 후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십자가를 보이는 예식을 제외하고, 부활 전야 미사 때까지 성당에 있는 제대를 벗기고, 될 수 있으면 십자가를 비롯한 모든 성상이나 조각품들을 성당에서 가려 보이지 않게 하며, 심지어는 성당 밖으로 내가기까지 하는 오랜 관습을 가진다. 이는 스테인드글라스나 십자가의 길을 묘사한 14처 외의 모든 이미지에 해당하기도 한다. 아직 미국 여러 성당에서는 사순 제5주일부터 이러한 관습을 지켜오기도 하고, 독일 같은 곳에서는 사순시기 내내 그렇게 하기도 하며, 일반 가정에서도 그렇게 하기를 권고하지만, 대부분 성금요일의 수난 전례 때 십자가 경배를 위해 보인 십자가 외에 성목요일 만찬 미사 후부터 부활 전야 미사 때까지 성당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자리를 잡아간다. 극기와 보속으로서 지낸 사순시기는 부활 성야에 모든 성상과 이미지들이 베일을 벗고 다시 드러나 복원되면서 기쁨과 희망의 아름다운 부활시기로 전환된다.

추정하건대,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관습은 아마도 『9세기 독일 교회에서 사순시기 시작에 제대 앞에 큰 천을 깔았던 것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Hungertuch(hunger cloth)’라고 불리던 이 천은 사순시기 동안 제대를 감싸다가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태 27,51 마르 15,38 루카 23,45)는 말씀과 함께 제대가 다시 드러나는 순간을 맞으면서 당시 문맹이었던 신자들에게 사순시기를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혹자는 사순시기의 시작에 전례적으로 죄인인 신자들을 성당 밖으로 쫓아내던 공동 참회 예절이 있었는데 점차 신자들을 성당 밖으로 내치지 않고 재의 수요일로 참회 예절을 진행하게 된 교회가 대신 하느님의 기쁨 안에 들어가게 되는 부활절까지 제대나 지성소를 가리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세에도 이렇게 제대나 성상을 가리는 관습이 있기는 하였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규칙은 17세기 주교님들이 마련한 전례 지침이 출간될 때까지는 보이지 않는다.(참조. https://blessedsacramentregina.ca/cover-crosses-images-lent/)』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가림을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러한 전례적 관습은 오늘날 각 지역의 주교회의 소관으로 남았다.

이러한 관습은 우리의 감각들을 다스리고 재계齋戒하면서 부활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인간의 희망을 간절히 표현하는 과정이다. 그런 뜻으로 이러한 가림을 두고 ‘눈의 재齋’라 하기도 하고, 성목요일 전례에서 오르간을 비롯한 악기 사용을 절제하는 것은 두고는 ‘귀의 재齋’라 하기도 한다. 그렇게 가톨릭교회의 ‘가림’은 공동체가 특별한 시기에 돌입하였으며 준비가 필요한 시기임을 알리고,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를 떠나 선포되는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라는 위대한 본질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부활절에 대한 기대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13) 하는 말씀에서 보듯이 베일에 싸인 것처럼 “어렴풋이” 보는 것과 “부분적으로” 아는 것들 사이에서 “그때”를 기다리며 산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시(revelation<re-veil)로 이 땅의 모든 막幕(veil)을 걷어내야만 하는 삶을 산다.(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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