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전례에서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에 기념하던 주님의 세례를 따로 떼어 별도로 기념한다. 성 막시모(4세기)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첫 번째 성탄,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음성)과 성령 안에 나신 두 번째 성탄』이라고 말한 이 날 교회는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고 우리의 세례를 상기한다. 동방교회에서는 공현 축일에 세례수를 축복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위해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만들고자 물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교리에 바탕을 둔다. 물은 우리의 생명과 존재, 그리고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물질로서 정화의 의미와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의미를 담는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의 영을 받으신 이, 선택을 받으신 이, 마음에 드는 이께서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시리라.”라고 예언하면서 세례 때의 주님을 예고한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힘을 부어 받으신 예수님께서 두루 좋은 일을 하시고, 모두 고쳐주셨다고 증언한다. 세례를 받으신 주님의 삶이 인간에게 하실 일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처음으로 대중들 가운데 나타나신 장면이다. 마르코복음이나 루카복음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말렸다”라는 식의 예수님의 세례를 반대하는 듯한 말을 삽입하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참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돋보이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위해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으로 오셨다. 마태 3,6에 따르면 요르단강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자리이다. 복음에서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를 알아본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곧바로 광야로 가시어 악마들의 유혹을 이겨내시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실 것이다. 복음에서는 ① “하늘이 열리다” ②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다” ③ “하늘에서 말하는 소리”라는 세 가지 표징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낸다.
공생활 시작에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그 세례를 온전히 사신다. 우리 인간들도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으나 그 세례의 은총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1.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마태 3,13) 예수님의 공적인 생활 시작 장면이다.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은 기원후 27년경(루카 3,1)이다. 예수님께서 몸소 갈릴래아 나자렛(마르 1,9)을 떠나 요르단강으로 가신다. 예수님의 주도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으셨고 그에게서 세례까지 받으셨다는 예수님의 모습이 초대교회에서는 문젯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마치 요한이 예수님보다 우위이고 더 위대하게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이 문제들은 자연스레 해결된다.
하느님께서 먼저 발걸음을 떼시고 인간을 찾아오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죄라고는 없으신 분이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듯이, 죄지은 일이 없으신 분이 우리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신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라고 기술한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요한을 찾아가시고, 죄인들 틈에 끼어서 조용히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신다.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마태 3,14)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말리고자 한다. 요한이 이렇게 말리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요한이 예수님의 우위성을 감지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요한의 세례가 ‘회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참조. 마태 3,11) 곧, 요한의 세례인 수세水洗를 완성하시어 성령과 불의 세례를 베푸실 예수님께서 필요하지도 않은 수세를 받으려 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자신의 발을 씻겨주시려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요한 13,6)하며 예수님을 말리는 대목과 비슷하다. 세례자 요한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가 자기의 수세보다 우월함을 이미 앞에 나오는 설교에서 드러내었다.(참조. 요한 3,23-30)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요한과 함께 “우리가…이루어야 합니다”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도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아버지,…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하셨던 말을 연상하게 한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이 해야 할 바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 모시는 일뿐이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실 분이시다. 하늘나라를 실현하고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분이다. 그러기 위해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를 받아 그들과 연대하시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순종하고자 하신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종교적 의미를 담는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그 뜻이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신다. 세례자는 “의로움”의 길을 열었고 “의로움”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으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그들과 연대하시고 마침내 자신을 봉헌하시어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어 “의로움”을 완성하신다.
