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내다’라는 말에서 ‘성’은 한자어로 ‘성낼 노怒/분忿/분憤/개愾/에恚’와 같은 글자들을 사용한다. 이 글자들에는 모두 ‘마음 심心’이 들어 있다. 분노는 곧잘 나의 밖에서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마음에 품다가, 말로 표현하다가, 가혹한 비난과 비판의 행동으로까지 3단계로 표출된다(‘산상 설교에 관한 강론’ 참조)고 하였듯이 성이 나는 것은 마음에 응어리가 맺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므로 ‘마음 심心’이라는 글자를 기본으로 담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
성을 내는 것을 두고 ‘화가 난다’고도 말한다. ‘화가 난다’라고 할 때의 ‘화’는 ‘불 화火’이다. ‘분憤’이나 ‘개愾’라는 글자에 ‘크다’거나 ‘차오른다’라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때면 솥에 김이 가득 차오르는 상황처럼 화가 나면 속에서 끓어오른다. 화가 난 사람을 두고 ‘뚜껑이 열렸다’거나 ‘열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묘하게도 정확하다. 다만 ‘분개하다’ 할 때는 ‘분개憤愾’가 아니라 ‘憤慨’라 쓴다. ‘한탄할, 개탄할, 슬퍼할 개慨’를 사용하여 ‘분개憤慨(몹시 분하고 못마땅하여 화가 나거나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라고 쓴다. 분노에는 이렇게 단순한 격앙뿐 아니라 억울함과 탄식이 함께 섞여 있음이 드러닌다.
사람은 누구나 때때로 성을 낸다. 분노忿怒하며 산다. 성을 내는 것이 나의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에 의해 나의 무엇인가가 다쳤음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화’는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닌 ‘이기利己’와 닿아 있다. 그래도 성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살아야 한다. 성현들의 말씀에 따라서 분노는 모든 악이 드나드는 대문이 되기 때문이다. 분노의 작은 불씨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이 되어 만사를 일순간에 그르치게 하고 만다.
17세기 초 중국에 와서 한자를 배우고, 한자로 책을 써서 그리스도교를 알린 포르투갈 사람 판토하 신부님(예수회)께서는 <칠극七克>이라는 저서에서 성내고 화내는 상황은 타오르는 불길과 같으니 그 불길을 꺼트려야 한다면서 ‘식분熄忿·憤’(꺼트릴/꺼질 熄)이라 하셨다. 『분노는 타오르는 불과 같으니, 참음으로써 꺼야 한다. 참으면 없어지고 고요하면 물러난다.(忍則去, 靜則却)(빤또하, 칠극, 일조각, 1998년, 200쪽)』하셨다. 분노의 불길은 참아서 끄고, 상처 입은 자아를 살펴서 꺼야만 한다. 그렇다고 억지로 눌러만 두면 터진다. 참고 살피기 위해서 화가 나는 상황을 조용히 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고르는 것이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