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하여라!” 하신 산상 설교의 대헌장(마태 5,1-12)과 그에 따라 세상을 소금이요 빛으로 살아야 하는 제자들의 신분(마태 5,13-16)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산상 설교의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인 세부 내용으로 기나긴 말씀을 시작하신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모두 3개의 장을 할애하여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과 그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진지하게 살려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편집하고 재구성한다.
현재 우리가 자리하고 있는 5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들었다…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의 형식이 후렴구처럼 되풀이된다. 『① 21-26절 ; 성내지도 마라 ② 27-30절 ; 남의 아내를 탐내지도 마라 ③ 31-32절 ; 아내를 소박하지도 마라 ④ 33-37절 ; 맹세하지도 마라 ⑤ 38-42절 ; 보복하지도 마라 ⑥ 43-48절 ; 원수까지 사랑하라』 오늘 복음에는 이 6가지의 말씀 중 앞 4개가 담겼다. 영어로는 이를 두고 그저 ‘six examples’라 하여 율법에서 선별된 윤리적 지침의 성격이 강한 6개의 실례로 다루는 분석들이 많다. 예수님께서는 대대로 전통적인 소위 스승들을 통해서 전수됐던 율법, 곧 ‘기록되었던 것’과 당신께서 ‘선포하고자 하시는 내용’을 대비하시면서 몸소 더욱 권위 있고 확실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펼치신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토라)’을 폐지(파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그 안에 담긴 참뜻을 밝히고, 당신의 위격 안에서 그 온전한 의미를 실현하고 계시하러) 왔다.”(마태 5,17)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받았고,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전하였으며, 여호수아는 그것을 원로들과 예언자들에게 전했다.(미쉬나Mishnah, 아봇 Ⅰ,1)』라는 사실을 인정하시지만, 메시아로서 당신의 권위로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해석을 주시면서 당신의 그러한 해석 이후에는 또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전통과 복음의 새로움 간 관계를 진지하게 다룬다. 그의 집필 배경에는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많은 사람이 있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대상이었고, 그들이 많은 라삐들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야 하는지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기술하던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전통주의자와 혁신주의자 사이, 율법에 대한 열성적인 율법주의자들과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더욱 민감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
마태오에 의한 제1복음서에 따를 때 예수님은 토라에 충실하시면서 그와는 다른 어떤 가르침을 대체하시려는 분은 아닌 것처럼 드러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권위”(ἐξουσία, exousía, 영어로 authority)로 그 안에 담긴 깊은 뜻을 올바르게 드러내시고자 베일에 가려진 토라의 ‘베일을 걷어내시고(re-veil > revelation, 계시)’ 당신의 제자들이 율법을 제대로 의롭게 준수할 수 있게 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는 율법을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일정한 사조를 이루면서 율법에 더욱 헌신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당시 신학자들이나 성경 관련 공적인 주석가들의 제시가 마땅치 않으셨다.
‘바리사이’라는 말 자체가 동사 ‘페리세우오’(περισσεύω, perisseúo, 영어로 above and beyond, more than…, what goes further-more, surpasses 좀 더 잘해보고 뭔가를 더 해 보려는)에서 왔다. 이러한 배경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18ㄴ-20) 하신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올바로 전해져서, 제대로 지켜지고 실천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예수님의 여섯 가지 ‘반정립反定立, 영어-antithesis(‘반대 명제’나 ‘대구對句’로 표기하기도 하며, 정양모 신부는 이를 ‘대당명제對當命題’로 명기)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언약의 백성에게서 진정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 그저 살인을 하지 말라는 뜻일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지만 전해지지 않은 내용, 곧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공격성을 자제하고, 분노가 폭력이 되기 전에 이를 없애야 하며,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는 말을 삼가야 한다’라는 내용이 예수님에 의해 밝혀진다. 행동이 나오기 전에 인간의 마음에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하신다. 행동보다 마음이 우선이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와 화해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도 화해할 수 있다. 우리는 왕왕 누군가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는 행위로써 우리 안에 내재한 악을 내려놓을 필요를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바보”니 “멍청이”니 하는 단어를 돌멩이 삼아 상대방에게 던지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부른 사람을 피하도록 유도한다. 당시 라삐들도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으로부터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하는 깊고 적극적인 의미로 드러난다.