2. “물에서 올라오셨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 3,16) 옛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듯이 새로운 탈출을 위하여 새로운 모세이신 분이 “물에서 올라오신다.” 물에서 올라옴은 죄에서 씻겨짐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죄의 물에 당신을 담그신 것은 죄인을 일으키시고 죄인을 죄의 물에서 끄집어내기 위함이시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그 짐을 요르단강 속으로 가라앉히신다. 그분의 첫 공생활은 바로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시는 일로 시작된다. 그것은 십자가를 미리 짊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다.”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예형이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4세기)는 이 장면을 두고 『물속으로 내려가셔서 힘센 자를 결박하셨다.』고 표현한다. 예수님께서 물속에 내려가심과 올라오심 안에 우리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때 예수님께 “하늘이 열렸다.”(마태 3,16) 하늘이 열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통교의 가능성이 열림을 뜻하고(에제 1,1 2마카 3,24이하 2바룩 22 요한 1,51 사도 7,55-56;10,11 묵시 11,19;19,11-21), 또한 땅과 하늘이 하나 됨을 뜻하며(참조. 요한 1,51 사도 7,56;10,11-16),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다는 것을(이사 63,19 에제 1,1 묵시 4,1;19,11) 상징하는 표현이다. 인간의 죄가 하늘을 닫았으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심으로써 하늘이 다시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태 3,16) 마태오가 구약을 인용하여 그 구약의 완성이라고 자주 말하는 방식으로 본다면 하느님의 영이 메시아에게 듬뿍 내리리라는 예언의 성취(이사 11,1-2;61,1)라고 볼 수 있다. “비둘기처럼”이라고 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라 비둘기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다른 이들은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을(참조. 아가 2,14;5,2) 가리킨다고도 이해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 창조 때에 심연의 물 위를 감도신 성령을(창세 1,2) 비둘기 모습으로 연상한 또 다른 유다인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복음서의 이 비둘기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킨다고 여긴다.
『오늘, 성령께서는 비둘기의 모양으로 물 위에 내려오시어, 노아에게 세상의 홍수가 가라앉았다고 전해 준 그 비둘기처럼, 이제 온 세상의 난파가 영원히 끝났음을 알려 줍니다. 옛 비둘기는 다만 올리브 가지를 물고 왔지만, 이 새 비둘기는 새 조상인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올리브 기름을 풍부히 부어줍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이 예언자를 시켜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느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당신 동료들에 앞서 당신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시편 45,8)”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AC 380~450년, 성무일도 공현 후 월요일 독서기도)』
3.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마음에 들어 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러나 말씀의 객체는 예수님에게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누군가에게 소개하듯이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앞 절 16절과 이 문장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가 드러난다. “마음에 들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마음에 든 그 사람을 선택하는 의지까지 포함하는 표현이다. 이 인용구는 2사무 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 2,7과 이사 42,1을 합성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로 요구하시는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창세 22,2)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물에 내려가시고 물속에 잠기신 것이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예형이라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들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는 그분의 부활을 미리 알려주는 소리다.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 안에는 예수님의 온 생애가 담겼다.
『요한은 세례를 주고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가십니다. 아마도 당신에게 세례를 베푸는 이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이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옛 아담을 물속에 묻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요한이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하고 거절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하고 고집하십니다.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5)인 요한이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에게, 소리가 말씀에게, 신랑의 친구가 신랑에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이”(마태 11,11)가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신 분에게,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뛰놀았던(루카 1,41) 이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인사를 받으신 분에게, 현재를 알리는 이가 미래를 보여주실 분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나는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마태 3,15)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에서 나오실 때 당신과 함께 온 세상을 들고 올라오십니다. 그리고 낙원의 문들이 불 칼로 닫히듯(창세 3,24) 아담이 닫아버려 자신과 후손들이 못 들어가게 한 그 하늘이 갈라지고 열리는 것을 보십니다. 그다음 성령은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신 그분 위에 나타나시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하늘 높은 데서 음성이 내려옵니다.…오래전에 비둘기는 홍수가 끝났다는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의 세례를 영예로이 맞으며 이 축제를 정성되이 경축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깨끗이 씻고 또 씻으십시오. 하느님께는 인간의 회개와 구원보다 더 마음에 드시는 일이 없습니다.…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태양처럼 빛나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마련되었습니다.…(나찌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AC 329/330-389/390년-성무일도 주님 세례 축일 독서기도)』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 장면으로 예수님 공생활의 처음을 기록한 마태오는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27)라고 쓴다. 세례가 예수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듯이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의 처음과 마지막도 세례이다. 아멘!