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중 제18주일이지만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므로 축일의 독서들과 복음을 따른다. 동방교회에서는 4세기경,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11세기경부터 이 축일을 기념해 왔는데, 1456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8월 6일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로 로마 전례력에 공식 도입하였다. 교회는 이로부터 40일 후인 9월 14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고자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첫 번째 예고 후(마태 16,21)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 “높은 산에 오르셨다”
“산”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곳이다. 2세기 경부터 교회는 이 산이 타볼Tabor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구약에서 모세가 갔던 “하느님의 산 호렙(=시나이 산)”(탈출 3,1),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오르내린 곳(탈출 19-34장), 엘리야 예언자가 피신한 곳(1열왕 19,1-18), 예언자들이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이사 2,2 미카 4,1)이라 하였던 곳들이 모두 “산”이다.
『우리는 그곳에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늘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 것처럼 우리도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면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빛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우리 영혼의 모습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되며, 그분의 모상으로 형성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더욱 큰 영광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기쁨을 지니고 그 산으로 달려가 모세와 엘리야, 야고보와 요한처럼 구름속으로 들어갑시다. 베드로처럼 이 하느님의 영광에 넋을 잃고 이 아름다운 변모의 영광으로 변모되어 이 세상 것들을 벗어나 높이 들려지도록 합시다. 육신과 피조물은 뒤에다 남겨 두고 탈혼에 빠진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면서 창조주께로 향합시다.』(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 주교 AC 700년경)』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신다. 첫 번째로 부르셨던 제자들(마태 4,18-22) 중 셋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다. 이 셋은 야이로의 딸의 소생 때에(마르 4,18-22) 동행하였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수난 전날 기도 때에도(마태 26,36-46) 예수님 곁에 있었다. 교부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향주덕向主德인 ‘믿음, 희망, 사랑’을 각각 상징한다고 풀이하면서 예수님 곁에 항상 있어야 할 덕으로 묘사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향주덕으로 주님의 산에 오르는 여정을 산다.
인생에는 반드시 분기점이 되는 산들이 있다.
모세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먼 길을 나섰을 때, 이집트에서 하느님의 산인 시나이 산에 이르는 전반기가 있었고, 산으로부터 십계명으로 무장한 백성들이 다시 모압의 평야에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약속의 땅을 볼 수 있었던 후반기가 있었다. 시나이 산이 분기점이었다.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이교도들의 신과 대적을 벌여 미움을 받게 되고, 이에 이제벨을 피해 도망가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 빵과 물을 얻어, 옛날 모세가 머물렀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는 주님의 명을 받아 다시 힘을 차려 엘리사를 얻기에 이른다.
신약의 모세로 불리는 예수님의 삶은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시작하여 무덤 동굴에서 마감하신 공생활이라 하지만, 예수님께도 분기점이 되는 산이 있었다. 어쩌면 예수님은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공생활을 마감하신 분이다. 산상설교가 그렇고, 올리브 동산이 그러하며 마침내 해골산이 그렇다. 그런데도 그 산 중에서 분기점이 되는 산은 뭐니 뭐니 해도 타볼 산이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흘낏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참조. 마태 17장) 그렇게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한 당신의 준비를 하신다.
산은 기도의 자리이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산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자리이다. 산은 올라갔다 내려올 때 금송아지를 마주쳐야만 하고(탈출 32장), 더러운 영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마르 9장) 깨우치고 각오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산에 가셨다.
2. “모습이 변하셨는데”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세 복음사가가 모두, 그러나 각각 전한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에 당신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다니 12,3) 한 것처럼, 그렇게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 드러내신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곧 구약의 율법과 예언 전체를 아우르는 대표들과 함께 대화하신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모세와 엘리야…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라고 루카가 기록한 대로이다.
초세기의 교부인 오리게네스(185~254년)는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오른 제자들만이 아니라 아직 산 밑에 있는 우리도 우리의 지혜가 커질 때 예수님의 변모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그분을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게 된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사도들은 주님의 빛을 받아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존재로 점점 변화되어갔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 변화되어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바뀌고 변화된 삶이며 변형된 삶을 산다. 우리는 계속 변화되어가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의 삶은 인간을 만나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바꾸고자 하시는 삶의 연속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기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몸과 피로 바꾸셨고, 감긴 눈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바꾸셨으며, 오그라든 사지를 팔팔한 사지로 바꾸셨고, 죄를 용서로, 나그네는 이웃이요 형제이며 가족으로, 노예를 자유인으로, 죽을 몸을 살아있는 몸으로, 십자가를 부활로, 슬픔을 기쁨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죄인들을 거룩한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바꾸기에 여념이 없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변모 안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하며 모든 피조물의 변화를 기도한다. 아울러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하고 고백한다.
3. “초막 셋”, “구름”
베드로는 구약의 모세가 “만남의 천막”(탈출 33,7-11)에서 주님을 만났듯이 그렇게 주님과 함께 있을 천막을 짓겠다고 한다. 베드로는 황홀한 산 위의 정상mountaintop체험 후에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태 17,5) “구름”은 예로부터 하느님 현존의 표시이고(탈출 19,16;20,21;24,15 등등), 주님 영광의 표시(탈출 40,34-35 1열왕 8,10-12)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이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수님의 세례 때에도(마태 3,17) 들렸던 소리이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하고 예언하였던 소리이고, 시편 작가가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하고 노래하였던 바로 그 소리이다.
그 소리가 “들어라”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하고 매일 되 뇌이던 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하고 신신당부하던 말이다. “들어라” 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부질없는 땅 위의 초막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주님을 위한 초막을 지어야만 한다 하시는 것이고, 산을 내려가야 한다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자가 산에 올라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타볼 산에 오른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산에도 올라야만 한다. 우리 영적 생활에도 항상 타볼(영광)과 골고타(십자가 죽음) 두 산이 있다. “들어라” 하신 예수께서 산을 내려오시며 부활의 신비가 완성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하고 명령하신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모신 제자들만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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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아멘!
“주님의 빛을 받아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존재로 점점 변화되어갔다.” 마음에 닿으며 묵상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오늘도 주님의 말씀, 이웃의 말을 잘 경청해야겠어요 잘 듣지 못함에서 오늘 평화롭지 못함이 자신을. 이웃을 힘들게 하네요 저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부님 더위 조심하셔요~
참 많이 더워요.
이것 또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견디어야 하는 일상이겠지요?
하느님의 위로가 더위에도 현장에서 일하시는
모든 노동자분들께 이루어지길 청해봅니다.
더불어 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건강 잘
챙기시고 화이팅해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 하나가 듣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뒤늦게 실감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하느님께 청했나 봅니다. 참된 평화를 위해 저 또한 듣는 마음을 청해봅니다.
나의 마음안에,
이웃들 마음안에
가난한이들 마음안에
여러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 마음안에
은총이 가득하여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간직하며 힘과 지혜를 얻을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