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피트의 높이와 무게 6톤 반에 달하면서 묵주기도의 신비를 형상화한 거대 청동상으로 미주 동북부 지역에서 가장 큰 성모님을 모신 성모님 성지聖地에서 3년이나 되는 시간을 보내는 행복을 누렸다. 매일 저녁 식사 후에 성모님 주변을 돌 때마다 어느 정도 떨어져야만 보이는 성모님 얼굴을 보았고 당신은 왜 거기 그렇게 우뚝 서 계시는가를 물었다.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물음을 넘어선 물음이요, 본질에서 체험적 앎이며, 직관적인 봄이요 깨달음이자 설명이기보다는 의식意識이요 깨어있음이다. 이를 논리적인 물음이요 앎이며 연역적인 봄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해서 안 될 일이요 되지도 않을 일이다.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성모님을 떠나서 얘기할 수 없다.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인聖人은 한결같이 성모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다. 성모님에 관해서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교회의 역사와 삶으로, 예술적으로, 현대의 학문적인 도움으로 서술할 수가 있을지 몰라도, 이는 결국 성모님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 뿐 성모님을 향한 신자들의 믿음과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지만,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복되신 분이라 찬미하며, 그분의 전구轉求를 기도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어 그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특별히 가톨릭교회 신비神祕의 정점에 있는 성체성사의 감사기도문은 어느 양식이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성모님을 담는다. 이는 성체성사와 성모님 간에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신비가 신비를 잇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첫 번째 셰키나(שכינה, Shekhina)이며 처소이자, 거룩한 장막이며, 성체를 모신 감실龕室이다. 그렇게 사람이 되신 잉태의 순간부터 인간은 엘리사벳이 지닌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알아 모신다.
성모님은 첫 번째 성체거동을 이루신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모님께 인사한다. 이를 두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인류 구원 역사에서 최초의 성체거동이요 행렬이었다고 묘사한다.
성모님은 첫 번째로 성체성사의 신비를 몸으로 사신다.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 밑에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루카 2,35), 그리고 부활 후 사도들이 거행한 첫 번째 성체성사 안에서 그 신비를 온전히 사신다.
성모님은 실로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아 이를 당신 존재로 드러내는 성체성사의 위대한 선생이시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고문과 형벌, 죽음의 도구인 십자가를 비로소 마리아처럼 구원의 표징으로 알아 모신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나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을 내 집에 모신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이고, 성모님께서는 전구자가 되시어 우리를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통로이시다. 성모님을 향한 사랑으로 교회의 역사 안에 마리아 신심의 기초를 놓았고, 소위 ‘마리아 운동’의 기수 중 한 분이라고 불리는 성 베르나르도(1090~1153년)는 『성모님께 달려오십시오. 성모님은 불쌍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계단입니다. 제가 믿어 의심하지 않고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분의 아드님께서 당신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한다. 성체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되는 이는 어서 빨리 성모님께 달려가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