2. “간음해서는 안 된다…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
“간음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4 신명 5,18 마태 5,27)라는 계명과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신명 24,1 마태 5,31)라는 계명, 곧 두 번째와 세 번째 반정립의 말씀이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띄게 간음하지 않거나 아내를 버리면서 이혼장을 써주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은 욕망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성적性的으로 소유하고 싶어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내심 방법을 찾으면서도 방법을 찾지 못해 그러지 못한다면 이는 이미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을 간음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 하신다. 앞에서 분노가 살인의 뿌리가 된 것처럼 ‘음욕’이 간음의 뿌리가 된다고 하신다. 간음은 음욕과 음란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음란은 마치 물이 넘쳐나는 것과 같은데, 이는 마음을 곧고 바르게 하여서 막아야 한다.…더러운 재미를 즐기면서 스스로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마음이 어두워져 사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마음이 쉽게 바뀌며 일정함이 없는 것…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하느님을 미워하는 것…덕과 의義,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빤또하, 칠극, 박유리 역, 일조각, 2018년, 1판 12쇄, 323쪽)』이다.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당시 간음의 경우에 일방적으로 간음한 여자가 문제이고 원인의 시발점이었다면서 여성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관행에서 그 여성을 간음하려고 마음을 품은 남성에게로 예수님의 시선이 옮겨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는 계명을 두고도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5,32)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여성에게서 남성에게로 분명하게 바뀌어 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구절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혼에 관해 예외를 인정하듯이 들리면서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다. 그렇지만 복음사가 마태오가 당시 여성이 주도하는 이혼이 거의 불가능하고, 여성이 음행할 때 여성을 내칠 수 있도록 한 남성 지배적인 팔레스티나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여성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삽입한 내용으로 보인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르코와 루카의 복음에는 이러한 예외적인 말이 들어 있지 않다.(참조. 마르 10,11 루카 16,18) 예수님의 혼인관은 일단 맺은 혼인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므로 재혼은 물론이고 나아가 소박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조금 더 넓게 말씀하시면서 혼인을 살아가면서 여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사랑의 봉인으로 “둘이 한 몸”인 혼인 계약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시며 강조하신다.(참조. 마태 19,1-9) 예수님께서는 소박법(신명 24,1)까지도 폐기하시는 분이시다.
『“불륜(πορνεία, porneia)”은 주로 3가지로 해석되는데, 그 첫째는 ‘수치스러운 일’이다.…그러나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째는 ‘간음’이다. 셋째는 무엇보다도 레위 18,6-18의 법에 따른 (근친상간과도 같은) 불법적 부부관계이다.(주석성경, 마태오복음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0년 1판 1쇄, 신약 56쪽-각주43)』 우리의 몸은, 특별히 다른 이와 관계를 맺는 데 사용되는 감각은 열정이나 충동의 끓어오름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의 능력과 잠재력으로 지배되고 정돈되며 타오르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수련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성적인 감각을 마음과 정신에서 분리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엄한 말씀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음란함은 물이 넘쳐나는 것과 같아서 정결함으로 이를 막아야 하므로, 방음坊淫(음란함을 막다)을 짓는다.…베르나르도가 말했다. ‘삿된 마귀가 도리를 향하는 마음을 공격할 때 그 수레가 몹시 많으니, 음란이라는 수레가 그중 하나다. 풍성한 음식과 화려한 의상, 일이 없어 잠만 자는 것과 소란스러움을 떠올려 쉽게 타오르는 것이 네 개의 바퀴다.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재물이 넉넉한 것이 두 마리 말이 되고, 게으르고 나약한 것과 구차하게 편안한 것이 두 명의 하인이다.’ 음란한 욕망은 마음에 일어나는 불길이다. 이 불이 한번 일어나면 착한 마음, 덕스러운 바람, 의로운 행실이 모두 타버린다. 땔감은 술과 음식이고, 불길은 거만함과 방자함이며, 불똥은 남을 욕보이는 말이고, 연기는 더러운 이름이며 재는 고약한 질병, 나쁜 질병이다. 불이 처음 이어날 때는 비록 미약해도 이를 소홀히 보면 반드시 큰 불길이 되어 쳐서 끄기가 가장 어렵다.(판토하, 칠극七克, 정민 역, 김영사, 2021년 1판 1쇄, 451.454-455쪽)』
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 번째 반정립이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레위 19,12 민수 30,3 신명 23,22 마태 5,33)라고 주어진다. 인간관계 안의 진실에 관한 문제이다. 시나이 산에서의 여덟 번째 계명이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신명 5,20)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관해 잘 알고 계신다. 인간은 상호 관계 안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없어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워 맹세한다.(참조. 탈출 20,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태 5,34-36) 하고 아주 강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하시면서 대안으로서 진실하고도 단순한 말로 말할 것이며, 자기 말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라 하신다. 자기 말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이것저것, 심지어 거룩하신 하느님까지도 끌어들이는 무모한 짓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진실 입증을 위한 도구가 아니시며 적어도 우리의 생애 동안 우리의 거짓을 벌하시려고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진리가 없는” 말, 구차한 군더더기 말로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려다가는 그 말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가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간사한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합니다.”(시편 12,3)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야말로 “아멘 그 자체”(묵시 3,14)이신 분, 바오로가 설파한 대로 하느님의 “예!”만 되시는 분(참조. 2코린 1,19-20)이시니 제자들인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과 비교해 언어와 문자라는 놀라운 선물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이 때로 얼마나 연약한 수단인지 모른다. 인간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지혜를 얻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파하신 가르침들은 ‘새로운 법’이나 ‘새로운 ’도덕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예수님의 해석을 얻어 비로소 권위 있는 내용이 되면서 애초에 하느님께서 원하신 뜻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오직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이를 이루실 수 있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